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잡는 칼은 결코 소를 잡는 데 쓸 수 없다.

하지만, 소 잡는 칼은 닭을 잡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by 발검무적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 曰: “割鷄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孔子께서 武城에 가시어 弦樂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들으셨다. 夫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겠는가.” 子游가 대답하였다. “예전에 제(偃)가 夫子께 들으니 ‘君子(벼슬아치)가 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小人(백성)이 道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 하셨습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偃(子游)의 말이 옳으니,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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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예악(禮樂)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결국 정치의 본령이 어디에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장에서 흔히들 사용되는 ‘割鷄에 焉用牛刀리오(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겠는가.)’라는 말이 유래되어 사용되긴 하지만, 실제로 이 장에서의 의미는 평상시에 쓰는 희화적인 풍자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후술 하겠지만 이 장에서의 이 말은 공자의 중의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또 조금 어려운 사자성어로 ‘弦歌之聲’라는 용어도 상투어구로 전성되기도 하였는데, 그 의미는 올바른 음악의 음색 혹은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소리로 직역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의미는 禮樂이 바르게 시행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성어이다.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읍재(邑宰)로 있던 무성(武城)을 찾았는데 마침 그가 그 작은 마을의 백성들에게 禮樂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음악으로서 먼저 듣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자는 그 사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설명한다.


‘弦(현)’은 琴(금)과 瑟(슬)이다. 이때에 子游(자유)가 武城(무성)의 邑宰(읍재)가 되어 예악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에 맞추어 노래(시가)를 부른 것이다.


자유(子游)가 읍재(邑宰)로서 고을 사람들에게 예악을 ‘제대로’ 가르친 것이 왜 공자가 빙그레 웃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을까? 이 부분이 바로 이 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키포인트에 해당한다. 공자는 그 상황에 “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겠는가.”라는 말로 굳이 닭 같은 작은 고기를 요리하는데 소를 잡는데 쓰는 큰 칼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비유하였다.


이 핵심 장면의 의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리한다.


‘莞爾(완이)’는 빙그레 웃는 모습이니, 기뻐하신 것이다. 인하여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어찌 이런 大道(대도)를 쓸 필요가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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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승이 웃자고 했던 농담(?)에 자유(子游)가 정색을 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가르침대로 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 되느냐고 되묻는다. 여기서 고지식(?) 하기 그지없던 자유(子游)의 성격을 알 수 있는데, 일단 자유(子游)가 언급한 스승의 본래 가르침은 당연히 올바른 지적이었다. 다만 자유(子游)는 스승이 왜 그런 농담(?)을 했는지 그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우를 범하였다. 그 상황과 별개로 주자는 자유(子游)의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한 해설을 덧붙인다.


‘君子(군자)’와 ‘小人(소인)’은 지위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자유가 말한 것은 아마도 夫子(부자)께서 항상 하신 말씀일 것이니, 군자와 소인이 모두 배우지 않아서는 안되므로 武城(무성)이 비록 작지만 또한 반드시 예악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제자가 행여 마음이 상했을까 싶어 공자는 제자를 다독이듯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말이 농담(?)이었다며 자유(子游)의 실천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래서 행여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할까 싶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이 부분에 대해 해설한다.


子游(자유)가 독실히 믿는 것을 가상히 여기시고, 또 門人(문인)의 의혹을 풀어주신 것이다.

1.png <삼국지연의>에서는 화웅이 여포를 소 잡는 칼에 비유하며 이 말을 사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문면 그대로의 의미는 공자가 실없는 농담을 하였고, 제자인 자유(子游)가 스승의 가르침을 작은 마을이라고 하여 가벼이 여기지 않고 강직하고 고지식하게 지켜나갔다는 이야기정도가 되고 만다. 대부분의 현대 논어 해설서에서도 그저 이런 정도로 이 의미를 해석하고 만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공자가 실없는 농담을 할 위인이던가? 단 한 번이라도 공자가 실없는 농담을, 그것도 제자에게 한 적이 있는 인물이던가? 아니다. 그렇다면, 배우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그 부분에서부터 의문을 품고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공자가 정작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논리적인 해답을 찾을 계기가 마련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는 제자 자유(子游)의 통치방식이 잘못되었다거나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 과장되었다고 비웃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르치고 직접 곁에서 보아왔던 제자 자유(子游)는 제후 이상의 천자를 보좌해야할 그릇이거늘 고작 그렇게 작은 고을에서 안주할 인물이 아님을 한탄한 것이었다. 즉, 원문에서 말하는 소 잡는 칼이란, 앞서 다른 현대해설서에서 해석한 바와 같은 ‘정식 예악 교육’이 아닌 ‘자유(子游)’를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자유(子游) 그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공자가 사용한 ‘割鷄에 焉用牛刀리오(닭을 잡는데 어찌 소를 잡는 칼을 쓰겠는가.)’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일반 정치꾼들보다 훨씬 더 큰 그릇의 인재가 세간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한 공자의 고등 비유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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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말하자면, 소를 잡는 칼로는 닭을 잡든 작은 짐승들을 잡을 수 있지만, 닭을 잡는 칼은 닭을 잡을 수 있을 뿐, 더 큰 소를 잡는 데에는 부족하다는 설명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제자가 더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서도 작은 고을에서 그 능력을 썩히는 것을 안타까워한 스승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한 것을 뛰어넘어, 더 능력을 갖춘 이들은 도태되고 능력은 부족하면서 아부하며 세상을 요령 있게 사는 인간들끼리 동류의식으로 해 먹던 당대의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일갈인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깊은 속뜻을 이해한 주자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다스림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예악을 써야 함은 그 도가 똑같은 것이다. 다만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예악을 쓰지 못하는데, 子游(자유)만이 이것을 행하였다. 이 때문에 夫子(부자)께서 갑자기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셨으며, 또 인하여 그 말을 뒤집어서 희롱하신 것인데, 자유가 正(정색)으로써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자유의 말을 옳다고 하시어 스스로 그 농담이었음을 실증하신 것이다.


하필이면 ‘예악(禮樂)’인가라는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임을 이 마지막 주석에서는 살며시 다시 강조한다. 굳이 ‘제대로 된 다스림’이라 설명하지 않고, 예악(禮樂)을 구체적인 사례로 든 것은 위 주석의 첫 번째 문장에서 가리킨 바와 같이 다스림의 기본으로 제시된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악이 다소 모호할 수 있는 개념어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논어(論語)>를 착실하게 읽어온 학도들이라면 그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매번 그런 뻔한 변명을 하는 거짓 인문학 애호자들의 행태가,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인정이고 자백임을 이제는 모두 깨달을 때도 되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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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하는 예악(禮樂)은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 장의 상황묘사에서 작은 고을의 백성들이 박자에 틀리지 않으며 노래를 하는 것만으로 대표될 수 있는 예악(禮樂) 임을 보여준 것이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그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공자가 제대로 된 다스림을 말하면서 제자에게 예악을 강조하더나 기껏 박자에 맞춰 노래를 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집에 놀러 간 아이들이 자신의 집이 아닌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비해 요즘은 그럴 일이 많지도 않지만 함께 식사를 하는 행위는 그 집안의 문화와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기 전에 제멋대로 식사를 하던 아이들은 어른이 먼저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식사를 시작하는 문화에 자신의 집과 무엇이 다른지를 몸소 느끼게 된다. 어른이 물건을 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으로 홱 잡아채는 아이들은 두 손으로 공손히 손을 모아 물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했던 행동을 자연스럽게 되새기며 바로잡게 된다.


10대 아이들끼리 몰래 술을 마시며 술을 배운 경우와 어른들에게 주도(酒道)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아이들의 술버릇은 20대를 지나 그 아이가 어른이 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쉽게 고치기 어려운 술버릇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연필을 제대로 쥐는 법이 그러하고 젓가락을 제대로 짚는 법이 그러하며, 어른들을 만났을 때 먼저 공손히 인사하는 습관들이 모두 이 장에서 예시화된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예악(禮樂)인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연필을 제대로 쥐고 글을 쓰는지를 살펴보면, 그 별것 아닌 사소함이 젊은이들이 자신이 그저 편한 대로 쥐고 제멋대로 쓰는 것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떤 어른들도 일찍부터 바로 잡아주지 않았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별것 아니라고, 그게 뭐 대단한 것이라고 올바름의 기준을 삼고 다름을 틀리다고 하냐고 까칠하게 목소리를 높일 어리석은 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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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안의 핵심은, 올바름이 어느 하나는 아닐지라도 사회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조차 부모와 어른들 윗세대들로부터 올바르게 계승되고 다듬어지지 못한 채 그것을 개인차라든지 자유라든지 하는 되지도 않는 헛소리로 포장하고 변명하도록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아이가 신발을 신은 채 의자 위를 뛰어다니며 난동을 피우는 것에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을 지키라고 할 때, 아이엄마가 왜 내 아이에게 뭐라고 하냐고 발끈하는 것은 개인차도 자유도 아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언덕길에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올라가는데 그것을 돕는 것은 의무라서도 아니고 봉사점수를 인정받기 위함도 아님은 교과서를 통해 가르칠 내용도 아니고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몸에 새겨져 실천으로 이어질 것도 아니다.


닭은 고사하고 병아리를 잡지도 못할, 칼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한 이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거나 탁월한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설치는 일이 너무도 흔한 작금의 사태를 보자면 이 장에서 공자가 탄식했던 당대의 현실은 수천 년 전의 중국이나 화성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소 잡는 칼일 수도 없을뿐더러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갖춘 이들이라면 굳이 위정자나 인사 담당자들이 골치 아플 일도 없다. 사회구성원은 저마다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조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낼 뿐,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하여 도태되거나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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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능력이 되지 않고 그릇이 그만하지 못한 자가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대개 그런 자들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는 데에는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부합해야만 한다.


그중 한 가지 필수조건은, 그들이 그런 능력을 갖추었는지조차 확인할 필요 없이 그들을 뽑아 올리는 자들의 존재이다. 그들이 그런 일을 벌이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능력이나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기보다 자신의 사리사욕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의 기준으로 이른바 ‘자신의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함이다. 능력이나 자질이 안 되는 자들임에도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난 자들은 이러한 자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그들이 원하는 행태로 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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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이나 비리가 올곧은 후임으로 인해 백일하에 드러나 자신의 죗값을 치르거나 자신의 영욕의 시대가 끝나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끝낼 사람인가 그들과 목적을 함께 하며 뒤에서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을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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