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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29. 2022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일꼬?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子貢이 “한 말씀으로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恕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이 장의 내용은 <논어(論語)>의 곳곳에서 이미 언급되어 강조된 바 있는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다. ‘한 마디 말로 가히 평생토록 행할 것’이라는 표현은 앞서 2장에서 증자를 통해 언급되고 있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다. 그리고 그 한 글자로 내세운 ‘서(恕)’에 대해서는 ‘이인(里仁)편’의 15장에서 ‘공자의 도는 충서(忠恕)’라고 설명한 바 있다.      


거기서 이 장에서와는 달리, ‘서(恕)’만 단독개념으로 강조하지 않은 이유를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장을 해설하면서 주자는 ‘忠’이란 ‘자기 마음의 정성을 다하는 일’, ‘恕’란 ‘자기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一貫의 道를 忠과 恕의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 지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장(章)에서는 ‘忠’이 빠지고 ‘恕’, 단독개념만을 내세워 ‘일생토록 행해야 하는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이해하여 一貫의 道란 恕로, 忠은 恕의 바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에, ‘서(恕)’의 개념에 대해 공자가 직접 설명한 내용에 해당하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의 가르침은 앞서 공부한 ‘안연(顏淵) 편’의 2장에서 중궁이 인(仁)의 본질을 묻자 대답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바 있다.     


이 많은 다양한 출처를 통해 부분적으로 설명되었던 내용들이 이 장에서 한데 소롯이 모여 하나로 정리된 것은 그것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자의 가르침 속 정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는 ‘서(恕)’가 왜 종신토록 행할만한 것이라 일컬은 것인지에 집중하여 다음과 같은 해설로 이 장의 주석을 대신하였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면 그 베풂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위 주석에서 주자가 설명한 내용은, ‘서(恕)’에 대한 개념에 대해 설명할 때, 공자의 설명방식과 더해 고문에서 사전적 정의처럼 활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이 ‘서(恕)’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는 설명으로, ‘내가 저 사람의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남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배려의 태도로 설명된다.     


이 장은 공자의 설명이전에 자공(子貢)이라는 질문자가 있다. 그 점을 간과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윤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학문은 요점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자공의 질문은 요점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공자께서 그에게 仁(인)을 구하는 방법으로써 말씀해 주셨으니, 이것을 미루어 지극히 한다면 비록 성인의 無我(무아)의 경지라 하더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종신토록 행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자공(子貢)의 질문 자체가, 이미 학문을 하는 방식에 정통하여 어떤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닦아나가야 하는가를 물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원문에는 등장하지도 않은 ‘인(仁)’이라는 궁극의 개념이 등장한다. ‘안연(顏淵)편’을 통해 이미 언급되고 설명되었던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의 목표지향점을 상기하라고 주석을 통해 환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恕는 仁과 또 어떻게 다른가?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 ‘恕’라면, 자기의 마음 그대로 남에게 미치는 것이 ‘仁’이다. <맹자(孟子)>에서 ‘恕를 힘써 행한다면 仁을 구함이 이보다 가까운 것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근거로 보자면, 恕는 仁보다는 未盡(미진)한 개념으로 이해함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자는 궁극의 한 가지 개념으로 ‘仁’이 아닌 ‘恕’를 말했을까?     


이전에도 누차 설명한 바 있듯이, 공자의 원시유학은 단계별 성장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엽등(躐等)’이라 하여 그 과정을 제대로 하나하나 밟아가지 않는 이의 방식이나 태도를 금기시할 정도로 폄하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장은 그 과정들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연관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우고 수양하는 자가 평생토록 해야만 하는 공부나 수양의 개념들은 결코 ‘서(恕)’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정적인 표현을 쉽사리 꺼내놓지 않는 공자가 이 장에서 자공이 한 질문의 의도를 읽고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면서 끝까지 결코 놓아야 말아야 할 기본개념으로 상기시킨 것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수양이 상대에 대한 유기적 관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일깨움이다.     

앞서 ‘군자론’에 해당하는 이 장의 메시지가 향하는 구체적인 방향이 사회 속에서 대인관계를 어떻게 맺고 행해야 하는가를 가리키고 있다 설명한 바 있다. 이 장의 내용이 그 일관된 메시지와 같은 맥락의 선상에서, 가장 기본인 마음가짐과 태도가 결국 궁극의 목표점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배우는 자들은 결코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현재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도들에게 이 장의 심오한 핵심을 가장 피부에 와닿게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는, 바로 ‘내로남불의 정반대로 하라는 가르침이다’라는 말이 될 듯싶다. 이 장을 관통하는, ‘사회 속에서 내가 어떻게 다른 이들과 융화할 것인가에 대한 최적의 처세를 완성한 자를 군자라 일컫는다’라는 메시지를 고려하면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배움으로 깨치고 수양으로 실천하라는 일관된 공자의 가르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내가 2년에 가깝도록 매일 아침 <논어(論語)>를 한 장씩 강독해주면서 담아내는 대한민국을 향한 일침을 읽으면서도 대부분의 학도들은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곤 하였다.     


“다 옳은 이야기십니다. 성인이셨던 공자님의 말씀이 어느 하나 잘못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다만 그 어렵고 심오한 경지의 성현이나 이룰 수 있는 경지에 어찌 저희 같은 일반인들이 쉽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제법 사회적인 지위에 올라보았고, 나이도 적지 않다고 하며 아침 <논어 읽기>에 호응과 공감의 댓글을 남겨주셨던 분들은 많았다. 이제까지 자신이 인문학 저서를 탐독하며 다양한 <논어> 해설서를 읽어봤지만, 이렇게 상세하고 적확한 해설서는 없었다는 둥, 기존 어렵기만 한 인문학 서적들과는 달리 지금 우리가 사는 이야기에 눈높이를 맞춰 이해하기가 편하다는 둥, 자식들에게도 추천하여 이 글을 읽히게 하겠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구독을 끊고서 도강(盜講)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취를 지웠다. 강독하는 선생의 수준이 알고 보니 너무 낮아 더 이상 공부를 함께 하고 싶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저 보이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서 대단하다고 칭찬해주고 자신도 인문학에 소양깨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정말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며 이벤트를 발생시켜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는데 참여하라는 일침을 던지니,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둔 양심을 기어코 찾아내 후벼 파는 그 불편함을 견디기 어려워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겠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그런 이들은 브런치뿐만 아니라 온 사회에 널려 있다. 정작 공자의 가르침을 읽으며 라이킷 하나 눌러주고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서로 작가라 추켜세워 부르며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의 독후감을 늘어놓으며 ‘사회의 부조리에 행동하지 않는 정의는 죽어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그것에 수많은 댓글로 떠들던 자들은 내가 정작 실천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라고 이벤트를 벌였을 때, 구독을 끊고,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차단까지 하고, 꼬리를 감추고 여전히 댓글작가놀이나 하게 내버려 두라며 그 짓을 계속 이어 나왔다.     


싫을 수 있다. 아무리 옳은 소리고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자신이 그것에 호응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입으로만 맞장구를 치던 자들이 ‘봐라! 네가 정작 그렇게 살고 있지 않구나!’라는 일침을 면전에서 받게 되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당혹스러움과 쪽팔림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대개 배움이 착실히 다져지고 실천으로 수양해보지 못한 일반 인간들은 그 본능에 충실하여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민낯을 까발린 자를 회피하고 도리어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해서든 그를 비난하고 까대서 자신의 형체 없는 자존감을 지켜내려 발버둥을 친다.     

이 장의 핵심내용을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한 마디로 ‘내로남불과 정 반대로 하라는 의미이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한 가지이다. ‘내로남불’은 누가 그러라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인 것에 반해, 이 장의 가르침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제대로 배워 익혀야 하고 그 익힌 것을 평생토록 실천하고 구현하려고 노력하여도 쉽사리 이룰 수 없는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따라 사리사욕을 챙기고 남을 밟고 기만해서라도 자신이 우위에 서려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본능이다. 그렇다고 그 본능에 충실하겠다고 돈도 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음식을 훔치거나 음식이 있는 사람을 죽이고 그의 음식을 빼앗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그것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을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인간들이 모여 이룬 것이 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면서 자신이 얼룩말의 입장이 되면 얼마나 하늘이 무너질까를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사냥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동물이기 때문이고, 굶주림을 해결해야만 하는 생존본능에 의거한 사냥이기 때문이다. 즉, 얼룩말을 잡아먹지 않으면 사자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냥한다는 전제가 있다.     


인간도 그러한가? 누군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총칼을 들이밀고 공격하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은 그러한 동물의 본능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 집이 있는데도 더 큰 집을 위해 침략을 하고, 이미 먹을 것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정복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은 생존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미 생존에 그 어떤 장애가 되지 않을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부족하다며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겠다는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까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군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군자가 아니고 그저 장사꾼이고, 정치꾼이다.’라고 표방하고 그런 만행을 벌여도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대놓고 자신들은 ‘군자(君子)’라 참칭(僭稱)하는 말세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국정농단을 벌인 여자의 딸이 누린 특권이 특권이 아니라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며 SNS를 통해 살벌한 칼질을 뱉어내던 서울대 교수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자식을 위해 한 행동에 대해서는 똑같은 기준으로 해석하고 공격하는 것이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라며 멸문지화(滅門之禍)라는 말까지 그놈의 SNS에 또 뱉어냈다.     


공정과 상식이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라며 어퍼컷을 쳐올리며 전 정권에 대한 비난으로 다져진 반사이익으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검사출신의 대통령은 자신의 처나 자신의 장모에 대해서는 같은 기준과 잣대를 대는 것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인 양 함구하고 있다.      

엊그제 이루어진 특별사면인지 시대회귀현상인지 하는 결과를 보더라도,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이 검사직을 수행하며 범법자라고 감옥에 보냈던 자들을 하나같이 복권해주고 사면해 주면서, 법무부장관이 버젓이 카메라 앞에서 공표한 내용이 ‘국민의 통합’을 위해서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사전을 찾을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대한민국 역사상, 정치적 노선이 달라 정권이 바뀌어 이전정권의 죄인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사면은 들어보았으나, 같은 정치적 노선에 있는 자들의 82억이나 되는 추징금까지 탕감해 주면서 ‘국민적 통합’을 후안무치하게 운운하는 사면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국민이란 개돼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빨간당에 이름을 올린 당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된다. 공산주의가 한창이던 서슬 퍼런 북한과 중공에서는 공산당원이 아닌 자들은 사람이 아닌 개돼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원이 아닌 자들을 ‘개돼지’라 부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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