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21. 2022

도대체 어떻게 행해야 군자라 할 수 있는가?

군자는 세 치 혀로만 지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義로써 바탕을 삼고, 禮로써 이것(義)을 행하며 겸손함으로써 이것을 표출하고 信으로써 이것을 이루나니, 이것이 君子이다.”     

이 장에서는 다시 공자가 묘사하는 군자의 풍모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는 의(義), 예(禮), 손(孫), 신(信)이라는 네 가지 개념을 구체적인 실천에 어떤 과정과 순서를 거쳐 표출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주자는 이 의(義)를 바탕으로 출발하는 군자의 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義(의)란 일을 제재하는 근본이므로 質幹(질간, 근간)으로 삼고, 행할 때에는 반드시 節文(절문)이 있고, 낼 때에는 반드시 겸손함으로써 하고 이룸은 반드시 성실함에 있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군자의 도이다.     


본래 고문에서 의미하는 義란, 聲訓(성훈)의 풀이에 따르면 마땅할 宜(의)로 풀이된다. 일찍이 주자는 마음을 제어하여 일의 마땅함에 부합시키는 것이 義라고 설명한 바 있다. 공자는 군자의 출발점이자 근간을 그 의(義)라고 보았다. 뒤이어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되 실천하는 것에도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禮以行之를 ‘행동을 준엄하게 하는 것(危行)’으로 풀이하였고, 孫以出之는 말을 겸손하게 하는 것(言孫)을 뜻한다고 보았으며, 信을 풀이하면서는 ‘言과 行을 총괄하는 개념이라 설명하였다. 그래서 그 순환은 결국에 義와 信이 首尾(수미)를 이루고 言과 行은 信義의 두 날개라고 분석했다. 다산(茶山)이 이 장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危行과 言孫이라는 용어는 앞서 공부했던 ‘헌문(憲問) 편’의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준엄하게 하고 행동도 준엄하게 하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동은 준엄하게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해야 한다”라고 한 말에서 원용된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오의해(五儀解)’에 보면, 도대체 어떤 사람을 군자라고 일컫느냐는 애공(哀公)의 질문에 공자가 상세히 대답해주는 장면이 등장하여 이 장과 함께 비교해볼 만하여 간략하게 그 대답을 소개한다.     


“군자는 말을 반드시 충성과 믿음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남을 원망하지 않으며, 어짐과 의리가 몸에 있기 때문에 남에게 자랑하는 빛이 없으며,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 이치에 통달하고 밝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행동하는 것을 독실히 하고 도를 믿어 스스로 강하게 하기를 쉴 새 없이 하기 때문에 남이 볼 때에는 아무라도 그런 경지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행해보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군자라고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고 막연하게 떠올리면 군자란 형체도 없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주의자이자 실천을 가르침의 최우선으로 삼는 공자에게 있어 군자는 올바른 마음가짐(義)을 가지고 내가 행동하는 것을 예로서 규정하고, 그것을 말로 표출함에 있어 늘 겸손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삼가는 마음을 가지고서 누적된 노력과 신실한 경험으로(信) 그것을 입증하고 결과로 완성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과정을 이해한 정자(明道(명도))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이 갖는 순서를 정리한다.     


“‘義(의)로써 바탕을 삼는다.’는 것은 質幹(질간)과 같이 하는 것이다. 禮(예)는 이것을 행하고 겸손함은 이것을 내고 信(신)은 이것을 이룬다. 이 네 句(구)는 다만 한 가지 일이니, 義(의)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리고 공자의 이 네 가지만 설명만으로도 군자를 이루기에는 충분하지만, 행간의 연쇄 고리에 감춰진 실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까 우려하여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敬(경)하여 마음을 곧게 하면 의로워서 밖을 방정하게 할 것이요, 義(의)로써 바탕을 삼으면 禮(예)로써 이것을 행하고 겸손함으로써 이것을 내고 信(신)으로써 이루게 된다.”     


마지막 이 주석에서 경(敬)이 등장한 것은 새로운 개념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의로움(義)이 어떻게 발현될 것인가에 대한 순환고리를 설명한 것이다.     


사실 이 장을 가르치면서 문자학이자 지식적인 부분을 넘어 철학적으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것을 행하라고 설명함에 이어 ‘의로움(義)’에 대한 명시적인 설명은 쉬운 것이 아님을 늘 깨닫게 된다. 그때 내가 가장 먼저 설명하는 ‘의로움(義)’의 특질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고 현대 용어를 빌자면 지극히 사회적 용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의(義)는 정의(正義)라는 좀 더 명확한 협소의 개념으로 집중된다. 정의(正義)는 주관적일 수 없으며 한 개인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는 사회성을 갖는 공통의 타당하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것이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군자가 모든 것을 행함에 앞서, ‘의(義)가 바탕(質)이 되어야 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명제에 그 어느 누구도 토를 달거나 반대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것이 사회에 횡행하고 팽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가 감히 잘못된 주장이라 할 것이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반대할 것인가?     


그런데 현실을 보자.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고 처음 맞는 이태원의 핼러윈이니 사람들이 어마어마 몰릴 것이라는 예견은 누구라도 가능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면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점쟁이만 예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문제점에 대해서 대비하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새삼 정의를 지키겠다는 정의의 투사만이 말할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제기한 보고서가 그리고 그 문제를 제기하고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낸 자의 생각이 참사가 터지고 나서 묵살되고 은폐되고 조작되었다. 이미 사고는 터졌고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산 사람은 살아야겠다며 정보를 다루는 요직에 있던 자들이 그 보고서를 없애버리라고 지시했고 그것을 없애는 것에 동의한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없애려 들었다.      

마침 검찰을 필두로 대검에 설치된 특수본이라는 조직은 희생양이 필요했고, 검찰이 기레기들과 공존하는 방식으로 희생양의 가이드라인을 잡고 후안무치한 모습들을 하나둘 언론을 통해 흘리며 해당 서장이 차에서 내려 달려가도 시원찮을 판에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느기작거렸고, 정보과장을 비롯한 부하들과 저녁에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cctv까지 공개했다.      

그 희생양의 레드라인은 경찰청의 정보 관련 책임자까지 올라갔지만, 결코 경찰청장이나 서울경찰청장의 목에까지 칼을 들이밀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반발해서 그 칼과 불길이 행안부 장관에게까지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념 없는 발언과 후안무치한 언행을 보인 여자 구청장은 지자체장의 마지노선 희생양으로 꼽혔다. 그녀와 그 임원진이 사건 발생 이후 증거를 인멸하겠다고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꾼 피의사실까지 기레기들의 스피커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그녀를 희생양으로 딱 거기까지만 칼춤을 추는 것으로 화려한 불을 질러야, 그 불길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에 등장조차 하지 않으려는 서울시장에게 불똥이 옮겨 붙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인이가 죽었을 때, 그 말도 못 하는 어린 핏덩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며 신고했던 수차례의 수사과정과 검찰에 판단 과정에서 경찰은 대강 넘기며 당장 아이가 죽은 것도 아니라면서 양모의 말을 믿고 무혐의 혹은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고, 그것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있는 수사지휘권과 사건 종결권을 당시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던 검찰은 아무렇지도 않게 경찰이 보내온 대로 도장을 찍어 보냈다.      


그 결과 아이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고 나서야 흥분한 개돼지들 중에서 행동하겠다고 하는 몇몇이 피켓을 들고 양천경찰서에 몰려들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쩌고 떠들어댔다. 그 뉴스를 보면서 개돼지들이 경찰서의 수사만을 탓하는 모습에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 도장을 찍어줬던 수사관과 검사들은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듯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경찰서 앞에서 난리를 부리는 개돼지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재빨리 희생양을, 수사를 뭉갠 그 현장의 수사관들이 아닌 해당 경찰서의 서장으로 삼았고, 과장 계장은 3개월 정직을 당했을 뿐이다. 서장은 출세길의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조직의 관례(?)를 따라야만 했다.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11시가 다 된 시간에, 딸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멀쩡하게 초록 불인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미친 듯이 달겨들 듯 한 차량이 횡단보도를 질주하는 사건이 터졌다. 딸아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끔찍한 사고를 면할 수 있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며 십 년을 감수했다고 했다. 너무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느라 차량 번호나 차량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차량 색깔만 확인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112에 신고를 했다. 그 차가 괘씸해서만이 아니었다. 술에 취했는지 아니면 마약에 쩔었는지 이 아슬아슬한 사고를 이번에는 운 좋게(?) 피했지만, 다음 횡단보도나 다음 골목에서 저 차량이 지금과 같은 운행을 계속하다가 누군가 죽거나 하게 된다면 문제가 될 일이었다. 빨리 신고를 해서 차량을 특정하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만 했다.     


112의 신고센터 접수 경찰은, 자신은 현장 출동만 도와줄 수 있는데, 지금 차량은 이미 현장을 떠났으니 수서경찰서의 교통 수사계로 연계해 줄 테니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교통 수사계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목소리의 경위는 대강 이야기를 듣더니 물었다.


“그러니까 해당 차량이 괘씸해서 과태료라도 물게 하고 싶으신 거죠?”


어이가 없어서 언성이 높아질뻔한 것을 꾹 누르며 다시 말했다.


“지금 그 차량이 그런 행태로 운전을 한다면 바로 다음 횡단보도나 다음 골목에서 사고가 나서 정말로 인명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추적해서 운행을 제지해달라고 신고하는 겁니다.”


“하아! 그러면 일단 교통관제센터로 돌려드릴게요.”

그렇게 교통관제센터의 담당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사정을 말하고 해당 사거리에 통과 시간을 특정할 수 있으니 빨리 해당 차량을 추적하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곤란한 듯 말했다.


“저는 경찰이 아니라 관제센터 직원인데요. 당장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강력사건이 아닌 다음에는 저희도 공문을 통해 요청을 해야지만 cctv를 열람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아무도 다치거나 죽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도와드립니까?”


그래서 당장 관제센터 책임자를 바꿔달라고 하니 자리를 비웠다는 책임자 경위에게서 한참이 있다가 전화가 다시 왔다. 그는 모든 상황과 심정은 이해하지만 도움을 드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는, 당장 누군가 죽은 강력 사건도 아니니 정 괘씸하면 나중에 교통 수사계에 비접촉사고로 접수하라는 친절한(?) 조언까지 덧붙이며 이죽거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며 그에게 일갈했다.


“사람이 죽어야 cctv를 열람할 수 있고 경찰이 출동한다고 이죽거리는 당신 같은 경찰의 태도가 수차례 신고하며 깔려서 사람이 죽어간다고 전화 걸었던 어린아이들이 이태원의 길바닥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는 걸 지켜만 본 것 아닌가! 사고가 터지기 전에 너무 위험하니 와서 통제해달라고 신고했을 때도 지금과 같이 원칙상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니 출동할 수 없다며 이죽거려 나라가 이 꼬락서니가 된 것을 모르겠는가!”


그랬더니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라며 정 그러면 자신을 감사실에 지르라며 당당히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그날 그 문제의 차량이 어디서 인명사고를 기어코 냈는지, 그리고 누군가 황당한 사고를 당해 불귀의 객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연일 뉴스에서 나오는 음주운전이나 심지어 마약에 취해 운전하던 자들에 의해 선량한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비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게 된다. 만약 그들이 그런 황당한 사고를 당하기 전에 그런 차량에 대해 신고하고 통제를 해달라는 신고에 대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당장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사고로 접수할 수 없다며 출동하지 않는 그 안일한 짭새들이 당신의 형제이고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들이고 딸이며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텐가? 


군면제 혜택에 학비까지 국비로 지원받아가며 경찰대에 들어가 살아남겠다고 보고서 삭제 지시하고, 근무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로스쿨 준비하고 진급시험공부하는 것이 관례라고 대꾸하는 자들은 자기 가족이 희생자가 되어도 그렇게 이죽거리고만 있을 텐가?     

매거진의 이전글 정치꾼들의 잘못으로 인한 환난은 늘 개돼지가 맞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