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진실과 진심은 짧게 말해도 효과적이란다.
子曰: “辭, 達而已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言辭는 뜻이 통하게 할 뿐이다.”
이 장은 공자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계에 마지않던 교언(巧言)에 대한 인식의 원인과 도대체 그 말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 방식이 늘 그러하듯이 그토록 심오한 각양각색의 스펙트럼을 다층적으로 보여주면서도 표현방식은 간결 명료하기 그지없다. 말과 글은 본디 뜻이 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풍부하고 화려하다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는 직설적인 설명이다. 말도 그렇고 글도 마찬가지로 표현함에 있어 가장 그 본질에 충실한 것은, 자신의 뜻을 표현하여 상대가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 중점을 둬야지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거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과장(誇張)과 꾸밈을 주로 해서는 안된다는 일침이다.
공자의 본래 의도를 이해한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언사는 뜻이 통함을 취할 뿐이요, 풍부하고 화려함을 훌륭함으로 삼지 않는다.
이 장의 ‘辭達而已矣’라는 표현에서 한문학 문예이론의 미학 원리 중 하나인 ‘辭達’이란 개념이 탄생하였다. 辭達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나 과장분식(誇張粉飾)과는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되어 표현에서 간이(簡易;간단명료하며 쉬게 표현하는 것)함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면 간혹 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한 초심자들은 그 둘의 개념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의 개념으로 오독하기 쉬운데, 문예이론상에서 辭達은 결코 修辭(말을 꾸며 묘사하는 것)와 모순된 개념이 아니다.
修辭는 본래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의 ‘修辭立其誠(수사입기성)’이란 구절에서 탄생한 용어이다.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言辭를 닦고 성찰한다면 곧 誠의 경지를 세울 수 있다’고 풀이했다. 당대의 학자들은 ‘문언전’을 공자의 저술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은 이 문장을 근거로 공자가 修辭를 중시하였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말로 공자가 저술했다고 하는 사실에 이견이 없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5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言之不文, 行之不遠(말은 꾸미지 않으면 오래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어 이 역시 공자의 주장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위작(僞作)이기 때문에 공자의 견해가 어느 한쪽이었다고 의심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공부를 제대로 단계를 밟아가며 하지 못해 공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설픈 초심자들이 벌이는 아주 흔한 실수일 뿐이다. 실제로 공자는 다른 글을 통해 이미 ‘문질빈빈(文質彬彬)’을 군자의 이상으로 삼는다고 천명한 바 있었다. 이것은 어느 한쪽의 의견으로 공자의 주장이 경도되었다는 어설픈 오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증명한다. 즉, 공자는 言辭에 있어 내용과 형식이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가지는 본래의 의도를 강조한 이 장의 가르침이 행여 말을 꾸미는 일에 치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이 장이 담아내고자 했던 본연의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이 장에서 지칭하고 있는 ‘辭(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 오규 소라이와 조선의 다산(茶山; 정약용)은 이 단어를, ‘大夫가 사명을 띠고 외국에 나가 전대(專對)할 때의 사령(辭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장에서 辭가 갖는 의미에 대해 글(문장)과 말(언어)의 뜻으로 파악한 것과는 달리 구체적이고 협소한 의미로 콕 짚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두 학자는 그 단어를 단순히 일반적인 말이라기보다 외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말이라고 파악했을까? 언제나 공자의 용어가 다층적이고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이들의 눈높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두 학자가 ‘辭(말)’을 외교적인 것으로 한정적인 이해를 했던 배경에는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 말이 갖는 무게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말이 가져야 할 본래의 본질을 설명하되 그것을 더욱 명징하게 설명하기 위해 외교 석상에서의 말로 구체화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외교석상에서의 언어는 조금의 오해가 생길 여지라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특히 공자 당시의 외교는, 현장에서 외교업무를 수행하는 사신의 업무를 담당하는 신하의 재량권이 거의 없었다. 군주를 대신해서 다른 나라와의 첨예한 문제들을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결정권이 없는 현장의 사신이 자신의 재량권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애매모호한 말로 상대가 오해를 하게 만드는 순간, 그것은 군주가 약속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분명한 말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공자의 시대에도 국익(國益)을 위한답시고 교묘하게 처세에 능하여 말을 애매모호하게 해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영혼 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 능력 있는 외교관이라고 인정받는 아이러니가 발생했고 발생하고 있다.
공자가 그리도 말이 많은 이를 싫어했던 이유는 말이 많아지는 이유가 그 어떤 경우라 변명하더라도 그 사유가 너무도 명백하게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에 그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왜곡하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꾸미기 위한 의도가 작용할 때 말이 많아지고 꾸며대는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어퍼컷을 쳐 올리며 대통령이 된 자의 외교순방은 언제나 시한폭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인 양 중동의 남의 나라에 가서 버젓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U.A.E와 이란에 대해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비유하며 적이 어쩌고 하는 그 가벼운 입을 다시 놀려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전 ‘날리면’과 ‘바이든’이 헷갈릴 수 있는 발언이라며 다 늙어 권위조차 의심받는 어용(御用) 전문가라는 자까지 내세우며 전 국민을 한국어 듣기 평가시험장으로 몰아세웠던 것이 얼마나 지났다고 남의 나라를 적국이니 뭐니 하는 평상시 말을 가벼이 내뱉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또 그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외교부가 외교를 제대로 하는 자들이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법고시를 통과할 정도의 수준은 안되고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정부 수반의 주요 인력으로 인정받지 못할 이들이 공무원의 3등급 지망으로 들어가, 자격지심이 잔뜩 꼬여 그저 처세만으로 권력의 눈치를 보는 3등급이라는 비아냥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이해하더라도 그들은 단 한 번도 잘못된 행실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보인 적이 없다.
이란에 대한 대통령의 망발에 대해 심심한 유감의 의미 정도를 표명하기는커녕, 절대 사과하지 않는 검찰 정권의 자백 거부 기조에 편승하여 결코 이란 정부에게 말실수였으니 오해하지 말라는 사과를 하지 않고 그들의 오해라고 몰아붙였다.
정작 말실수한 대통령의 단어는 아주 명료하기 그지없었어 말의 본질을 살렸음에도 권력과 수장인 장관의 명령을 철저히 따르는 처세에만 닳고 닳은 그 외교부의 공식 코멘트는 지지부지 사족에 사족을 달며 지저분 너저분하기 그지없는 변명의 눈덩어리 몸집만 키우고 말았다. 자국에 대한 적대적인 발언을 그것도 제3국에서 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망발에 이란 정부에서 주이란 한국대사를 초치(招致/summon)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항의의 과정이었다.
초치(招致)가 무엇인지 생소한 학도들에게 간략하게 그 의미를 풀이하고 넘어간다. 초치(summon)란, 한 국가의 외교당국이 양국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외교적 사안을 이유로 자국에 주재하는 어떤 나라의 대사, 공사, 영사의 외교관을 자국 외교 관련 부서의 청사로 불러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예컨대, 일본이 식민지 역사를 부인하는 개소리를 해댔을 때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인 항의를 표하는 외교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란의 초치가 당연한 수순이었다면, 그것에 대해 맞불을 놓듯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넘어 똑같이 주한 이란대사를 초치했다고 하는 행위를 보인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창피하기까지 한 꼬락서니였다.
일본 우익들의 무식한 발언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했다고 저 무식한 일본 정부조차 맞불을 놓듯 주일본 한국대사를 초치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로 얼마나 이 정권이 막 나가는지 그리고 외교부에 있는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공무원조차도 없어 바른말을 통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지를 여실히 재확인할 수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뿐이던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일제강제동원에 대한 배상문제에 대해 정부가 주도한답시고 그 처세의 달인들이 모인 외교부가 나서 해괴망측한 혜택을 본 한국의 기업에게서 재원을 마련하여 재단을 형성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대안(이것을 대안으로 부를 수 있는지도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을 내놓은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군바리 정권이 세워지고 돈을 당기겠다고 김종필을 통해 일본의 삥을 뜯은 것이 얽혀 있어 배상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네마네 일본이 몽니를 부릴 여지가 있는 복잡한 문제인 것까지는 문제해결에 있어 난항이 고려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뜬금없이 등장한 외교부가 정부를 자처하며 정작 피해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재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기 위해 차선이라며 또다시 정치외교학과 대학교수 입네 하며 학계에서 인정하지도 않는 궤변을 들고 나와 학자적 양식과 지식을 논하며 감히 어용교수를 자처하는 것에 눈살이 찌푸려지다 못해 속이 역겨워 견디기 어려웠다.
그가 그 뚫린 입이라고 일반 피해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병존적 채무인수’라는 용어를 버젓이 이 문제를 해결한 하나의 해법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공자가 말 잘하는 이를 그토록 혐오했던 가장 적실한 예로 들면 딱이겠다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나뿐이었을까?
피해는 입은 당사자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하는데, 전 정부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지금이라도 가해자 측에서 직접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외교적인 문제라면서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더니, 그렇게 3등급 처세의 달인이라는 자들이 내놓은 답이 고작 ‘우리나라 기업들 조인트 까서 삥 뜯은 돈으로 알아서 주면 그 돈이 그 돈이니 입 다물라’란 말인가?
민생치안에 앞장서야 할 경찰의 수장인 경찰청장 절반이상이 범죄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나라이고 검사출신의 대통령이라 검사들을 가장 잘 안다면서 여기저기 검사출신이 최고의 엘리트라며 낙하산 낙점 인사를 서슴지 않는 상황이니 뭐 이상한 것도 없다면 할 말이 없다.
한 나라의 외교를 전담하는 기관의 수장이라는 자가, 자기 딸을 특채로 2대째 외교관으로 만들겠다고 설치다가 개망신을 당해 장관직을 그만두는 것으로 플리바게닝을 하질 않나, 사드 발표할 당시에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있던 사실이 밝혀져 지적당하자 당당히 고개 쳐들고 수선을 맡겼던 바지를 찾으러 간 것이었다고 구체적인 변명을 더해 더 큰 개망신을 자처하질 않나, 외교행정은 하나도 모르고 영어 통역이나 하던 아줌마가 여성장관의 표본으로 광고모델이 되어 수장이 되었으나 국장급 이하 그녀가 얼굴마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국장급들의 리그로 외교부를 꾸려나간다며 장관을 패싱 하는 일까지 버젓이 벌어진 나라이긴 하다.
이미 이전에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는 형사처벌까지 받아놓고서 강남 한복판의 국회의원에 컴백해서는 그 직을 유지하고 겸직하면서 장관직을 수행하며 국제정치 무대에서 연이은 말실수로 지적당하는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직언조차 하지 못하면서 그 자리에 계속 뭉개고 있는 것도 참 면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화려한 언변과 출중한 외국어실력(현장에서 확인한 바 별로 그럴 수준도 되지 못하더라)이 있다한들 진실과 진심은 간단한 몇 마디로도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길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