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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3. 2022

평생 부조리 하나 바로잡지 못하고, 군자를 언급하는가?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한 노력만으로도 세상은 그를 기억한다.

子曰: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沒世(終身)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걱정한다.”

이 장의 가르침은, 바로 어제 공부했던 이전 장의 내용과 배치된 것이 아니냐는 초심자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의 여지가 다소 큰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 장에서는 분명히,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章에서는 다시 군자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죽어서도 일컬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니 두 명제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지 않느냐고 의심할 수‘도’ 있다.


이런 오해가 생기지 말라고 어제 공부의 말미(末尾)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쓴 두예(杜預)의 사례를 살짝 소개해준 것인데 그 내용을 제대로 공부한 학도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이 장으로 이어지는 논리에 대해서 수용할 수 있는 이해의 폭이 넓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어제 공부하면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공자는 기본적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변을 탓하거나 안 풀리는 원인을 밖에서 찾거나 남 탓으로 돌리지 묵묵히 자신의 내면을 닦아가며 수행에 충실한 ‘專內實己(전내실기)’의 공부에 힘쓰라고 역설한 바 있다.


그런데 그 ‘專內實己’이라는 수행방식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 내 수행이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만족이나 나만을 위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자기만족의 삶일 뿐 군자로서 사회의 부조리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은 달성하지 못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말해, ‘專內實己’이라는 수행방식에 대한 평가는, 결국 나 아닌 다른 이들, 사회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善德과 善行을 남이 인정해 주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따라 나의 ‘專內實己’이 진정한 완성을 이루었는지 아닌지를 평가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장은 바로 그 부분의 결과 평가 방식에 초점을 맞춘 가르침으로 진정한 군자라면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수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의 노력과 수행에 주변을 변화시키고 사회의 부조리를 올바른 것으로 이끌 수 있게 만드는 영향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에, 세상을 마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싫어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행간의 의미를 혹여 배우는 자들이 놓치고 오해할까 싶어 범씨(范祖禹(범조우))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요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군자는 학문을 하여 자신을 위하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신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다면 善(선)을 행한 실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위 주석에서 말하는 ‘선(善)의 실제’. 이것이야말로 앞서 ‘헌문(憲問) 편’에서 그저 도가 통하지 않았던 세상을 등지고 은거했던 은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파고들어 세상을 바꾸고자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공자의 삶이 왜 다른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도구로 사용된다.


자기 수행을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권력이 있는 자에게 빌붙어 비위를 맞추며 더 높은 부와 지위를 얻겠다고 하는 자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던 자신의 부족함이나 무능함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자신의 실패에 대해 환경 탓이나 남의 탓을 하는 이들은 결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자 진리이다.


공자에게 있어 남이 자신을 알아주던지 그렇지 못하든지 하는 것은 엄밀하게 자신이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즉,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서 무언가를 하는 순간, 이미 그 목적은 오염되어버려 온전한 자기 수양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군자행이라고 부를 수 없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수양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라 공자는 폄하한다.

그렇다면 왜 이 장에서는 군자라면서 종신토록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회자되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한 것인가? 이것은 수행에 대한 측면이 아닌 자신이 수양한 결과에 대한 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말한 것이기에 같은 맥락과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남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묵묵히 자신만의 수행을 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분석하고 파악하여 그것을 보완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군자행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설명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진정한 군자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군자가 수행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만을 완성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완성이 목적일 수는 없다. 군자의 존재이유, 그리고 군자가 되어 이루어고자 하는 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그 말은 그가 군자가 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완성여부를 평가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군자가 되기 위한 가장 큰 목적은 사회의 바르지 못한 부분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함이라 이미 누차 설명한 바 있다. 나 혼자 올곧은 군자로 사는 것과 내가 속한 사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난이도 자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물론 자기 자신조차 조율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면서 사회를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여 수행하여 자기 수행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군자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 단계는 사회를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이 삐뚤어져 있지만 나는 배우고 익혀 수양하여 바르게 살았으니 군자라고 혼자서 외치는 것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일 뿐이고,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게 사회를 오염시킨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은자(隱者)들에 대한 공자의 묵직한 일침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아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배운 자들의 사명이라 외쳤던 현실주의자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평생을 통해 직접 증명되었다. ‘상갓집 개’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그는 조국을 떠나 천하를 주유하였고, 발이 닿는 나라마다 그리고 만나는 위정자마다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함께 세상을 바로잡는데 힘을 보태자고 목이 터질 지경까지 외치고 또 외쳤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위해 자신을 밀치고 질시하며 음해하고 공격했던 가식으로 가득 찬 배운 자들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책을 써서 배우는 자들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였고, 자신의 주변 제자들을 비롯하여 더 많은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익혀 그것이 온몸과 정신에 스며들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그런 공자의 평생에 걸쳐 몸소 보여준 가르침에 의하면, 이 장의 군자론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너 혼자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숨어 지내는 것은, 은자(隱者)라는 이름을 달고서 자기 한 몸은 편하고 득의양양할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군자일 수 없는 것이고, 진정한 군자를 목표로 하는 자라면, 자신의 노력과 실천이 사회에 흘러넘쳐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자신의 수양과 실천과정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라 여겨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은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군자의 立志(뜻을 세움; 목표를 설정함)는 개나 말처럼 이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법이니, 만일 몸이 죽음에 따라 이름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어찌 이를 슬퍼하지 않겠는가. 사람으로서 몸이 다하도록 하나의 명성도 이루지 못하게 되면 죽어서도 또한 명성이 있을 수 없기에 군자는 오로지 자신을 슬퍼하는 것이다.”

‘명성’이라 표현했지만, 그것은 그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가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고자 했던 노력과 그의 사상이 세상에 전달되었는지 하는가에 대한 여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1세대 법관이니, 몇 대 국회의원이니, 몇 대 무슨무슨 장관이니 하는 자들은 세월이 흘러 쌓인 만큼 엄청나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참의 권력 정점을 찍었을 때는 당연히 살아있는 권력을 누렸으니 그러했겠지만, 그들이 현직에서 물러나 이름을 들어도 누구인지 모를 지경의 즈음에 그의 부고소식이 행여 뉴스나 신문에 오르게 되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그저 한 세대를 풍미했다는 근사해 보이는 표현을 붙여주는 것으로도 과분한 정도의 그들은, 부고에 나온 것처럼 대를 이어 부와 명예를 계승한 경우, 그 자녀나 사위들이 어떤 직위를 가지고 있는가를 명시하는 것으로 그의 장례에 초청을 대신한다. 즉, 재상집 개가 죽으면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것보다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정작 재상이 죽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들은 지나가버린, 죽은 권력에 꼬이지 않기에, 그나마 실세(實勢)를 누리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고서 그 장례에 오라는 것이다. 그 얼마나 추한 일인가?

공식적으로 대학교수의 정년은 65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일류대 교수로 수십 년을 ‘선생님’ 소리를 들었던 정정하기 그지없이 살아있는 권력(?)을 누리던 이들이 정년을 마친 직후에는, 흡사 무협지에서 진기(眞氣)를 한순간 모두 흡수당해 노쇠해져 버린 듯한 노인네가 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수십 년간을 보아 오면서 참으로 입맛이 쓰다 못해 가슴이 아렸다.


그들이 정말로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입지를 다진 사람이라면, 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분야의 인물들이나 최소한 그들의 입김으로 인해 교수가 된 제자들이라도 그들의 영향력을 우러러 새겼을 것인데, 이미 퇴임한 급격한 노환을 맞이한 동네 노인네에게 하다못해 학회의 초청장을 보내는 이들조차도 없는 현실을 보면, 그들이 과연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에게조차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현직에 있던 65세 마지막 해, 스승의 날까지도 카네이션과 선물이 끊이지 않던 그들에게 정년이 지나고 난 이듬해 스승의 날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 과연 삭막한 세상의 탓만일까? 결국 그들이 누렸던 것이 현직의 기득권 말고는 없었다는 권력의 허망함이 그들을 그렇게 급격하게 구석방 노인네의 모습으로 변화시켜버린 것은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의 녹을 먹던 자들이,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법관이 되고 검사짓을 하고 경찰짓을 자연스럽게 맡게 되는 과정이 대한민국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썩어버리게 하고 말았다. 그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며 그 자식들에게 그것을 대물림하겠다며 시대를 만끽하며 누리는 사이,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며 겨울 혹풍이 몰아치는 북간도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도 괜찮다며 가족의 안위조차 모르며 눈물을 흘리던 독립투사들이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의 독립은 역시 대한민국을 정치학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양놈들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세계 2차 대전 승전에 대한 덤(?)으로 얻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식들의 겨울 솜옷 하나 지어주지 못하고 그 자산을 모두 털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자 헌신했던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공헌이 빛이 바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리사욕을 챙기던 자들은 사는 내내 부와 명예를 누렸을지 모르겠으나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위인이라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혹여 그들이 업적까지도 포장하여 한때 위인전에까지 올라가는 만행을 저질렀어도 결국 그들의 민낯은 드러나고 말았고, 진실은 언제든 밝혀지기 마련이다.

‘도덕책과 현실은 다르다.’며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고지식하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세상사는 법을 모른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로 세상이 가득 차 있다고 하여 그것이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은 심지어 그들조차도 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또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을 동의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곁에 붙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이 만연한다고 하여, 양심에 따라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군자가 절멸(絶滅)된 것은 아니라 믿고 싶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냐며 적당히 그들의 악행에 수긍하고 어쩔 수 없지 않냐며 포기하고 술자리에서나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은 결국 자신이 이 사회를 좀 먹는 존재의 일원임조차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사는 시대를 자신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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