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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8. 2022

말이 갖는 무게를 안다면 한번 더 자중하라.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연기자들에게.

子曰: “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들어 쓰지 않으며, 사람이 나쁘다 하여 그의 좋은 말을 버리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군자가 어떻게 인재를 구분하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기준과 마음가짐을 일러주고 있다. 공자가 가장(?) 민감해하는 ‘말만 잘하는 이’ 혹은 ‘말만 잘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담겨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세히 보면, 이 장의 가르침은 정확하게 양 극단을 가리키고 있어 정 반대의 사례이자 예외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말에 대한 기준이 말에 있는 것만도 아니고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아주 묘한 두 양면에 대한 평가를 모두 그려내고 있다.     


말을 잘한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니 말로만 떠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한편,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그가 하는 훌륭한 말까지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그 사람이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신분이 고귀하지 않다는 등의 표면적인 이유로 그가 하는 말이 같은 진솔한 가치를 폄하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뒷절의 경우를 앞절의 것과 연관 지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설명하자면, 실천으로 이어지는 덕행이 없는 자의 훌륭한 말이란 아무런 가치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고, 반대로 덕행이 ‘아직’ 드러난 적이 없는 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한 말이 진솔함을 담고 있는 가치 있는 말이라면 그것을 결코 흘려 넘기거나 폄하하지 않는 것이 군자로서의 마음가짐이고 배우는 자세라 강조한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이 장을 해설하길, ‘易言之人을 君子不取하고 狂夫之言을 聖人有擇이니라.(쉽게 말하는 사람을 군자는 취하지 않고, 미치광이의 말이라도 성인은 채택한다.)’라 하여 공자가 일러주고자 하는 행간의 의미를 길어냈다.      

그러면서, ‘易言(이언)’의 사례로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고사성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주인공, ‘마속(馬謖)’을 들었다. 마속이 병법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하자 유비(劉備)는 그의 말에 과장이 많음을 알고 크게 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위(魏) 나라를 정벌하려고 기산(祈山)을 공격할 때 마속은 결국 군사였던 제갈량의 지시를 어겨 크게 패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그 경우가 쉽게 말하는 경우에 해당하고 본 것이다.      


한편, 성인이 狂夫(미치광이)의 말을 들은 사례로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板(판)’에서 ‘옛날의 현자가 한 말이 있으니, 추요(芻蕘)에게도 묻는다 하네.’라는 구절을 들었다. 여기서 추요(芻蕘)란, 꼴 베고 나무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일컫는다.


다산(茶山)이 읽어낸 행간의 의미대로, 이 장(章)에서 공자는 군자가 사회 속에서 다른 이들을 대함에 있어 사람을 분별하되, 어떠한 사적인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지감(知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다.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철없는 여대생이나 아줌마들이 그렇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만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것은 그저 명리학에 중독되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말을 자신들이 생각할 때 객관적인 공신력(?)을 가진 이가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비싼 돈을 사기꾼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본래 자신이 언감생심 얻을 수 없는 지위와 지금의 신분을 얻었다고 우연하게 얻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라고 하면 그들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이들의 영험한 능력이 자신을 위로 더 위로 올려준 것이라 착각하고 그 늪에 빠지게 된다.     


과학이 뭔지 알지도 못하던 공자의 이전 시대부터 권력자들의 주위에 귀신을 말하며 권력자의 뒤에 숨어 사특한 짓을 서슴지 않던 자들은 있어왔다. 재미있는 것은 과학이 첨단을 달리고 달나라에 가서 사는 것이 공상과학 소설이 아닌 현실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제정일치’는 기괴한 형태로 여전히 정치권력과 함께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한정된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제까지 엘리트 코스라는 라인을 밟아오면서도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현명한 말을 하고 담백하게 삶을 영위하는 이를 본 적은 있어도 경성제대에서 박사까지 나와 긴 가방끈을 자랑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을 삶을 살거나 자신의 입으로 줄줄 어디선가 읽거나 본 것을 말하는 이들은 보았어도 그것을 실천하며 보여주는 삶을 사는 이는 본 적이 없다.     


자신이 공정과 상식은 있는 대로 모두 부수고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이가 어퍼컷을 쳐올리며 자신은 여전히 공정과 상식의 화신인 양 사람들이 봐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그간 자신이 놀며 뭉개던 바닥에서 익힌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아이폰에 비번을 걸어 잠그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 동류의 검사가 비번을 걸기 전에 빼앗으려 하자 몸싸움을 하고 자신에게 ‘독직폭행’을 했다며 떠드는 자가, 세상 가장 청렴결백하고 공정한 검사였던 것처럼 장관직을 수행하는 시대를 우리는 결국 맞이하고야 말았다.     

이 자료는 2017년 발표 자료이다. 그 이후 무엇이 변했나?

며칠 전 연말을 앞두고 국민권익을 위해 설립되었고, 공공기관의 채용비리를 근절하겠다며 특수부서까지 설치한 기관에서 담당 국장이 기자회견까지 열며 그들의 공과를 자랑했다. 내용인즉은, 수개월간의 공공기관 채용비리 조사를 통해 다양한 채용비리의 형태가 발견되었고 수사의뢰에서부터 관련자들의 징계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조치가 시행되었다는 보고이고 자랑이었다.     


해당 기관의 장은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알아서 나가지 않는다며 버틴 죄로 감사원의 집중포화를 맞아가며 내년 중순까지의 임기를 채우겠다고 버티는 전직 파란당 출신 국회의원이다. 흰머리 휘날리며 외교업무라고는 통역업무 외에는 한 적이 없는 장관을 여성 장관의 본보기로 세웠던 정부부서는 어차피 국장급의 오래된 고인 물들이 흰머리 여성 장관을 장관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이 알아서 원래 하던 대로 했고, 그저 바지사장처럼 내세울 뿐이었기에 그러한 공공연한 비밀을 부서 모든 사람들이 그려려니 했었다고 한다.      


그 말은 바꿔 말하자면, 어떤 우두머리가 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조직에서 함께 자라왔던 썩은 고인 물이 아닌 이상, 기존의 고인 물들이 알아서 원래 하던 대로 정권이 바뀌든말든 자신들이 해 먹던 방식으로 해나갈 뿐 우두머리의 개혁의지나 의도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흰머리 통역만 하던 여성 우두머리가 있던 부서는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있어왔던 외교공관의 성추행 문제들이 훨씬 더 불거져 뉴스에 연이어 터져 나왔음에도, 흰머리 여성 장관이 부르짖던 원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징계를 받거나 잘린 이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관은 몇 년 스쳐 지나가는 자일뿐, 실무 책임자라고 하는 국장급 실세들은 그들의 말에 고개만 굽신거릴 뿐, 자신들의 페이스를 강조하며 여전히 자신들의 조직은 자신들의 율법이 있다며 더 오래 봐야 할 자가 장관인지 자신인지를 잘 구분하라고 밑의 후배들을 조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꾼들과 다르게 복지부동으로 썩어간 고인물들은 절대 개혁의 기치를 동조하거나 무언가를 바꾸려 들지 않는다. 본래 진정한 부조리에 대한 개혁은 현재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부조리의 주역은 현재 힘을 가지고 등 따시고 배부른 자들이니 그러한 모순적인 안으로부터의 개혁은, 특히나 공직사회의 개혁은 이제까지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이 썩어, 그 썩은 내가 진동한다는 사실에 분개한 외부에 있는 이가 개혁의 기치를 들었을 때, 안에서 그 냄새에 이미 익숙해있는 고인물들은 개혁에 동참은 고사하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목에 감히 칼을 들이대려는 자들에게 강하게 반발하고, 더 후안무치한 자들은 감히 자신들의 권위에 하룻강아지가 덤벼들었다며 칼을 뽑아 본보기로 피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장은 그 썩은 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어떻게 옥석을 가려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정치꾼들은 본래 세치 혀로 백성을 기망하는 것이 직업인 자들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공직자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복지부동의 대명사들은 겉으로는 군자행세를 하며 공식행사의 인사말에서부터 강연과 훈시, 하다못해 회식자리의 건배사에 이르기까지 그 민낯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역겨워 끝까지 봐줄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하고 훌륭한 말들을 ‘인용’해댄다.     

그래서 공수처를 설치하여 누가 처벌을 받았나?

자신이 읽은 책이나 들은 강연에서 마음에 남을 훌륭한 말을 인용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저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공감하고 그렇게 실천하며 반성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 양 연기하고 한술 더 떠 인생의 후배들에게 그것을 조언이랍시고 떠들어대고 버젓이 대필작가를 고용하여 책까지 내는 연기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늘 들어야 하는 측근의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민낯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목도하여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공자는 ‘공야장(公冶長) 편’의 9장에서 재여(宰予)를 꾸짖으며 사람들의 말만 듣고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달았다고 스스로 반성한다.     


앞서 인용했던 며칠 전에 있었던 국민권익위의 공공기관의 채용비리 실태에 대한 보고 기자회견을 들으며, 그리고 그와 연이어 최근 한껏 국민의 지지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며 착각한 대통령실의 다음 행보를 듣고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연일 자살골 세리머니로 바닥을 치던 지지율이, 이른바 ‘귀족노조’라고 하는 이들의 민낯을 감사를 통해 까발려 그들이 마치 정의를 내세우고 을의 위치를 차지한 일반 국민들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국민을 선동하는 자들이라 규정하고 단호하게 칼을 뽑아 분위기가 반전되었다고 여긴 대통령실에서 한 비전 발표였다.     


내용인즉은, 허구한 날 ‘투쟁~!’을 외치며 일반 국민들에게 공감을 사지 못한 노조를 감사로 털어 민낯을 공개하는 것에 이어, 국민들이 가장 분개하고 때리고 싶어 하는 다양한 채용비리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공정과 상식의 어퍼컷을 날리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말만 들으면 훌륭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현재 살아있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명령을 필두로 그것들을 밝혀내겠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손뼉 쳐주고 응원해줘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얼마나 약삭빠른 자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빤히 그 의도가 보여 바보처럼 손뼉 치고 응원해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조위원장출신이던 빨간당의 전직 국회의원은, 색깔에 맞지 않게, 하지만 자신의 본질과는 아주 딱 맞아떨어지게 빨간당의 망토를 휘두르며 자격도 안 되는 자신의 딸을 대기업에 꽂아 넣는 것에 성공했고, 그것이 적발되었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까지 쳐가며 후안무치한 꼴까지 드러내다가 법원의 선고를 받고서도 간간이 패널로 방송에 나오기를 서슴지 않았다.     


잘생긴 외모의 경성제대 법학부 형법 전공 교수는, 파란당의 망토를 펼치며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부장관직까지 도전하며 사법개혁의 기치를 올리려 했으나, 결국 능력이 안 되는 자기 자식에게 특혜를 마련해준 과거가 들통나며 이른바 ‘멸문지화’를 지금까지도 겪고 있다.      


대표적으로 두 사람의 사례를 들었지만, 그들이 노조위원장이고 대학교수였을 때 그들이 뱉어낸 훌륭한 말들은 그들의 옳지 못한 행실로 모두 빛이 바래버렸다. 오히려 제대로 배우지 못해 막노동을 하면서도 자식들에게 떳떳한 일용직의 부모보다도 훨씬 더 못한 존재라는 것을 그들은 몸소 증명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이유는, 그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 국민을 생각하고 ‘6411 버스 연설’로 유명했던 이는, 자신의 마지막 실수가 차마 부끄러워 변명할 여지가 없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카메라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연기하는 자들만이 수두룩한 여의도에서는 그의 처연한 죽음 뒤에도 여전히 사욕을 채우겠다는 발연기가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당신이 어느 쪽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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