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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7. 2022

편당을 짓는 것은 아첨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자존심과 자긍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子曰: “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되 다투지는 않고, 여럿이 어울리기는 하지만, 편당하지는 않는다.”     

이 장 역시, 군자가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고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단 10글자. 짧고 명료한 가르침으로 특히 ‘군자는 편당(偏黨)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담긴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군자는 편당(偏黨)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시원하게 해설할 수 있는 이를 만나본 적도 그 내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해설서도 읽어본 일이 없다. 특히나 무리를 짓되, 편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칫, ‘술을 마시고 운전하기는 했지만 음수운전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해괴한 논리의 궤변을 연상시킬 수도 있는 묘한 의미를 담고 있어, 그저 무리 짓는 것과 편당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군자는 편당(偏黨) 하지 않는다’는 명제만큼은 아니지만, 그 앞 절에 같은 문법구조로 되어 있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되 다투지는 않는다.’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넘길 수 있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의미에 대해서 주자는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먼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씩씩함(장엄함)으로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을 ‘矜(긍)’이라 한다. 그러나 乖戾(괴려)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다투지 않는 것이다. 和(화)함으로 사람들과 처하는 것을 ‘群(군)’이라 한다. 그러나 阿比(아비)하는 뜻이 없으므로 편당 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 주자는 배우는 이들이 어떤 점에서 혼란을 겪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초심자나 중급자들이 넘기가 어려운지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던 천상 ‘선생’이었던 자임에 틀림이 없다. 이 짧은 주석은, ‘자긍심’이라고만 원문에 되어 있는 부분을 통해, 그 뒤에 그림자처럼 감춰져 있던 반대급부의 상황을 ‘괴려하는 마음’이라 명징하게 설명해 준다. 


'편당한다'는 의미 역시, 앞에 먼저 표현된 무리짓다(群)는 의미가 단순히 사람이 모여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고문에서 중요시하는 개념 중 하나인 ‘화(和)’의 개념이 담겨 있는 설명임을 강조하면서 편당이 그것과 구분되는 가장 큰 이유로 아비하는 뜻, 즉, 아첨하는 마음이 전제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 일일이 적어내려간 주자의 의도나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 노력과 작업을 통해 주자가 이루었던 경지가 한층 더 깊어지고 높아졌음을 이런 주석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감탄에 마지않게 된다.       


주자의 위 주석에 따라 다시금 공자의 열 글자짜리 가르침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자긍심을 지녀 謹嚴(근엄)하고 莊重(장중)하되 남과 調和(조화)한다. 자존심을 내세워 남과 싸우지 않으며 남에게 아첨해 偏黨(편당)을 짓지 않는다.      

이른바 군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군자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위령공(衛靈公) 편’의 가르침 중에서도 이 장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 같아 보이고 표면적으로나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것 같아도 그 과정이 다르면 완연히 다른 것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대어에서 자긍심과 자존심을 구분하지 않는데 반해, 위의 내 해설에도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시피, 자존심을 내세워 싸우는 것은 군자가 아니라고 공자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자긍심과 자존심은 무엇이 다르길래, 그 미묘한 차이가 군자이고 아니고를 구분 한단 말인가? 위에 내가 풀이한 것과 같이, 공자가 말하고 주자가 풀이한 자긍심이란, 자신을 먼저 세우고 자신이 우선되는 다소 이기주의적 면모를 가진 자존심과는 달리 분명히 자존심이 강해 보이고 근엄하고 장중한 듯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조화가 자연스러움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제 약간이라도 어렴풋하게 당신의 눈에도 보이기를 바란다. 이제까지 ‘위령공(衛靈公) 편’의 전편을 가로지르는 군자론의 메시지는 단순히 군자라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군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사회 안에서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에 대해 하나씩 열거하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얼마나 대단하게 꾸미든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수양하고 공부한 은자(隱者)는 세상에 도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저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자신의 도리를 하지 않겠다며 은둔한다. 공자는 그것에 전면적인 비판의 메스를 가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것보다 더 신랄하게 자신의 평생 살아온 자취를 통해 진정한 은자(隱者)란 저잣거리에 숨는다는 혹은 조정에 숨는다는 그 논리를 실천으로 보여준다.     

무리를 짓는다는 표현이 단순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앞절의 자긍심이 바탕이 되어 있되 그 목적하는 바가 사람들과 융화롭게 지내는 것에 있음을 의미한다. 앞절과 뒷절이 아무런 유기적인 연관성이 없이 좋은 말을 열거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넘어가는 1차적인 무지한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길 바란다.      


그러한 유관성이 있기에, 그저 자신만을 중시하는 자존심을 세우다가 사람들과 반목하고 싸우면서 그것이 마치 고고한 자신의 자존심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소인들이 군자라고 자처하는 것을 공자는 비웃는다. 문자가 갖는 본래의 의미를 꼼꼼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긴 한데, 자존심 때문에 싸운다에서 ‘싸운다(爭)’는 표현은 ‘자신이 더 우위에 있음을 인정받기 위해 싸운다’는 의미이다.      


군자가 자긍심을 갖되 다투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자로(子路) 편’에서 ‘君子는 泰而不驕하고 小人은 驕而不泰니라’고 말한 것과 뜻이 통한다. 곧, 공자는 ‘군자는 여유 있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되 여유가 없다’고 했다. 앞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결정적으로 뒷절에서 나오는 ‘편당한다’를 규정짓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첨’이라고 설명한 주자의 설명이 왜 적확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답변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아마도 ‘편당한다’는 의미에 대해 그나마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게나마 이해하고 설명한 이들이, 강연이나 자신의 해설서를 통해, ‘사리사욕을 위해 무리 지어 같은 편이랍시고 뭉치는 행위’ 정도로 설명하는데, 주자가 설명한 ‘아첨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만큼 적확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왜 뜬금없이 ‘아첨’이 편당의 전제조건으로 등장하는지 의아한가?


앞절에서 군자가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과의 융화를 전제로 조화로워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명확히 설명하고 그 궁극적인 목표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바로 다음 절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함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공자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갖는 그 완결성에 충분히 탄복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길 것이다.     


사람들과 융화하며 어울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음을 경계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뒷절의 ‘편당 한다’는 내용이다. 즉, 그것만큼은 절대 넘어서는 안될 레드라인이라 규정한 것이다. ‘군자가 편당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앞서 ‘자로(子路) 편’에서 ‘君子는 和而不同하고 小人은 同而不和이니라’라고 말한 것과 뜻이 통한다. 다시 말해, 공자는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않지만 소인은 부화뇌동만 할 뿐 화합하지는 못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앞서 ‘자로(子路) 편’을 공부하면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소인이 남과 어울려 무리를 짓는 목적은 단 한 가지이다. 권력에 빌붙어 자신이 원하는 사리사욕을 이루기 위함이다. 군자가 무리를 지어 어울리기는 하지만 결코 그러한 사사로운 욕구를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같은 무리’라는 의미를 두고, 그들만의 당파(黨派)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장의 열 글자의 어조사를 빼놓은 여덟 자 각각에 담긴, 평범한 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泰와 驕, 和와 同, 矜과 爭, 群과 黨이라는 글자는 하나하나 살아있는 의미를 가지고 군자와 소인을 分立하는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어놓고 있다.      


하지만, 공자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소인과 군자를 구분한다는 그 개념들은 일상의 현실에서는 과연 둘인가 싶을 정도로 혼재되어 늘 인간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그래서 이미 옛사람들은 이미 ‘오곡 싹 사이에 가라지가 섞여 있는 듯하여 둘 사이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금방 알기 어렵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 이 장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당신에게 묻겠다. 정말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애매할까? 흰색과 검은색이 뚜렷하지 않고 회색인 경우가 온 세상 투성이라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배우고 익혀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자신의 경우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이 장에서 폄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표적인 편당(偏黨)은 지금 이른바 정치를 밥벌이로 하고 있는 ‘정당(政黨)’이라고 하는 것이다. 맞다. 당신이 아는 그 빨간당, 파란당, 노란당이 그것에 해당한다. 그들은 대의민주주의라고 하고 정치적인 노선을 함께하며 뜻을 함께 한다며 같은 색깔의 편당으로 뭉친 것이다.      

앞서 누차 강조한 바와 같이, 그들이 권력에 아첨하여 사리사욕이라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편당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당의 이름으로 지역구에 공천되기 위해 경선을 거쳤던 경선 없이 낙하산으로 전략공천이 되었든 그 공천권이라는 것이 편당의 절대권력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그 편당에서 국민들에게 직접 선택을 받지 않고 ‘비례대표’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들은 결국 그 편당의 공천권과 비례대표 선정권이 있는 이들의 담합과 결정을 통해 낙점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자마자 벌인 일탈(?)은 그야말로 그들의 도덕적 하자를 넘어서 그 편당의 안목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군자인가 소인인가를 판단하려고 할 때, 가장 정확한 사실과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나 이상 가는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끝없이 관대한 인간의 사악한 본능 탓에 그들은 결코 자신이 소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참으로 귀신같이(?) 그들은 내로남불이라는 해괴망측한 신조어를 표어 삼아 다른 정치꾼이 소인임을 자로 잰 듯 명확하게 구별해 낸다. 응급의학과 전공도 아닌 가정의학과 전문의출신으로 비례대표를 낙점받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이가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이 설마 적발되어 문제가 되겠는가 싶었는지 후안무치하게 해당 사태의 국정조사 위원으로까지 활동하겠다고 나섰던 것도 어이가 없지만, 15분 머물렀던 장소에서 같이 닥터카를 타고 현장에서 SNS에 올린 사진을 올린 치과의사 남편도 어이가 없다.      

진실이 더 밝혀지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살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하루살이처럼, 사건이 터진 지 3시간이 지나 현장에 가면서 치아로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지 몰라 남편을 대동했다는 말을 하지 않나, 그나마 15분 사진찍고나서 다시 장관의 관용차를 타고 국립의료원에 가서 보고를 받고, 또 거기서 다시 나오면서까지 관용차를 탔다는 점은 그녀의 일관된(?) 도덕적 해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군자는 소인에게 소인이라며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빨간당의 부끄러움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소인배들이 자신의 더 큰 뻔뻔한 잘못을 들여다보지도, 반성하지도 않은 채 신이 나서 개떼처럼 한 건 물었다며 침까지 질질 흐를 정도로 꽉 물고 놓지 않는 꼴이 더욱 추하고 역할뿐이다.     

마지막으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또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자면, 소인들은 귀신같이 다른 소인은 구분하지만, 정작 군자를 알아보는 안목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군자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면, 자신의 소인으로서의 추함에 부끄러워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도 없거니와 자신이 가짜 군자라고 떠들어댔던 거짓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가 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이가 눈에 띄지 않는 현실이 세밑의 추위를 혹한으로 만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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