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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30. 2022

왜 공자는 누군가를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했을까?

성현의 포폄(褒貶)이 당신의 그것과 수준이 다른 이유.

子曰: “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남에 대해서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과찬하겠는가? 만일 칭찬하는 경우가 있다면 시험해 봄이 있어서이다. 지금 이 사람들은 三代時代에 〈聖王들이 이들을 데리고〉 정직한 道로 행하던 바이다”     

이 장에서는, 군자라는 대상을 통한 설명이 아닌, 바로 성현인 공자의 입을 통해, 그가 사람들에 포폄(褒貶)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했었는가를 설명한다. 사람들 속에서 생겨나는 행복과 불행이 결국 상대적인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을 포폄(褒貶)하는 것으로 갈등이 생긴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던 공자의 입장을 아주 잘 보여주는 가르침이라 하겠다.     


주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포폄(褒貶), 즉, 비난과 칭찬에 대한 공자의 사고방식과 가르침이 담긴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毁(훼)’는 남의 惡(악)을 말하면서 그 진실을 덜어내는 것이요, ‘譽(예)’는 남의 善(선)을 찬양하면서 실제보다 지나치게 하는 것이다. 夫子(부자)는 이러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혹 과찬하는 경우가 있다면 반드시 일찍이 그를 시험해 봄이 있어서 장차 그러할 줄을 아신 것이다. 성인은 선을 칭찬하기를 신속히 하면서도 구차히 하는 바가 없음이 이와 같으시고, 악을 미워함으로 말하면 매우 느슨히 한다. 이 때문에 비록 그의 악을 미리 앎이 있더라도 끝내 그를 헐뜯는 바가 없으신 것이다.     


주석의 내용을 통해 본연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원문에서부터 느껴왔던 위화감은 초심자들에게 자꾸만 주석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마법을 구사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공자는 원문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직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어온 <논어(論語)>의 내용만으로도 공자가 얼마나 서슬 시퍼런 호통과 일갈을 제자들과 배우는 자들에게 쏟아냈는지 그리고 아주 드물긴 하지만 칭찬의 말도 있었는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게 뜬금없이 무슨 자연스러운(?) 거짓말인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이 장의 본질을 파악해내기 위해서는 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어떤 의도로 사용된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 힌트는 바로 뒤에 이어진 공자의 설명이다. 칭찬을 하지도 않지만 만약 칭찬을 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의 칭찬이 아니라 그를 시험해보기 위함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원문의 해설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적지 않은 해설서에서 이 부분을 내가 해석한 것과 같이 풀이하지 아니하고, 그저 ‘이미 정확하게 시험해보고 난 결과로써 칭찬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틀리고 나만 옳다는 절대적인 표현은 옳지 않을 수 있으나, 학자로서 내가 공부하고 파악한 내용과 다른 것에 대한 해석을 취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 배우는 이들은 비교하여 참고하기 바란다.     


성현의 칭찬하는 방식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명쾌하기 그지없다. 선에 대한 칭찬은 신속히 하되 구차히 하는 바가 없다는 점에서, 주자의 시대에도 그 사회에 통용되고 있던 칭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칭찬하는 의도나 목적자체가 오염된 것이라면 그것이 곧 악일 수 있음을 경계한다.      

반대로 악이 밉다고 바로 격렬하게 비난하고 헐뜯지 않고 오히려 더욱 느슨하고 느리게 하여 그 악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끝내 그를 헐뜯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작정한 사악함을 굳이 비난하거나 헐뜯는 것으로 바꿀 수 없다면 갈등을 조장하거나 그의 반발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다소 냉정한 판단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도 해설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근거를 제공한 것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에 대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밝히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도대체 이 문장이 어떻게 앞의 내용과 연관을 갖는지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斯民(사민)’이란 지금 이 사람이다. ‘三代(삼대)’는 夏(하) · 商(상) · 周(주)이다. ‘直道(직도)’는 私曲(사곡)함이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 내가 남을 헐뜯거나 과찬하는 바가 없는 까닭은 지금 이 사람들이 바로 三代時代(삼대시대)에 善(선)을 선하게(좋게) 여기고 惡(악)을 미워해서 사곡한 바가 없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또한 그 是非(시비)의 실제를 굽힐 수가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공자가 지칭한 ‘지금 이 사람’들은 결국 공자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즉, 하은주(夏殷周) 시대의 백성과 공자 시대의 백성들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설명이되, 다만 그것을 주관하는 도(道)가 하은주(夏殷周) 때의 그대로 이어져왔다는 말이다. 주자의 해설에 의하면, 공자는 이미 하은주(夏殷周) 시대의 백성들, 즉,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믿는 공자의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이 안에는 담겨 있다.     

성현이 되었든 군자가 되었든 누군가가 나서서 선악(善惡)이나 시비(是非)를 굳이 구분하고 포폄하지 않아도 어떤 것이 옳은지 그리고 옳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예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공자는 이 문장을 통해, 올바른 도가 행해졌다고 믿고 그가 따르고 계승하고자 하는 하은주(夏殷周) 시대의 백성들의 심성부터 자신의 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 백성들의 심성이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호오(好惡)에 따라 서로를 헐뜯거나 과찬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깊은 행간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단순히 싸우지 말고 서로 평가하고 비난하며 살지 말라는 평화의 메시지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자신이 그렇게 함부로 포폄하지 않았으니 배우는 자들도 따르라고 할 만큼 공자는 독선적인 가르침을 내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게다가 본래 인간의 본성이 그저 착하고 선하다고만 여겼다면 공자의 현실주의는 그저 형이상학적인 애매모호한 가르침으로 경도되었을 가능성도 컸다. 그렇지 않고 배우는 이들의 폐부를 후벼 파는 현실주의가 장착된 가르침이기에 공자의 소리 없는 죽비의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공자가 집필한 <춘추(春秋)>를 보게 되면 앞서 언급했던 공자가 포폄을 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초심자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논어(論語)>를 공부하고 <춘추(春秋)>까지 공부하며 포폄의 최정점에 있는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이해할만한 수준이 되면, 이 장의 가르침에서 말한 공자의 가르침이 결코 거짓말이 아님을 확인하고 그 높은 경지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공자는 스스로 설명하기를 그의 포폄방식에 대해 ‘시비(是非)의 공심(公心)’을 드러낸 것이라 하였다. 기존 봉건 군주제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상벌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공자는 그 사회적 시스템보다는 직도(直道;올바른 도)를 기준 삼아 포폄을 가했다고 스스로를 늘 경계했다.     


굳이 이 어려운 ‘시비(是非)의 공심(公心)’이라는 용어까지 설명하면서 이 장을 해설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앞서 주자의 주석에서 언급한 사사로움으로 인한 칭찬이나 개인적인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삼는 포폄과 연결고리가 이어진 ‘공심(公心)’이라는 표현을 통해 배우는 자들이 깨닫는 바가 있기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앞서 몇 장을 통해 공부한 바와 같이, 공자는 모든 사회적 문제의 기본 원인이 되는 사욕(私慾)이 결국 인간의 본성을 오염시키게 되면, 포폄을 사회적 갈등과 개인적 불행으로까지 몰고 가게 만든다는 악순환을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이 장에서 포폄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굳이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백성들이 이미 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 알고 있는데 함부로 포폄을 통해 사특한 사욕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그러한 의도를 파악한 尹氏(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공자께서 사람에 대해 어찌 헐뜯거나 과찬함에 뜻을 두셨겠는가. 과찬하신 것은 시험해 보아서 그의 아름다움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三代時代(삼대시대)에 정직한 도로 행하던 사람들이니, 어찌 그 사이에 私(사)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 주석에서 원문의 공자가 일깨워주려는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핵심근거는 바로 마지막 문장에서 방점을 찍은 ‘사(私)’라는 용어에 있다. 위에서 공자가 스스로 설명했던 ‘공심(公心)’과 대척점에 있는, 이 장을 통해 공자가 배우는 자들에게 그토록 경계하라고 강조하고자 했던 그 개념을 콕 찝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의 기로에 선 파란당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인정해줄 것인가에 대한 국회의 표결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이례적으로 표결직전 법무부장관이라는 자가 직접 등장하여, 부정한 돈을 받는 결정적인 현장 녹취까지 발견되어 자신이 검사짓을 해오는 동안 처음 보는 증거라는 깜짝 연기까지 해 보이는 것을 보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국회는 재판정이 아니다. 또한 법무부장관은 검사가 아니다. 그런데 직업병이기에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이제 반 정치꾼이 되어버린 탓인지 법무부장관은 스스로 아직 공표되지 않은 피의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의 범죄사실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버젓이 국회의 단상 앞에서 카메라를 보며, 범죄사실이 명백한 기가 막힌 녹취까지 있으니 국회를 방탄국회로 만들지 말라며 으름장을 높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 아무도 모른다. 좀 더 사실관계를 다퉈봐야 하겠으나 재판은 고사하고 구속적부심도 아니고 그를 구속해야 한다면서 법무부장관이 검찰을 대표해서 국회에 나와 결정적인 증거가 어쩌고를 실시간 중계로 떠들어대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하는 어이없음에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방점은 여전히 카메라샤워를 좋아하는 법무부장관의 그날 국회를 떠나는 길에 가진 인터뷰내용이었다. 그는 버젓이 ‘이 방탄 국회의 행태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잘못된 일인가에 대해서는 국민 여러분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어쩌고 하는데 TV리모컨을 화면에 던져 애꿎은 TV를 부술 뻔했다.     


이 장에서 공자가 언급한 내용을 그가 공부하지 못했거나 법전만 보느라 자기 수양에 부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장의 가르침에 명확하게 드러나있듯이 백성은 개돼지가 아니며 바보도 아니다. 멋대로 자기식으로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에 공감한다는 식의 망발은 정치꾼이 해도 욕을 먹는다. 물론 이제까지 그들이 가짜뉴스나 유튜브를 통해 선동하고 뒤흔들어 원하는 것을 얻고 포장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우리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더 사악하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자들을 위해 표를 먹이로 정치꾼들과 야합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더 사회의 이슈를 만들고자 하며, 국민들이 눈살을 찌푸려도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해, 파업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정권을 가진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검찰에서는 검사라는 자들이 기소를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일차적인 판결이 내려졌다고 본다. 하지만, 법원에 판사라는 이들은 그럴 것이라면 뭐 하러 형사재판을 판사가 하냐고 코웃음을 치면서 재판에서 다투라고 하고, 자신들이 현명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것이라고 한다. 변호사들은, 특히 검사나 판사출신의 전관 변호사들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들이 변호를 맡으면 재판의 향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며 자신들의 몸값을 더 올려 부르곤 한다.     


같은 분야에 있으면서 서로 시장을 개척(?)하고 만들고 키우는 이들은 이 독특한 법비들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입바른 칭찬을 던지고 선동하는 대로 비난을 뿜어댄 결과, 결국 누가 배가 불려졌는지를 보라. 그것이 비난받아도 바뀌지 않을 악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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