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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6. 2022

지금 너를 고난에서 구원해줄 자는 너밖에 없다.

내가 나를 믿고 의지할 수 없다면 누가 나를 구원해 주랴?

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자신에게서 찾고, 小人은 남에게서 찾는다.”

이 장까지 공부해왔다면 눈치챘겠지만, 이 ‘위령공(衛靈公) 편’은 군자론의 끝판토론에 다름 아니다. 배우는 자들이 목표로 삼는 군자라고 하는 존재가 갖춰야 할 마음자세와 수양방식 그리고 도대체 어떤 존재를 진정한 군자라고 일컫는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장의 문구 역시 <논어(論語)>를 인용하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많아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늘 강조하지만, 이 짧은 열 글자의 문구도 쉽게 해석할만한, 만만한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이 편의 흐름에 맞춰 공부하며 여기까지 왔기에 이 문장에서 생략된 목적어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지, 뜬금없이 이 문장만을 마주하게 된다면 역시 문해력이 떨어지는 초심자들은 주춤할 수 있는 문장이다.


도대체 무엇을 자신에게서 찾고, 무엇을 남에게서 찾는단 말인가? 고문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 목적어를 생략해도 가리키는 바가 명확했으나 고문의 문법이 당연스레 입력되어 있지 않은 현대인들에게는 생략된 목적어가 또렷하게 보일 리 만무하다.


그 근거로 이 장을 해설한 사 씨(謝良佐(사양좌))의 주석에도 그 목적어의 정체는 설명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자는 자기 몸에 돌이켜 찾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와 반대이니, 이는 군자와 소인이 분별되는 이유이다.”

생략된 목적어는 ‘문제의 원인’이고,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원문에는 너무도 당연한(?) 이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고, 위 주석에서조차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기에 구체적인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생략해 버린다.


내가 실패한 이유가, 일이 잘못되어 틀어진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당연히 분석해야 한다. 그 원인은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제대로 분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일 뿐 팩트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맡았던 책임자나 담당자, 혹은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그 잘못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자 할 때 살펴보는 것이 자기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과 환경이나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외재적인 원인으로부터 찾는가는 아주 큰 차이를 갖는다.


설사 외재적인 원인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안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분석한 이에게는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을 때 대비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지겠으나, 어쩔 수 없는 외재적인 요인이라 핑계 대고 변명하는 이에게는 다음에 똑같은 상황에도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외재적인 요인이었으니 또 변명을 대고 핑계를 대는 것으로 똑같은 결과를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을, 독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앞서 살펴보아왔던 두 장들의 총괄적인 내용을 연관 지어 정리하는 형태로 이해하라며, 양씨(楊時(양시))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대의(大意)를 정리한다.


“군자는 비록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으나 또한 종신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싫어하며, 비록 종신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을 싫어하나 찾는 것은 또한 자기 몸에 돌이킬 뿐이다.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그러므로 도를 어기면서 명예를 구하여 이르지 못하는 바가(못하는 짓이)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글이 서로 이어지지는 않으나 뜻이 실로 서로 충족되니, 또한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자의 뜻이다.”

위 주석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언뜻 보기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고 일관된 메시지가 있는가 싶지만,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 <논어(論語)>라는 대저작을 편집했던 후대의 제자들은 결코 기존 자료들을 엮는 수준의 작업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공부하는 자들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다소 뜬금없을 수도 있겠으나 조금 깊이 들어가, 철학적으로 이 장을 설명하게 되면, 단순히 잘못이나 실수를 자신에게 찾는 것이 군자이고 남의 탓만 하는 자가 소인이라는 명제를 넘어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문제로 환치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그 힘겨움을 이겨내기 힘들어 신을 찾고 그러한 이유로 본연적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원리를 궁구하다보면 그것이 가리키는 지점이 공통된 방향을 향해 있음을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그 고난의 깊은 늪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신도 아니고 곁에 있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자들이나 고통에 지쳐 쓰러져 구원을 찾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구원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의지와 마음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이 장은 이른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 인간의 존재방식을 공자식으로 서양철학이 자리를 잡기 훨씬 이전에 간명하게 제시한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신을 믿고 의지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믿지 않은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신만을 찾으며 구원을 찾는다는 것은, 문제가 된 부분에 있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부단히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비해 그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없다.

그 진리를 이미 진작부터 깨닫고 있던 다산(茶山; 정약용)은 ‘求諸己(자신에게서 구한다)’를 ‘仁의 단초를 자기에게서 찾음’이라 해석하여, 이 장(章)을 ‘顔淵(안연)’의 克己復禮章(극기복례장)에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해당 장에서, 공자는 克己復禮를 설명하며 그것이 바로 仁이라 말하면서 ‘爲仁이 由己니 而由人乎哉아!(인을 행함이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겠는가!)’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바로 그 뜻이 求諸己와 같다고 이해한 것이다.


사서(四書)에서도 이 장의 내용이 갖는 메시지를 이해한 것은 다산(茶山)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용(中庸)>에서는, 선비들이 활쏘기에서 正鵠(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일이 군자다운 것이라며, 군자의 求諸己를 활쏘기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맹자(孟子)는, 남을 사랑하는 데도 그가 나와 친해지지 않으면 자신의 仁을 돌이켜 보고, 남을 다스리는 데도 그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신의 智를 돌이켜 보며, 남을 禮로 대하는 데도 그가 예로 답하지 않으면 자신의 敬을 돌이켜 보라고 했다.


앞서 극기복례(克己復禮) 장으로 이해하여 설명한 다산(茶山)의 경우나 맹자(孟子)의 설명에 숨겨진 목적어대신 인(仁)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레(?) 등장한 배경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도 배우는 자들은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몇 주전, <논어(論語) 읽기>의 논평을 하면서 1년 전 채용비리에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부산의 젊은이 사건을 소개한 바 있었다. 고위공직자가 놀고 있던 ‘자칭’ 명문대 출신의 자기 사위를 특성화고 졸업자의 시설관리직 자리에 앉히라고 청탁을 한 사건의 진실이 무려 1년 2개월간의 경찰수사를 통해서 밝혀진 채용비리 사건이었다.

아무리 고졸출신의 하급 시설관리직을 뽑는 채용이라고 했을지라도 특성화고를 졸업할 예정이던 그 젊은이는 자신이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으며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지도 않아 시스템의 착오였다면 그가 탈락했음에도 잘못 알렸다는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지식하게 이 장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기 전에 자신이 부족했고, 대신 합격한 사람이 블라인드 면접이었음에도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까지 다녔다는 사람이 된 것에 승복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이 갖는 부작용(?)에 대해 조선후기 실학자였던 최한기(崔漢綺)는 자신을 돌아보는 ‘反求諸己’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병적인 자책(自責)의 형태로 경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간에 자신이 증험할 수 없는 일에까지 자책하면서 무조건 거기에만 심력을 쏟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객관적인 증험을 하기 위해 블라인드 면접장에서 있었던 대놓고 찍어주기의 의구심과 함께 공정하게 그 채용이 이루어졌는지를 정식으로 문제제기하였다. 하지만 부산교육청은 채용선발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특별히 문제 될만한 사안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감사를 종결한다.’라며 자신들의 조직이 입을 피해와 비난을 부러 만들지 않겠다며 그의 문제제기를 뭉개버렸다.

그 일련의 문제제기와 사실은폐과정에서 젊은이는 좌절했고 끝내 그 억울함과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 꽃다운 젊음이 지고 나서야 부모는 아들의 죽음이 개죽음으로 잊히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해달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그제야 경찰은 수사를 나섰고, 1년 2개월 동안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걸쳐 무려 압수수색을 10여 차례나 하고 나서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냈다.


면접을 담당했던 5급 사무관은 주범이었고, 사위의 채용을 청탁했던 고위 공직자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그릇된 방식이 사람을 죽고 나서도 자신들의 인생을 망치지 않겠다고 입단속을 하고 전전긍긍 진실을 은폐하려고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버티다가 그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반성하고 자수하여 죽은 젊은이의 넋을 위로하고 사죄할 생각을 같지 않았다. 결국 사건과 관련하여 기소되고 재판까지 받게 된 상황에서도 그들은 변호인을 고용하여 자신의 법적인 방어권을 행사할 뿐, 일말의 반성이나 사죄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재판과는 별개로, 정상적인 감사가 이루어졌다며 지금도 사무실 자리에 버젓이 앉아 감사업무를 하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그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지 않다.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젊은이가 억울하고 억울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기 전에 진실을 밝혀주었다면 그 젊은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https://brunch.co.kr/@ahura/1439


몇 주전, 나 역시 같은 국민의 세금을 1년에 2,000억이나 예산이랍시며 펑펑 써대며, 자신들의 상관이던 자가 퇴직하니 그 선물로 준다며 규정에도 없는 100만 원 상품권을 선물하고, 외교관이던 시절 자신과 인연이 있는 외국 대사들이 한국에 있다며 그들에게 보내는 설과 추석 선물을 보내라며 버젓이 리스트를 작성해주는 것이 공인화되던 기관의 채용비리를 고발하였다.


하지만, 해당 기관은 물론이고, 그것을 감시관리해야 할 본부 감사실, 감사원, 국민권익위마저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었다.’라며 사안을 덮는데 급급했다. 그 감사 담당이라는 작자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감사거부 사유는 상상을 초월했다.


“확실하게 누군가 청탁을 했다는 근거가 나오거나 돈을 준 사람이 직접 제보를 하지 않는 이상 저희가 직접적으로 감사를 진행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합니다.”


채용비리란 대개 채용선발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경우에 조사와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수순이다. 부산교육청의 채용비리과정에서 뜬금없이 돈을 받고 면접에서 특정인을 선발하라며 설레발을 쳤던 5급 사무관이 자진해서 자신이 형사처벌을 받겠다고 고위공직자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신고가 없이는 감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뭣 같은 개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제보를 받은 기레기들은 한술 더 떴다. 10여 년간 이루어진 해당 기관의 채용비리에 대해 일일이 전수조사를 해야 하는 이른바 품이 많이 드는 취재이니, 교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실명으로 누가 어떤 비리를 저질렀는지 정리한 표를 보내주시던가 경찰에서 수사를 개시해서 기소하거나 재판에 넘겨지게 되면 연락을 달라는 멍멍 소리를 짖어대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채용비리를 제보하고 진실을 밝히려면 제보자가 탐정이 되어 모든 수사를 마치고 감사기관에 제보하거나 기자에게 정리해서 가져다 바쳐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꼭 온몸에 기름을 들이붓고 라이터를 땡겨 사람이 죽어나가야만 기레기들이 꼬이고, 수사에 나서는 상황이 정상적인 사회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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