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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9. 2022

스스로를 독려하지 않는데 누가 널 도울 수 있으랴?

스스로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연줄에 비벼대는 바보들에게.

子曰: “不曰 ‘如之何如之何’ 者, 吾末如之何也已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할까, 어찌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자는 나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이 장의 간접 인용 구절은 고문의 문법구조상 현대인들이 약간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윗글에서 ‘어찌할까?’라고 번역한 ‘如之何’라는 문구에 대해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어?’라는 반문의 의미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포기의 의미와 어쩔 수 없다며 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경우를 묘사한 것이라는 희대의 오역을 버젓이 내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      


‘如之何’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뒤에 공자가 말한 그렇게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내가 어찌할 바가 없다면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 자라면 어떻게 도와줄 여지가 없다며 단호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문의 문법은 정치(精致)하여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 의미를 완전히 오독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만 한다.     


주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독을 할 초심자들을 위해 그 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상세한 풀이를 덧붙여 설명한다.


‘如之何, 如之何(여지하, 여지하)’는 익숙히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서 대처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한다면 비록 성인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如之何’라는 표현은 ‘이걸 어쩌지?’라고 표현하되,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그 앞에서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 사안을 면밀히 살피고 분석하기 위해 다시 한번 재정비하는 단계를 준비함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표현인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특정한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 아닌 평상시라 할지라도 늘 삼가는 마음으로, 나의 덕을 어떻게 해야 향상시키며 나의 공부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수양하여 제고(提高)할 수 있을까 하며 深思熟考(심사숙고)하느라 마음 아파하고 조바심 태우는 모양을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와 같은 마음가짐과 배움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 함부로 행동해댄다면 자신도 그런 자를 어찌 도와줄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군자를 지향하며 지극한 善(선)을 목표로 삼은 사람이라면 학업이 진보하지 않음을 근심하고 세월이 함께해 주지 않음을 슬퍼하여 밤이나 낮이나 근심하고 탄식하기 마련이라 옛 성인들은 말씀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 奮發(분발) 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성인이라도 도와줄 길이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장이 이전 장과 어떤 유관한 맥락에서 연결이 되는지 이 ‘위령공(衛靈公) 편’의 기저에 흐르는 공통된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직도 감을 못 잡은 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논어(論語)>를 제대로 읽는 독법(讀法)을 확인해보기로 하자. 우리는 바로 이전 장에서 잘못된 결과에 대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외재적인 탓만 하는 소인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공부한 바 있다.     


잘못된 결과에 대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먼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동력(動力)이자 완벽한 군자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수련과정에 다름 아님을 지난번 공부를 통해 충분히 곱씹어 이해하였다.      


그 내용에 이어 바로 이어진 이번 장(章)은 그러한 자기 계발(啓發)의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자연스레 이어받아 설명하고 있다. 앞서 공부했던 ‘술이(述而) 편’에서 공자는 ‘不憤(불분)이어든 不啓(불계)하며 不悱(불비)어든 不發(불발)이니라’고 하였다. 즉, ‘배우는 이가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워하지 않으면 펴게 해주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이 장의 가르침에 맞닿아 있다.     

이것은 이 편의 11장에서 공부했던 ‘人無遠慮면 必有近憂니라(먼 생각이 없으면 가까운 근심이 생긴다)’라는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목표, 그것이 완벽주의에 해당하는 군자이고 인간으로서 감히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정점이라고 하여도 배우고 익히며 수행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평생토록 노력하고 또 그것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진력을 쏟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제 ‘위령공(衛靈公) 편’의 기저에 흐르는 공통된 주제와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대략 감이 오는가? 15장까지나 공부하는 동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무릎을 친다면 2년이 다 되어가는 아침 논어 읽고 공부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스스로를 질책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겠다.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리 포기해버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 공부의 서두에서 지적했던 몇몇 현대 해설서의 자칭 전문가(?)라는 이들의 오독도 자연스레(?) 발생했을지도 모르겠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똑같은 형태가 아니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두려워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미리 자신의 한계를 긋는 것과 매사에 이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독려하는 것은 출발점에서부터 마음가짐이 판연하게 다른 것이다.     


운동이든 공부든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의 정점에 다다른 선생님을 찾아가 그것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유형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시범을 보여주는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그저 취미로 흉내만 낼뿐 저 경지에는 도저히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이가 있는 반면, ‘저렇게 대단한 경지에 오를 수 있기 위해 정말 제대로 배워 빠른 시일 내에 스승의 경지까지 올라볼 테다.’라고 마음을 다지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처음 마음가짐만이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미래를 이미 단정 짓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작할 때 자신만만하게 나는 모든 것을 금방 배우고 빨리 느는 편이니 스승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만하는 사람이 반드시 자신감 충만이라는 이유로 결과도 좋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처음부터 나는 어차피 아무런 재능도 없으니 그저 시간 보내기나 소일거리로 하는 것뿐이다라고 여기는 자가 일취월장(日就月將) 발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이 이 장에서 말하는 배우는 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자 배우고 수행하는 자가 갖춰야 할 태도인 것이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가난하고 돈이 없는 찌질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해서 아무나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누구나 전국 1등을 하고 싶어 하지 반에서 꼴찌를 하고 싶어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삼은 목표를 위해 얼마나 자신의 피와 땀을 갈아 넣는 노력을 경주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그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출발점부터 다시금 환기하고 있다. 아예 나의 능력을 전국 1등은 고사하고 반에서 10등조차 할 수 없다고 한계를 긋는 자라면 정말로 반에서 10등은 고사하고 30등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공자는 역설하고 있다.     


‘어떻게 하지?’라며 어떤 일에 임하기 전에 심사숙고하는 마음의 자세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만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전국 1등을 해야 하는데,’ 라며 조바심만 내면서 정작 규칙적인 생활은 고사하고 늦잠이나 자고 게임으로 소일하고 인스타에 빠져 멍 때리는 학생이 조바심만으로 성적을 올라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장에서 말하는 심사숙고하고 늘 고민하는 자세라는 것은 지금 노력을 하면서도 이 노력만으로 부족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까? 하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과 그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궁구하는 구도(求道)의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세월호 사태가 터지고 나서 허울만 갖추고 정작 국정농단으로 썩을 대로 썩어버린 정부이기는 했으나 겉으로는 ‘다시는 이러한 허망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단호한(?) 의지를 외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진심으로 걱정하고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나선 민간 잠수부를 비롯한 애먼 국민들을 고소하고 비난하고 화살을 돌리려 했고 자신들이 잘못한 사실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며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10월 29일 이태원에서 터진 정말로 어이가 없는 참사를 수습하겠다며 특수본을 차린 지금의 정부는 정치 검찰이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악어새와 같은 기레기들을 이용하여 당시 경찰서장, 소방서장, 경찰청의 정보 관련자, 용산구청장까지를 책임져야 할 자들로 전면에 앞세우며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용산서장은 아비규환이 벌어졌다는 무전을 받고서도 정보과장을 포함한 부하직원들과 유유히 식사를 하고 걸어서 몇 분 걸리지도 않는 현장을 굳이 차를 타고 가겠다고 시간을 길에 버리면서도 보고체계에는 그보다 훨씬 앞서 사고가 터진 직후 보호를 받았다는 식의 근거를 남기게 했다.     


용산서와 서울경찰청의 꼴사나운 진실공방은 한술 더 떠, 이전에 지원병력을 요청했다고 항변하는 용산서장과 ‘공식적인’ 지원 요청은 결코 없었다며 자신에게 떨어지는 불똥을 필사적으로 떨구려는 경찰 조직의 이인자, 서울경찰청장의 개싸움이 벌어졌다.     

긴급구조상황을 경찰청 본부에서 지휘해야 할 책임자 여경은 아예 아침부터 자신의 사무실에서 상황실에 나와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후안무치한 줄도 모르고 자신이 개인적인 일탈을 보인 것이 아니라 경찰청의 긴급상황실의 책임자는 ‘관례상’ ‘늘’ 자신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말을 카메라 앞에서 뱉어냈다.     


이미 이태원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게 될 것이니 준비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묵살한 것이 문제가 될 것으로 여긴 용산서의 정보과장과 그것을 조직적으로 삭제하여 은폐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경찰청 본청의 정보부장까지 불똥은 불기둥이 되어 끊임없이 치솟았다.     


빨간당의 용산구청장이라는 여자는, 사고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집에 들어가면서 언뜻 길에서 보였던 상황을 자신이 순시한 것처럼 말했다가 말을 바꾸고, 어떻게든 불기둥이 되어버린 불똥이 자신에게 화(禍)로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초췌해 보이기 위한 코스프레까지 해가며 입만 열면 거짓말을 뱉어댔다.     


심지어 엊그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구청장을 비롯한 그 측근들은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꼬리가 잡힐까 우려한 끝에 단체로 휴대폰을 바꾸는 짓거리까지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평상시 아이폰을 쓰다가 자신의 범법 사실이 모두 담겨 있다는 증거로 제출될 상황이 되자, 몸싸움까지 하며 지켜가며, 절대 풀 수 없다는 비번을 걸어두고 비번을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전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현 법무부 장관의 매뉴얼을 참고한 듯하다.     

https://view.asiae.co.kr/article/2022121609200420076

경찰국을 신설해서 행안부 장관이 경찰 조직을 관리 감독해야 한다며 그렇게 기자회견장에서 떠들던 판사 출신의 대통령 오른팔은 사태가 비화되고 불기둥이 자신의 옷깃을 태우기 시작하자, 카메라에 대고 다른 조직의 살림살이에 대해서 어떻게 전혀 다른 조직의 수장인 행안부 장관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겠느냐며 유체이탈 화법의 정점을 시현해 보였다. 그런 사람이 현직에서 판사를 했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가 현직 판사 당시에는 양심적이고 이성적이었다가 갑자기 장관에 임명되면서 하이드 씨가 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자신이 국제무대에 나갔다가 무대 뒤에서 그것도 외국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한국말로 평상시 했던 쌍스러운 말을 섞어했던 말실수조차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는 대통령과 그것을 바로 옆에서 들었다는 외교부 장관이라는 현직 빨간당 국회의원이 후안무치하게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하며 뭉치는 모습은 자신이 칼질을 하지 않고서 대신 교도소에 들어가겠다는 조폭의 의리보다 훨씬 더 구차하고 가벼워 보일 뿐이라는 비판에 쓴웃음만 나온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잘못을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그것으로 인해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증거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더 높은 책임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꼬리를 자르는 행태가 버젓이 구현되는 나라의 국운(國運)이 다했다는 지적을 누가 감히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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