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시대에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에게 세 가지 경계함이 있으니, 젊을 때엔 血氣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경계함이 女色에 있고, 장성해서는 血氣가 한창 강하므로 경계함이 싸움에 있고, 늙어서는 血氣가 쇠하였으므로 경계함이 얻음에 있다.”
이 장에서는 인간의 삶을 세 시기로 나누어, 매 시기마다 인간 본연의 血氣가 갖는 특성을 잘 파악해서 ‘志氣’로 그것을 조절하라고 가르쳤다. 심오한 이 장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간과해서는 안될 두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첫째는 주어를 인간이라 하지 않고 군자라 지칭한 것이고 두 번째는 병렬구조의 세 가지 요소가 아닌 성장시기에 따른 경계임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경계(三戒)’라고 표현한 점이다.
두 가지 포인트와는 별개로 이 장에서는 ‘혈기(血氣)’라는, 공자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해 주자의 주석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血氣(혈기)’는 형체가 기다려서(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니, 혈은 음이고 기는 양이다. ‘得(득)’은 얻기를 탐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경계할 줄 알아서 이치로써 〈혈기를〉 이기면 혈기에게 부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血氣란 말 그대로, ‘혈액의 운동에서 생겨나는 生氣’로 인간의 본성에 해당하는 기운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한 천부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므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성향이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그 연령별 단계를 좀 더 깊이 있게 구분하기 위해 원문에서 구분하는 세 단계의 용어를 살펴보면 ‘少之時’는 13세 이전의 시기를, 壯은 30, 40대를, 老는 50세 이후를 가리킨다고 후대 학자들은 정의하였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은 이 장을 풀이하면서, 천지만물은 혈기가 충만하면 배설을 생각하고 공허하면 채우기를 바라므로 혈기가 충만한 少壯의 때는 여색이나 싸움을 좋아하고, 혈기가 부족한 노년에는 음식과 재물로 채우려 든다고 대조하여 설명한 바 있다.
물론 공자의 시대에 50 이후를 ‘老’라고 구분했던 것이 지금의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少와 壯과 老의 시기를 규정하는 개념 자체가 그때와 오늘날은 현저히 다르다. 그런데, 그 연령대의 범위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 것과는 별개로, 기존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 장의 설명을 그저 생명의 원리에 대한 연령별 구분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사실 이 장의 핵심은 혈기를 연령별로 구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혈기가 가장 방장한 어린 시기의 치기 어림을 경계해야 하고 늙어서는 이미 기운이 사그라들기 때문에 그렇게 욕구를 갈망하는 것도 없는 것처럼 범범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기에 따라 혈기가 다르다는 것은 결국 그 욕망하는 바 역시 연령별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공자는 분명히 하고자 했다. 少壯의 욕망 분출도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老貪(노탐)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기에 위 주석에서 주자가 이해한 이 장에서의 혈기가 갖는 가장 큰 특성은, 바로 그 본성을 이성적인 요소를 통해 조절하고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통제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원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며 범씨(范祖禹(범조우))는 다음과 같이 이 장에서의 간과해서는 안될 가르침을 저 행간의 깊은 곳에서 가져와 정리한다.
“성인이 사람들(일반인)과 같은 것은 혈기이고 사람들과 다른 것은 志氣(지기)이니, 혈기는 때에 따라 쇠함이 있으나 지기(志氣)는 때에 따라 쇠함이 없다. 젊을 때엔 정해지지 않고 장성해서는 강하고 늙어서는 쇠하는 것은 혈기이며, 여색을 경계하고 싸움을 경계하고 얻음을 경계하는 것은 지기(志氣)이다. 군자는 지기(志氣)를 기르므로 혈기에 동요당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나이가 높을수록 덕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이 장을 풀이하면서 절제와 통제의 수단으로 제시한, 혈기와 대응되는 이성적인 요소인 志氣는 이 주석에서 원용된 것이다. 본능에 해당되는 혈기와 상반된 개념으로 이성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그 특징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한 마디는 바로 ‘때에 따라 쇠함이 없다’라는 설명이다. 혈기가 연령별로 단계적인 성함과 쇠함이 있는 반면, 자신의 수양을 통해 길러지는 志氣는 그 혈기를 통제하고 경계하여 얻어지는 것이기에 결코 쉽게 동요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이 志氣가 갖는 특성이고 공자가 보이지 않게 강조하고자 한 바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공자가 지적한, 인간이 갖는 단계별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혈기가 방장한 어린 시절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색(色)’이라는 한 설명을 남성위주로 이해하고 설명한 해설서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세상은 남성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무엇보다 혈기방장한 젊은 남성이 색(色)에 빠져버려 이성적이지 못하게 되려면 그가 꽂혀있는 여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생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성이 그저 대상으로만, 목적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장에서 구분한 세 가지 연령별 대표 단계는 어찌 보면,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바가 변하는 시기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생명을 얻어 어느 정도 안정된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나서 먹고, 자고 싸는 등의 생명 유지와 성장을 위한 욕구 외에 가장 먼저 갖게 되는 욕구가 바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눈뜨게 되는 이성에 대한 사랑임을 공자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으로 가장 기초적인 본능적 욕구에서 벗어나 눈뜨게 되는 것이 이성에 대한 것임은, 혈기가 방장 해서도 그러하지만, 혈기방장한 욕구가 처음으로 꽂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는 대상이 본래 자신을 둘러싸고 살아온 가족 이외의 다른 타인이 되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이기 때문이다. 본래 사춘기 시절 친구 간의 우정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가족보다 친구와 어울리고 친구와의 의리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겨 우선시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생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인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르는 것이 ‘이성’ 친구이고, 그것은 종족 번식에 대한 본능과 뒤섞이면서 자연스레 사랑이라는 감정과 육체적인 탐욕이 뒤섞여 이성적인 통제가 어려워질 정도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부모님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그것이 아니라며 말릴수록 눈이 뒤집혀 오로지 하나만 보이는 사람처럼 날뛰다가도 그 시기가 지나버리면 어느 누가 말리지 않아도 언제 그랬나는 듯이 사그라져버리는 그 알량한 젊은 날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 장에서 설명한 색(色)의 현대적 광의(廣義)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정과 의리, 그리고 사랑이 전부일 것만 같았던 질풍노도의 10대가 지나고 나면, 불안정하던 혈기가 강건하게 되면서 다투게 되는 것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공자는 설명하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다툰다는 말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다툼은 경쟁에서 출발한다. 그 경쟁은 곁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경쟁할 이유가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겉치레에 해당하는 경제적인 부로 인해 다투게 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싸운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래서 ‘싸운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다툰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그리고 더 우위에 서기 위해 장년기의 욕망은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하게 만들고 사람을 지치게 한다.
내 눈에 보이는 다른 누군가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하기에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더 예쁜 배우자, 더 능력 있는 배우자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고 다투게 되며,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해야 하고 더 좋은 학교를 가야만 하고 더 키가 크고 더 예뻐야 한다는 욕망에 끊임없이 투자라는 명목으로 그 욕망을 불사르고 때때로 그 욕망의 불길에 스스로의 몸을 태워버리고 마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경쟁하고 더 많이 갖기 위해 강성해진 혈기의 장년기를 보내고 난 뒤 나이가 들어 돌아보았을 때,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스스로는 반성하게 되던가? 혈기가 이미 쇠하였음에도 공자는 경계해야 할 것이 ‘득(得)’이라고 방심의 끈을 놓지 말라 일갈한다. 혈기가 이미 모두 쇠한 노년기에 무엇을 ‘얻겠다’는 의미에서 그런 경계를 하였을까?
스스로 배우고 익히며 수양하는 것으로 지기(志氣)를 통해 통제하고 절제하여 자신의 덕(德)을 완성하지 못하여 노년을 맞은 이들은 강건했던 장성기의 다툼에서 기운이 빠져 갈망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노탐(老貪)을 드러낸다. 바로 불로소득을 바라며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탐내는 사악함만이 남아 공짜로 대접받고 다른 이들의 것을 탐하여 자신의 것을 늘리고 싶어 하는 욕망의 최종단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혈기가 불안정한 시기에 부모에게 바른 교육을 받고 스스로 배우고 익혀 고전을 통해 지식과 생리적 불안함을 위로받으며 훌륭한 스승까지 만나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답을 도출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장성하게 된다면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꿈이나 목표점을 향해 노력해 나아가되, 결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자괴감이나 자격지심 따위를 느낄 겨를 조차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람이기에 문득 그런 불안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의 심지가 올곧은 방향으로 성장해 왔으며, 주변에 바른 어른들의 지도와 지지가 있다면 결코 쉽사리 흔들려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기(志氣)를 통한 자기 수양이 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최후(?)는 노년기에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젊은 시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부와 명예를 위해 탐닉했던 자들의 노년은 그야말로 자신이 움켜쥐고자 했던 것들을 얻고 더 얻어내기 위해 추악한 민낯을 감추지 않는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존경받는 업적을 만들어놓은 것 같은 자들이 노년이 되어 그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며 자신의 평생을 망쳐 나락으로 떨어져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젊은 날 훌륭한 문학적인 성과를 이루었다며 노벨상 수상을 매년 기대한다고 거들먹거렸던 자의 추악한 과거가 만천하에 드러난 이를 비롯하여, 운동권 출신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근사한 출사표를 던지고 감옥에 다녀온 것을 훈장으로 여기며 정치활동을 하며 능력 안 되는 자기 자식의 스펙을 만들어주겠다며 부정을 저지르고 지금의 자신의 지위와 부를 움켜쥐겠다며 기득권을 놓지 않으며 다선의 국회의원이 자랑인 양 떠들어대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추악한 자들의 민낯을 보며 얼마나 많이 눈살을 찌푸려왔던가?
이미 십수 년 전에 아주 짧은 시기 고작 임명된 고위 공직자를 지낸 것만으로도 ‘장관’이니 ‘총리’니 ‘차관’이니 불리며 그 가족이 마치 현직에 있는 이들도 하지 않을 몽니를 동네 이웃에게 부리며 대접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물론이고,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약중독자처럼 끊임없이 정치판에 고개를 들이밀고 기웃거리며 어떻게 해서라도 한 자리 얻어보겠다며 추악한 썩소를 내미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손톱만큼 남아있는 자신의 ‘득(得; 얻음)’마저도 모두 날려버리고 있음을 우리는 딱한 눈으로 보게 된다.
경성제대 법학과가 그 대학의 그 학과가 생기고 난 이래, 우리나라 부동의 최고 학부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 출신의 동문들이 법조계와 정치계와 심지어 경제계와 공무원사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썩어 문드러진 행태를 자행하며 이 사회와 나라를 좀먹고 무너뜨렸는지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바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실히 케이블 생중계를 통해 보게 된다.
한때, 그 지역을 대표하는 소년등과의 천재였던 자들이, 똑똑하며 일 잘하는 능력 있는 인재로 인정받고 판검사로 다른 이들에게 판결을 내리던 이들이 그간의 경륜으로 더욱 현명해지기는커녕 노쇠해진 나이에, 오로지 탐욕만으로 거짓된 추악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움켜쥐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감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