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사욕을 위해 스스로 박쥐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에게.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說, 曰: “末之也, 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公山弗擾가 費邑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고서 孔子를 부르니, 孔子께서 가려고 하셨다. 子路가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가실 곳이 없는데, 하필 公山氏에게 가시려 하십니까.” 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저가 나를 부르는 것은 어찌 하릴없이(공연히) 그러겠느냐. 나를 써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東周(동쪽 周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 장은 공산불요(公山弗擾)라는 인물이 처음 언급되는 사건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노나라 정공(定公) 8년(B.C. 502년)에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계씨에게 불만을 품고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와 함께 계환자(季桓子)를 억류하고 공자를 초빙하려 한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당시 공자의 나이는 쉬흔이었고, 이 편을 시작하며 언급했던 양화(陽貨)가 반란을 일으킨 지 2년 뒤의 일이다.
공산불요(公山弗擾)라는 인물과 당시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해설한다.
弗擾(불요)는 계씨의 가신이니, 陽虎(양호)와 함께 桓子(환자)를 잡아 가두고 費邑(비읍)을 점거하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상세하게 정리하자면, 계평자(季平子)가 죽고 계환자(季桓子)가 대를 이었는데, 이 인물은 기백으로나 재능으로 보건대 도저히 그 간의 계씨 가문이 누렸던 영욕을 이어나갈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 자였다. 그전까지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씨 가문의 수장이 이런 인물로 교체되고 나니 당연히 그간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던 다른 세력들이 그 틈을 비집고 권력을 잡아보겠다며 나선 그야말로 혼돈의 세월이 시작되는 차였다.
그중 양화의 난도 있었던 것이고, 이 장에서 언급하는 공산불요(公山弗擾)의 난도 일어난 것이었는데, 공산불요(公山弗擾)도 그저 허접한 인물만은 아니었는지 당시 노나라를 포함한 천하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공자의 인지도를 감안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저열하고 수준 낮은 권력다툼을 버린 자의 부름에 스승 공자가 수락하고 그에게 가려 하자, 제자 중에서도 연장자이자 다혈질로 누구보다 정의로움을 외치던 자로(子路)가 그것을 반가워하며 기뻐할 리가 없었다. 그는 바로 스승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왜 그런 자의 힘이 되어주려 하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자로(子路)의 반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도를 상세히 풀이해 준다.
‘末(말)’은 없음이다. ‘도가 이미 행해지지 아니하여 갈 곳이 없으니, 하필 공산씨에게 가시려 하십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실제로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살펴보면, 공자가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豊), 호(鎬)에서 일어나 왕자가 되지 않았는가! 비(費)는 비록 소읍(小邑)이긴 하나 한 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정말로 그에게 가세하려 했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다혈질의 자로(子路)만 그리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공자의 가르침을 차곡차곡 이해해 온 학도들의 입장이어도 제대로 된 군주가 아니라면 그의 곁에서 벼슬하지 말라고 했던 공자가 이리 쉽게 그리 저열한 자의 밑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은 다소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한 이유로 후대 몇몇 학자들은 이 장에 보이는 공자의 사적(史蹟)이 역사상의 시기와 맞지 않고 공자가 벼슬에 나아가려고 급급해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논어(論語)>를 편집하던 어리석은 자가 끼워 넣은 것으로 의심하는 견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행동을 어느 하나의 기준만으로 온전히 해석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이 장의 일화에서 보인 공자의 언행이 기존의 가르침과 배치되거나 모순된다고 보이지 않는다.
공자의 대답에서 그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는데, 공자가 자신을 영입하겠다는 공산불요(公山弗擾)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을 모시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자신을 중용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은 그곳을 또 다른 주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주자는 공자의 이러한 답변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부연한다.
‘어찌 하릴없이 그러겠느냐.’는 것은 반드시 자신을 등용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東周(동주)를 만든다.’는 것은 주나라 道(도)를 동쪽 노나라에 일으킬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이러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인 의구심은 쉽게 가시지 않을 수 있다.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공자를 중용한다고 하더라도 고작 季氏의 家臣인 그가 어떻게 周나라 수준의 정치를 다시 불러일으켜 부활시킬 수 있는가? 게다가 아무리 공자라 한들 반란자가 거점으로 삼은 반읍(叛邑)에 의거하여 그 지대한 왕업(王業)을 과연 부활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분명히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정자(程子)는 그와 같은 의문을 가진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공자의 의도와 그 행간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성인께서는 천하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없고 또한 허물을 고칠 수 없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셨다. 이 때문에 찾아가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끝내 찾아가지 않으신 것은 그가 반드시 고치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석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오지만, 결국 공자는 그에게 가지 않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공자가 만약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묻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투신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자만했더라면 지금의 존경받는 성인 공자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세상일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큰일일수록 그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리고 쌍방 간의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 않고서 어느 한쪽은 성급히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일은 하수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부류의 남의 말에 쉽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개돼지급들이나 하는 짓이다.
내가 스스로 여러 가지 사실관계를 종합하여 내 분석을 통한 판단에 의거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일방적인 이야기나 정보만으로 다른 이의 행동이나 다른 이의 워딩을 재단하는 것만큼 스스로 수준을 낮추고 망신살로 자폭하는 지름길도 없다. 착실히 제대로 공부하며 수양해 온 이라면 결코 그런 저급한 수준의 실수로 모든 일을 그르치는 일을 벌이지 않는다.
위에서 정자가 풀이한 설명과 같이 공자는 당시 노나라의 상황을 상당히 엄중하게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하를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조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보면서 누군가 자신의 조국을 올바르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시작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가 수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자신이 함께 힘을 더할 리더가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이다. 공자가 결국 그에게 가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건대, 공자는 단순히 그 상황이나 다른 이들의 말이 아닌 자신이 직접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가 대단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본 것이 아니라 지금은 부족하고 조금 어설플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과연 바꿀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그렇게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그 자질을 충분히 검토했을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이 장의 본의(本意)와는 별개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제공되는 한정된 정보나 왜곡된 정보를 듣고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정보를 흘린 자의 의도대로 쉽사리 오판하는 실수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 공자가 보인 이례적인 반응에 대해 그것이 후대 편집인의 실수였을 것이라고 그저 의구심에 대한 결론부터 쉽게 내리고 넘어가기 전에 이 장에 오롯이 담긴 공자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살피고 내가 그간 어떤 아무런 의심도 없이 했던 타성적인 실수가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만약 공자가 그저 권력을 잡을 기회만이 필요한 소인이었다면, 이 ‘양화(陽貨) 편’에서도 수차례 확인한 바와 같이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하여 그 능력을 필요로 하며 영입하려는 권력자라는 이들 중 그저 아무에게나 자신의 몸을 기탁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그렇게 여기 붙었다가 다시 조금 더 나은 곳이라며 저기 붙었다가 하는 이른바 배웠다는 학자며 정치가들이 적지 않았다.
공자의 시대뿐이랴? 수천 년이 지난, 작금의 대한민국을 보더라도 불러만 준다면 여러 정권에서 자신을 불러준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총리직에 앉아 막후의 법비들이 돌리는 회전문 인사의 주인공 역할을 희희낙락 누리는 자가 그저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전히 목도하고 있다.
심지어 그런 자들은 정치적인 색깔이 다른 정부였음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불러줬다면서 그것을 마치 훈장처럼 하마평이 나올 즈음이면 프로필처럼 언론을 통해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대기까지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로 정치색을 달리하는 당파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당파로 적을 옮기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대개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불리거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박쥐와 같은 삶을 살며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의 행보가 그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한 치의 오해도 섞여 있지 않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며 사상범으로 감옥에 다녀온 것을 그야말로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드러내 보이며 정치권으로 발길을 돌린 자들만 보더라도 민주화 적통을 내세우면서도 썩을 대로 썩어 국민들의 비난을 받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노선을 바꾸어 어느 순간에서부터 인가 반대편 쪽의 선봉주자로 서서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다 노쇠한 몰골로 끊임없이 어떻게 해서든 권력의 한 자락을 잡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최근 어퍼컷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노동자노조에 속해 있던 이른바 노동운동가라고 들의 변천사를 들여다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른바 귀족노조의 위원장이나 심지어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프로필에 노동운동가라고 적은 자들이 그렇게 비난에 마지않던 보수당의 맨 앞에서 비례대표나 공천자리라도 하나 받아서 궁극적으로 그토록 거머쥐고 싶었던 권력의 정점인 정치판에 뛰어드는 일은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80년대 대학을 다녔거나 최소한 그 앞뒤 언저리에 가투를 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의 피 끓는 이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자유를 보장했다는 과대포장까지는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최소한 비난받아야 할 자기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음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올바른 사회를 바라며 매캐한 최루탄 사이를 뛰어다니며 민주화를 외쳤던 이들이, 배우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계의 현실을 바꾸겠다며 야학의 현장에서 공장 속에서 함께 호흡했던 이들이 어느 사이엔가 비싼 양복에 명품 구두에 거들먹거리며 자기 손으로는 자동차 문조차 열려 들지 않고 빨리 문을 열지 않는다며 수행기사를 치어다보는 추한 민낯을 드러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는 서글프게 한다.
그들도 그러할진대, 젊은 피가 정의로 끓어도 부족할 시절에조차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만을 위해 고시에 매달려 소년장사가 되고 시골에서 올라온 자신에게 용돈을 지원해 준 가게 사장이 겪는 현재 어려움을 나몰라라 하는 그 후안무치한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밥그릇 색깔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여전한 후안무치함으로 일관하는 공직자라고 하는 이들은, 정치의 파고 사이에서 서핑을 하듯 자신의 이익을 챙겨가며 그때그때 달라지는 지조를 가지고 자신만의 정의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능력이라 말한다. 과연 당신도 그들이 능력이 있어 그 자리를 차지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