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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2. 2022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발전은 출발한다.

자신의 부족함은 보지 않고, 무조건 남 탓만 하는 자들에게.

子曰: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자신의 無能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앞의 군자에 대한 설명에 이어, 군자로서 갖춰야 할 마음가짐을 설명한다. 이 장의 가르침은 이미 앞서 공부했던 ‘학이(學而)편’의 16장에서 ‘不患人之不己知요 患不知人也니라’고 한 것과 ‘이인(里仁)편’의 14장과 ‘헌문(憲問)편’의 32장에서는 ‘不患人之不己知요 患己不能也니라’고 하는 등 누차 강조한 동일한 내용이다.     


<논어(論語)>를 처음 여는 첫 장의 문장을 마무리하면서 나오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의 가르침이 바로 <논어(論語)>전체를 가로지르는 공자의 목소리임을 생각해 보면, 이 간단하고 당연한 듯한 가르침이 굳이 잊을만하면 또 등장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지적을 자꾸 하면 반복하게 되면 그저 똑같은 잔소리일 뿐이라며 오히려 더 듣기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똑같은 지적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그 부분의 잘못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인지 똑같은 잘못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이미 의미가 없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씩 그 의미하는 바에서 색깔(?)이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학이(學而) 편’에서는 남의 옳고 그름과 간사하고 정직함을 잘 分辨(분변)하라 강조한 내용에 무게를 두고 있다라면, ‘언문(憲問) 편’에서는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직시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장의 가르침은 둘 중에서도 후자에 해당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령공(衛靈公) 편’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 자신을 완성해야 하는 수신(修身)의 올바른 형태에 대해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설명한 바 있다. 이 장의 가르침처럼 여러 장에 걸쳐 <논어(論語)>에서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혹자는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에 기준잣대가 너무 높이 있어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공자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본성을 배움을 통해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것을 군자로 가는 길이라 본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에 대해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본능에 따라 행동했더니 선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보다는 본래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고, 공부를 통해 그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인지했고 그 마음을 더욱 갈고닦아 실천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공자가 말한 배우는 자가 갖춰야 할 근본인 셈이다.     


반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 또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왜 나쁜 것인지를 배우고 익혀 그것을 통제하고 자제하여 어떻게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궁구하고 실천하는 것 또한 배우는 이유이고 수행하는 이유라 늘 강조한 바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심리가 아주 강한 존재이다. 그러한 본능은 일이 잘못되거나 어그러졌을 때,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거나 판단하는데 아주 인색하기 마련이다. 대개 크게 성공한 이들이 일반인들과 가장 다른 점은 자신의 실패원인을 분석함에 있어 환경 탓을 하거나 동업자의 탓을 하거나 다른 외재적인 것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부족했던 점이나 자신이 간과했던 부분을 인정하고 보완하여 다시 노력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왜 알아주지 않는가?’라는 탄식에는 자신이 이미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의 유능함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냉정한 현실로 보게 되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훌륭하다거나 유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원인도 배재할 수는 없다. 아니 그런 이유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더 채우고 노력해서 완성시키면 된다. 이 장에서 공자가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점의 방점은, 이후에 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의 분석자체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즉,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노력할 수는 없으니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읽어낼 수 있는 냉철함과 자기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엊그제부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와 관련하여 국정조사가 들어가기도 전에 마치 대단한 사건이 터진 것처럼 빨간당 측에서 입에 게거품을 품어가면서 목이 터져라 손가락질을 하는 이슈가 나왔다.     

'가정의학과' 의사출신이라는 파란당의 비례대표 의원이라는 여자가 이태원 참사가 터졌을 당시 자신이 일하던 병원의 이른바 ‘닥터카’라는 차가 현장 구조 요청을 받아 출동하는데 자신의 집에 들러 자신을 태우고 현장에 가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러는 과정이 벌어지면서 일산의 해당 병원에서 25분이면 현장에 도착할 수 있는 닥터카가 30여분이나 늦게 도착했고, 심지어 그녀는 구강외과 전공의 치과의사였던 남편까지 대동하고 닥터카를 탔다는 것이다.     


사안의 심각성은 사실 그녀가 닥터카를 콜택시처럼(빨간당 대변인이라는 자의 표현) 사용한 것에 있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녀가 현장에 그 대단한 치과의사 남편까지 대동하고 도착해서 벌인 이후의 행동이다. 그녀는 현장에 단 15분 체류하였고,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사진으로 전한다면서 SNS에 그녀가 올린 6장의 잡지 표지모델 같은 사진을 치과의사라는 남편이 찍어줬다는 사실이고, 15분 이후에 국회의원 신분으로 재난사고의 브리핑을 받겠다면서 보건복지부 장관의 관용차를 타고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터진 그녀의 해명이라는 것에서 더 지속되었다.     

그녀는 그 문제의 SNS를 통해, “저로 인해 10·29 이태원 국정조사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본질이 흐려지고 정쟁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면서 그녀가 엊그제 겨우 활동을 시작한 국정조사 위원직에 대해 사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저의 합류로 인해 재난대응에 불편함이 있었다면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재난현장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의료진 개인이 아닌 팀별로 들어가야 ‘국회의원’이 아닌 ‘의사’로서 수습에 충분한 역할을 하고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라고 적었다.     

대개 해명은 사태의 수습을 위한 것이거나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어야지 구구절절 너저분한 자기변명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치과의사인 남편까지 대동했느냐는 문제제기에 대해서까지 그녀는 사건 현장에서 치아로 신분을 구분하는데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서였다는, 정말로 하지 않는 것이 천만 배 나았을 궤변까지 자기변명이랍시고 늘어놓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녀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아닌 가정의학과 의사이다. 그녀가 응급의학과에 얼마나 대단한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비난하기도 전에 그녀가 현장에 닥터카까지 대동하고 나타나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심지어 몇 분을 머물러 있었는가를 보면 논란은 종식될 수 있었다. 그녀가 택시를 타고 현장 근처에 도착하여 헐레벌떡 남편과 함께 아비규환의 현장에 뛰어들어 어떻게 해서든 환자를 구하려고 피눈물을 쏟느라 새벽까지 정신없었다면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멋진 포즈를 핸드폰에 담아 SNS에 올릴 엄두는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닥터카를 타고 집 앞에서 현장에 도착한 그녀가 고작 15분 동안 사진 찍고 폼 잡다가  현장을 떠날 때, 복지부 장관의 관용차를 타고 국립중앙의료원까지 갔다는 사실관계 뉴스가 터져 나왔을 때는, 총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입에 백개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석고대죄할 상황이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현장에 달려갔다며 언론에 당당히(?) 인터뷰까지 했다.

그런데 그녀는 입을 닫지도 석고대죄의 코스프레조차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2년 넘게 3년 차의 국회의원으로 그녀가 여의도에서 배운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천성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한 언행은 군자를 언급하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혹은 그저 평범한 국민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뒤였다.     


물론, 그나마 현장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보고만 받았다는 판사출신의 행안부 장관의 정부나 애들 시체 팔아서 장사하냐며 비아냥거리는 글을 버젓이 SNS에 올리고 반성조차 하지 않는 시골 시의원의 징계위 문서에 단 한 명도 동의 사인을 하지 않는 빨간당이 이제 한 건 물었다며 개떼처럼 달려드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의사 출신 파란당 비례대표 여자 의원의 일탈된 비행(?)에 대한 사실을 조사과정에서 알게 되었는지 빨간당에 충성하겠다는 이의 제보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사건이 터진 지 한참이 지나서 국정조사위원으로 발탁된 그녀의 흠집에 얼싸쿠나 하면서 칼춤을 추며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꼴사납기 매한가지이다.     


파란당의 비례대표들은 투표로 선발되고서도 문제를 일으킨 여타의 의원들만큼이나 논란의 핵심에 회자되어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돈을 착복하고, 그 활동을 토대로 쌓은 인지도로 언감생심 꿈에도 노려보지 못할 국회의원직까지 오르는 비행(?)으로 아직까지도 재판이 끝나지 않은 윤미향을 비롯하여, 동생의 명의로 사준 오피스텔이 문제가 되어 부동산 실명법 위반으로 고발되었던, 비례대표 달고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염원(?)을 이루겠다고 경력 한 줄 위해 단 한 달 출근했던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을 던져버리고 기어코 꿈을 이룬 양정숙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민망한 위인들이 수두룩하다.     

양정숙은 표면적으로는 인권문제와 일본군 위반부 이슈 전문 변호사로 경력포인트를 적립해 왔다.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및 일제 피해자 인권특위를 맡아 한일변호사협회 공동선언문을 이끌었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소송을 맡아 일본정부로부터 1인당 1억 원가량의 배상을 받았다. 북한 이탈주민, 난민, 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률 제정운동에 가담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고서 결국 그녀를 제명한 위성정당으로 욕을 먹는 더불어 시민당에서 제명하게 된 사유로 밝힌 내용을 보면 그녀의 이면이 드러난다.     


그녀는 동생과의 지저분한 싸움으로 유명한, 앞서 언급했던 세금탈루용 명의신탁 의혹뿐만 아니라 더불어 시민당 후보 검증 과정에서 당에 거짓 해명을 한 것 밝혀졌다. 진경준 게이트 재판에서 진경준 전 검사장 변론 이유에 대해 ‘지인이어서 공동 변호인단에 이름만 올려주었다’고 해명하였으나, 실제로 그녀가 1차 변론에도 직접 참여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또한 정수장학회 부회장 경력에 대해서는 자신은 몰랐으며 타인이 명의를 대신 올렸다고 해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양정숙은 관련 행사에도 적극 참여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 허위자료 제출 의혹, 검증 기망 등 당무 방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비례대표의 경우, 현행법상 자진 탈당할 경우 의원직을 자동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까지 문제를 일으켜 뉴스 카메라 샤워를 받았던 그 어떤 비례대표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스스로 탈당하여 국회의원직을 고사한 경우는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어떻게 손에 쥔 부와 명예의 도깨비방망이인데 이걸 내 스스로 떨구냐 싶겠지만, 그녀들에게는 이미 국민의 대표로 불릴 자격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사실은 그녀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 진(晉) 나라 때 두예(杜預)는 자기 이름을 후세에 영원히 전할 궁리를 한 끝에 <춘추(春秋)>의 해석서에 해당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주석을 달기로 했다. 그리고, 낙양성 동쪽 수양산에 자기 무덤을 미리 만들고서 묘표(墓表)에 새길 글을 직접 지었다. 그렇게 자기 공적을 기록한 비를 두 개나 만들어, 하나는 현산(峴山)에 세우고 하나는 한수(漢水)에 빠뜨려 두는 것으로 후대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싶어 했다.      

오늘만 산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이들은, 죽은 뒤에 자신의 이름이 잊힐까 따위의 염려를 할 겨를조차도 없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 이름이 드러나지 못할까 봐 염려하는 추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례대표로라도 평생에 한번 국회의원 배지 한번 달겠다는 명예욕에 정치판에 투신하는 부나방들을 보면서, 그들이 투자한(?) 돈과 연줄 로비를 감안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의 무능함은 충분히 알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수행하여 보완하기보다는 외재적인 도움을 사서라도 채우고 싶지 않았나 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당신은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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