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군자는 상황과 사람을 봐가면서 조언한다.
子曰: “道不同, 不相爲謀.”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道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
이 장은 본래 공자의 취지와는 별개로 근대 이전의 유학자들이 유학이 이외의 것을 모두 이단(異端)이라 배척(排斥)한다는 이유로 불교를 비판하고 같은 유학의 범주임에도 양명학(陽明學)을 공격할 때 자주 언급되는 문구이다. 특히, 주자의 성리학을 신봉(?)하는 수준으로 경도하게 되면서 주자의 경전 해석과 다른 입장의 설을 주장하기로도 하면 바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멀쩡한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인 매카시보다 더 단순무식하게 비난하면서 그 권위적인 근거로 삼은 문장이기도 하다.
원문에서 말하는, ‘道不同(道가 같지 않다)’는 의미는. 말 그대로 지향하는 이념이 같지 않거나 말미암아 나아가는 길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 이 가르침의 방점은 뒤의 네 글자에 있다. 말이다. ‘不相爲謀’ 즉, ‘서로 상의하여 일을 이루려 해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앞의 세 글자가 왜 단서로 붙었는지에 대한 향방을 결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장의 내용에 대해 주자는 아주 간략하게 ‘道不同(道가 같지 않다)’는 의미를 아래와 같이 부연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不同(부동)’은 선과 악, 사와 정과 같은 종류이다.
선과 악이 그 색과 지향점이 다른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명백하다. 정과 사 역시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이것은 현재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앞에 사용된 주어, ‘도(道)’가 길을 가리키는 의미가 있는 중의적 개념임을 고려할 때, 당연히 그 지향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배우고 익힌 것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겠다고 눈이 시뻘건 사람과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겠다고 당장 오늘 저녁을 굶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의 가는 길은 결코 같지 않다. 이 장에서 말하는 ‘不同(같지 않음)’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사가 그렇게 명쾌하게 쾌도난마(快刀亂麻)하듯 선과 악, 정과 사를 구분할 수 있다면 사연 있는 나쁜 놈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고,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고 변절하는 자에 대한 애매한 판단 역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옳고 그름은 명백하지만 사람의 행실과 그의 속내와 그가 걸어온 자취가 어느 시점에서인가부터 검은색과 흰색으로 구분되지 않고 묘하게 물에 퍼진 먹처럼 점차 흐려져 물과 경계가 희석되어 버리는 부분이 있기에 늘 우리는 고민하고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은 ‘不同’을 설명하면서, 선왕의 도로 말미암아 나아간다고 해도 王道를 추구하지 않고 覇道(패도)를 섞는 것이나 궁벽한 이치를 찾아내어 괴이한 행동을 하는 색은행괴(索隱行怪)로 빠진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했다. 주자가 보여준 이론적으로만 완벽해 보이는 간단명료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지는 이분법을 다소 보완한 현실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앞에서 조건으로 제시한 극단적인 이분법이든 현실적인 타협안이든 ‘道不同(道가 같지 않다)’이란 의미가 일단 서로 지향하는 바가 현격하게 다른 것임을 의미한 것이 맞다면, 도대체 내가 전술했던, 뒤의 네 글자에 주요한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성향을 규정한다는 설명이란 또 무엇인가? 혼란스럽게 여길 수도 있겠다.
사실, 이 장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을 우리는 앞서 ‘자한(子罕) 편’의 29장에서 공부한 바 있다. 이른바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바로 설 수는 없으며, 함께 바로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낸 주석과도 같은 상보적인 관계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도에 나아가도 함께 바로 설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지향하는 바가 같지 않은 이들이 함께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는 현실적인 결과를 강조한 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그런데, 기존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아주 명쾌한 듯 그것을 정치적인 부분으로 설명하곤 한다. 이른바 당파(黨派)가 달라 당색이 다르다기에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관계의 사람들이 대립하는 것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아주 틀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과연 공자가 사리사욕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채우겠다고 하는 자들끼리 뭉치고 다른 이들과 뭉치지 않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너무도 당연한 것을 설명한 것이기에 고리타분해질 수 있겠다. 빨간당과 파란당이 서로 돕고 융화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며 본래 정치적인 의미의 정당(政黨)이란 같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빨간당의 목적과 파란당의 목적은 자세히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단 하나라고 한다. 대한민국을 더 강하게 만들고 누구나가 행복하게 여기게 살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대의민주주의에 입각하여 모든 국민들이 잘살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는 당연한(?) 귀결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처절하게 물고 뜯고 싸우나?
앞서 주자의 주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느 한쪽이 제거되고 순화되어야만 할 사회악이 아니라면 그리고 어느 한쪽이 절대 선이어서 그것을 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의문에 대해 어느 누구도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당쟁(黨爭)과 사화(士禍)로 정치적인 싸움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가문을 멸문시켜 버리고 삼대를 멸해버리는 보복과 린치가 무성했던 것은 그들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가를 되묻게 만든다.
그들은 결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행한 자들이 아니었다. 당신이 당신의 훌륭한 선조라고 혹은 위인전에서 보았다며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한 자리씩 했다는 그 모든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색을 가지고 그 영향력을 음으로 양으로 발휘(?) 해왔다. 그 정치적인 문화는 지금의 빨간당과 파란당에까지 자연스럽게 계승되어 고 모양 그 꼴로 정치판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현대 해설서들의 말대로라면 어차피 서로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은 결코 융화하지 않고 서로 반목한다. 실제로 그렇게 정쟁을 반복하며 그들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며 상대의 정치적 생명을 끊기 위해 온갖 공격과 공작과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 중에 어느 한쪽이 온전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어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는 행보를 보였는가를 살펴보면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하늘을 보며 눈만 껌뻑일 것이 뻔한 인물들뿐이다.
그렇다고 같은 색을 가진 당에 모여있는 인물들을, 이 장에서 말하는 도가 같은 입장의 동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이미 수년간의 사례에서 보아왔고 최근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그 또한 그렇지가 않다. 곧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를 뽑아 내년의 총선을 준비하겠다고 하는 빨간당에서 대통령이 직접 장관직에 해당하는 감투를 두 개씩으로 얹어주었던 전직 여자 국회의원에게 그가 준 지위를 이용해서 함부로 정치 코멘트를 하지 말라며 결국 그 자리의 사임을 받아냈다.
누가 봐도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서 이전에 떨어졌던 서울시장 경선에서 보였던 황당한 포퓰리즘 공략을 내던져 대통령의 눈밖에 났던 전직 여자 국회의원은 어차피 누가 봐도 당대표 직을 노리며 그 권력의 언저리를 배회하면서, 정작 그녀의 거취엔 같은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데 ‘출마 고민 중’이라며 군불을 끊임없이 때면서 주목을 받기 위한 갖가지 포석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같은 곳을 지향한다며, 동지라며, 정치계에 신인으로 데뷔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달라고 굽신거리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은 저마다 자신의 공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공을 나눠갖고 빨간당 울타리 안에서 떠들던 것이 얼마나 지났다고 지금 와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하고 있는지 한심스럽지 않은가? 그들이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들의 목표 지향점이 같은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본래 이 장에서 말하는 서로 다르지 않은 길(道)이란 공유할 수 있는 목표의식이자 지향점이다. 그것이 독점해야만 하는 성향을 갖는 것으로 변질되는 순간 어제의 동지도 언제든 오늘의 적으로 제거해야 할 경쟁자일 뿐인 것이다.
한반도가 생겨난 이래로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이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함에 있어 그 목적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이었지 대의(大義)였던 적이 없었다. 자신만이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자일뿐 자신 외에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협치(協治)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을 물리칠 때 말고는 없었다.
그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공수표인 ‘국민을 위한 정치’가 진정한 그들의 공통 목표 지향점이었다면 굳이 빨간당, 파란당, 노란당 등등 당색이 갈려 서로 뜻을 달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정치꾼들은 자신들의 무리가 정치를 하는 목적을 누누이 자신들이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국민을 위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민의 표를 얻어야만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는 4년에 한 번 오는 선거철이 될 때만 입으로 떠들 뿐 그들이 정말로 당신들을 위해 일한다고 느낀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이제까지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었던가 생각해 보란 말이다.
파란당에서 당대표의 리스크를 생각하라며 마치 생각 있는 올곧은 국회의원인 양 바른 소리를 하겠다고 떠드는 자들을 볼 때마다 국정농단 때 경성제대 형법학 교수로 SNS를 통해 신랄한 칼춤을 서슴지 않다가 그 칼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와 멸문지화를 당하고 있는 전직 민정수석이자 법무부장관이 떠오른다.
그들이 각종 라디오와 종편 방송에 와서 파란당의 두건을 두르고 배지를 단 자들이 자기 홀로 독야청청 올곧은 선비인 양 굴며 깐족대는 의견을 날릴 때면 차라리 빨간당의 두건을 두르고 군바리 딸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히며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고 팽 당한 유 모 씨가 차라리 진실되어 보이기도 한다. 연이어 국민들의 외면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정치의 끈을 놓지 않고 권력의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하는 그가 딱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결국 자신이 정치인으로서 신념을 가지고 올곧은 소리를 하겠다고 했던 국회의원실에 그들이 속한 소속위의 문제를 해결할 용의가 있느냐고 모두 확인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입도 아니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주는 그 건방지고 후안무치하기 그지없는 보좌관이라는 자의 입을 통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전해왔다.
“국회의원이 모든 것을 일일이 다 해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늘 바쁩니다.”
빨간당? 파란당? 노란당? 당색을 가리지 않으며 그들이 일치단결 하나같이 하나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모두와 공유할 수 있는 도(道)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것을 위해 그 지위와 자리를 그놈의 배지를 계속해서 움켜쥘 수만 있다면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지역주민들조차 알지 못하는 시의원과 구의원들이 상식이하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그것도 지위랍시고 지역 주민들에게 갑질을 해서 뉴스까지 타야 겨우 굽신거리며 심심한 유감의 사과를 표하는 짓거리를 반복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누구를 보고 무엇을 배워 그따위인가를 묻고 따지지 않아도 여실히 알 수 있다.
며칠 전 길거리에서 사람에 눌려서 숨이 막혀 죽은 아이들에게 막말을 내뱉은 주유소 사장 출신의 발랄하기 그지없는 이름으로 개명한 어느 촌구석의 여자 시의원이라는 이를 징계하자는 투표가 부결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를 탔다.
조사위원회의 권고 모두가 중징계였음에도 같은 시의원이라는 당적을 같이하는 빨간당 무리들이 투표로 부결을 시켰단다. 장관직도 대통령의 입김으로 떨구는 상황에 만약 중앙당이라고 하는 여의도의 것들이 정상이었다면 그 지시는 아무리 촌구석이라 하더라도 그 영향이 미쳤을 것이다.
그 나라의 지도자를 보면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고, 그 지역 의원을 보면 그 지역의 수준을 안다는 불변의 진리에 대해 당신은 부정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