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때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말하려는 자들에게.
孔子曰: “侍於君子有三愆: 言未及之而言, 謂之躁; 言及之而不言, 謂之隱; 未見顔色而言, 謂之瞽.”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를 모심에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말씀이 미치지 않았는데 〈먼저〉 말하는 것을 躁(조급함)라 이르고, 말씀이 미쳤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隱(숨김)이라 이르고, 顔色을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을 瞽(봉사)라 이른다.”
이 장에서는 군자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해서는 안될 잘못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뜬금없이 왜 군자를 모시는 일이라는 표현을 썼는지에 대해서 다소 위화감을 느낄 초심자도 있을 법하여 간략하게 부연하자면 여기서 사용된 君子라는 용어는 아래 주자의 주석에도 언급하고 있다시피 덕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기존의 개념도 있지만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는 넓은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군자(君子)라는 표현 말고도 어른이라는 표현으로 쓸 수 있는 용어가 많았음에도 왜 굳이 군자(君子)라는 표현을 썼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접근하는 것이 이 장에서 의도한 바를 읽는 첫 열쇠가 될 것이다.
먼저 주자는 이 장에 대해서 무엇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석을 달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君子(군자)’는 덕과 지위를 소유한 이의 통칭이다. ‘愆(건)’은 잘못이다. ‘瞽(고)’는 눈이 없어서, 말을 살피고 안색을 볼 수 없다.
주석에서는 기존의 군자(君子) 개념을 설명하듯 쓰윽 지나갔지만, 기존에 우리가 공부했던 군자의 개념에 지위는 사실 강조된 바가 없다. 주자가 주석에서 지위가 높은 자를 슬쩍(?) 넣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강조하려는 방향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편은 ‘계씨(季氏) 편’이다. 이 편의 저변에 깔려 있는 공통 주제의식을 감안하면 그 의문은 쉽게 풀 수 있다. 여기서 군자는 신하 된 자가 섬겨야 할 군주, 곧 천자를 의미한다. 본래 천자가 결코 제후나 대부가 넘볼 수 없는 정치적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면 하극상의 참람한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보면, 천자가 비록 그런 능력을 갖추어 어쩔 수 없이 경외(敬畏)의 마음을 갖게 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겠으나 천자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 아래 섬기는 자들은 결코 참람된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장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장에서 군자(君子)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도는, 천자가 군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라는 위정자에 대한 바람과 쓴소리를 담아냄과 동시에, 배우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오르고자 하는 존재인 군자를 모시는 듯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삼가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다각적으로 담겨 있다.
나중에 공부하게 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위에서 경외(敬畏)라고 표현했던 개념 중에서 ‘畏(외)’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엄탄(嚴憚 ;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해설하였는데 현대철학에서의 경외(敬畏)가 바로 그 개념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두면 도움이 되겠다.
자아, 그럼 본격적으로 모셔야 할 어른(천자, 군주)에게 해서는 안될 세 가지 잘못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설명된 ‘말이 미치지 않았는데’라는 용어를 자칫 현대적 의미로 성급하게 받아들여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 정도로 착각하여 설명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본다. 그야말로 조급한 오독, 되시겠다. 이 내용은 어른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먼저 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즉,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 어른이 먼저 그 어젠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급한 마음이 먼저 제안하듯 꺼내놓는 경우를 지적한 것이다.
이 경우만 보더라도 군자가 왜 천자를 가리키는 것인지 다시 한번 재확인할 수 있다. 군신관계에 있어 군주가 되는 이가 먼저 사안에 대한 의견을 내지 않는데 그를 섬기야 할 위치에 있는 자가 먼저 의견을 내는 경우는 대개 자신의 이익이 연관되어 있거나 정치적인 알력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임이 모두 감안된 설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내용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설명이다. 어른이 말씀을 꺼냈음에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 숨기는 것이니 해서는 안될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군주가 정치적인 어젠다를 언급했음에도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 경우는 의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꿍꿍이가 있기에 감춘다는 엄중한 질책에 다름 아닌 설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야 할지 어떨지를 어른의 안색을 살피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을 ‘눈이 멀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세 가지 잘못 중에서도 가장 참람된 행동이라 여겼기 때문에 거친 표현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거친 표현이라 한 이유는, 눈이 버젓이 보이는 이에게 ‘봉사(瞽)’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반인들 사이였다면 욕설에 가까운 비난이라고까지도 볼 수 있다.
그렇게까지 단호한 한 방을 날린 이유는 너무도 간명하다. 자신이 모셔야 할 군주가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경우는 단 한 가지 경우 이외에는 없다. 군주를 군주로 여기지 않는 참람됨의 극치까지 무례함이 치달은 경우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계씨(季氏) 편’에서 궁극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는 주제의식이다.
그래서 이러한 공자의 의도를 읽은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때에 맞은 뒤에 말하면 세 가지의 잘못이 없을 것이다.”
이 주석에서 언급된 ‘時然後言’이란, 이른바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줄여서 통상 ‘時言’이라 부르기도 했다. 앞서 우리가 공부했던 ‘헌문(憲問)편’에 보면, 위(衛) 나라의 공명가(公明賈)가 대부 公叔文子의 언행을 평가하면서 “그분은 말해야 할 때 말씀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한 바 있는데 공자가 그를 허여하기까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장에서 군자(君子)가 갖는 의미를 ‘계씨(季氏) 편’의 주제의식과 관련하여 위와 같이 풀이하긴 했지만, 기존에 출간된 현대해설서들은 대개 이 내용을 어른에게 갖춰야 할 예의범절로 해석한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해설하는 <논어(論語)>읽기가 기존의 어떤 다른 서적들과도 같지 않은 해설이나 의견을 풀이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부해 온 학도들이라면 이미 익숙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싶다.
그저 어른에 대한 존경의 의미만으로 해설되는 내용이라면 굳이 ‘계씨(季氏) 편’에 실려 있을 이유가 없고, 무엇보다 ‘잘못’이라는 표현에 ‘허물 과(過)’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굳이 허물이라는 의미 외에도 이지러지다라는 의미의 ‘건(愆)’이라는 글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학술적인 근거를 다시 한번 부연한다.
참고로 공자가 유교에서의 언급한 이 장의 삼건(三愆)과는 별개로 불교에서도 삼건(三愆)이 있는데, 그 세 가지 허물은 탐(貪; 탐하다, 과도하게 욕심내다), 진(瞋; 눈을 부릅뜨다, 성내다), 치(癡; 어리석다, 미련하다)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절제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실수를 언급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불교에서도 역시 이 세 가지 잘못을 수양으로 절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장이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층위의 경계는 세 가지 허물의 공통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말하는 행위가 갖는 본연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것과 그 행위가 결코 혼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방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관계성에 대한 부분이다.
말은 듣고 있는 상대가 없다면 의미가 없는 행위이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표현방식이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그 말하기에 ‘예(禮)’라는 개념을 가장 기초적이자 중요한 기준으로 세워둔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욕구일 수 있다. 결국 감정을 표현하거나 의견을 표출하는 이유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달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배움을 통해 수양한 배우는 자라면, 그저 본능에 충실하여 욕구와 본성이 일어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동물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공자가 강조한 ‘예(禮)’이다.
이 장에서 ‘예(禮)’라는 단어나 표현이 나오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행간에서 끌어올려 무엇보다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은 배움의 단계에서 오는 차이일 뿐, 공자는 명확하게 그 내용을 이 장에도 역시 새겨두었다.
여기서 주목하고 간과해서는 안될 특이점은, 먹는 것이나 자는 것, 돈을 밝히는 것, 유명해지고 싶은 것 등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사리사욕에 이르기까지 많은 행위가 있음에도 이 장에서는 ‘말하기’라는 인간만이 가능한 행위를 대표적인 사례로 두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겠다고 절묘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흐름을 타고 나왔던 어퍼컷의 주인공은 자신보다는 자신의 아내와 그 장모 때문에 대통령 선거 전에는 물론이고 대통령이 되고 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도 그 의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선거 전 검찰총장을 박차고 나와 대선에 나서겠다고 출마의지를 불태우던 시절, 온갖 지저분한 구설수라는 구설수는 다 달고 다녔던 그의 아내가 자신보다 어린 기자라는 남자와 통화를 나눈 그 당당한 여장부의 목소리는 그녀를 한 번이라도 사석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정도의 당참이 고스란히 담겼었다.
그런데 수많은 지저분한 구설수 중에서도 하필이면 자신의 이력을 조작하여 사문서위조 및 공문서 위조에 해당하는 범죄에 해당하는 학력위조에 대한 부분과 조악하기 그지없는 논문문제가 터지자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최소화하겠다고 그녀는 기자회견을 자처하며 선머슴 같은 당참을 뒤로하고 참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모습을 연기하며 ‘만약이라도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면 결코 눈에 띄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내조를 하겠다고 약속하겠다’라고 비싼 돈을 주고 맡긴 글쟁이가 쓴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녀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내조했는지에 대해서는 국민모두가 이제까지 듣고 보고 확인한 바와 같다. 자신이 정말로 예쁘다고 생각했던 워너비였는지 감히(?) 평생을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봉사했던 오드리 헵번을 흉내 내며 ‘빈곤 포르노’까지 찍어 이리저리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통령과 그의 아내, 심지어 장모까지 지켜내겠다며 죽창을 들고 홍위군을 자처하는 빨간당의 정치욕에 불타는 이들은, ‘어떻게 영부인이 눈에 띄지 않는 내조를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대선 전에 그녀가 했던 그 비싼 멘트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뭐 멀쩡하게 들리는 한국어마저 다른 의미라고 우겨대는 것을 보았으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혹시라도 밝혀지게 될 자신들의 옳지 못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수사마저도 정치 탄압이라고 포장하여 저쪽도 잘못이 있으니 같이 죽자며 물고 뜯는 정치꾼들의 행위가 결코 고와 보일 리가 없다. 만약 파란당의 이제까지의 행태가 정말로 국민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이 빨간당의 ‘동료’ 국회의원들이 했던 짓과는 전혀 다른 정의구현과 대민봉사에 치중된 것이었다면 그들은 굳이 광화문으로 나오라며 국민들을 선동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먼저 빨간당을 붕괴시켜 버릴 것이다.
말은 기본적인 의사표현의 수단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다 안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알아듣지 못한 척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