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내 진심 어린 노력이 있어야만 하고.
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爲仁矣.” “請問之.” 曰: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子張이 孔子에게 仁을 여쭙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를 능히 天下에 행한다면 仁을 행하는 것이다.” 하셨다. 子張이 그 내용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공손함〔恭〕과 너그러움〔寬〕과 信實함〔信〕과 민첩함〔敏〕과 은혜로움〔惠〕이니, 공손하면 업신여기지 않고 너그러우면 뭇사람들을 얻게 되고 信實하면 남들이 의지하고 민첩하면 공이 있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다시 그 어렵다는 ‘仁’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등장한다. 제자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하자, 공자는 恭(공), 寬(관), 信(신), 敏(민), 惠(혜)의 다섯 가지 구체적인 사안을 제시하며 ‘仁’을 행한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사실 <논어(論語)>에 편집된 공자의 가르침이라고 한 부분 중에서도 후대의 학자들에게 위작(僞作)이거나 가공된 내용이라고 비판을 받는 내용들이 있는데 이 장역시 그러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이욱(李郁)은 이 장의 가장 마지막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 장을 비판한다.
“이 장은 六言(육언), 六蔽(육폐)와 五美(오미), 四惡(사악) 등과 함께 모두 《論語(논어)》 앞뒤의 문체와 크게 서로 똑같지 않다(다르다).”
‘서로 똑같지 않다.’라고 완곡하게 해석하였지만 원문의 ‘사이비(似而非)’라는 의미를 감안한다면 그가 이 장을 공자의 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명확해 보인다. 전에 몇 번 고문(古文)에서 ‘사이비(似而非)’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가혹한 비판인지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기에 이욱이 이 장을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을 기분이 충분히 느껴지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주자는 이 장의 가르침 역시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경계 안에서 충실하게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이 다섯 가지를 행하면 마음이 보존되고 이치가 얻어질 것이다. ‘천하에〔於天下(어천하)〕’라는 것은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비록 夷狄(이적)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씀과 같다. 다섯 가지의 조목은 子張(자장)의 부족한 점을 인하여 말씀하신 것일 뿐이 다. ‘任(임)’은 의지하고 믿는 것이다. 또 그 효험이 이와 같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장에 대한 후대 고증학자들의 진위여부 비판과는 별도로, 이 가르침이 공자의 기존 인(仁)에 대한 정의나 가치관을 해하는 내용이라고 할 것은 아니므로 공자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면 도대체 이 장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하자.
이 장의 다섯 가지 개념은 그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일정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유기적 인간관계를 운용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공손하면 남이 나를 모욕하지 않는다.(恭則不侮)’는 첫 번째 설명부터가 개인적인 수양과는 거리를 두고 출발한다는 전제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논어(論語)>에서 무언가 항목화하여 설명하는 방식의 가르침을 분석할 때는 그것이 점층적으로 커져가는 강조방식을 취하는지, 똑같은 비중을 둔 나열방식으로 설명하는 순서에 큰 차이가 없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묘한 차이이기는 하겠지만, 가장 먼저 언급하거나 가장 강조하는 항목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도 나열식 설명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장에서 주목할 바는 가장 먼저 등장하고 설명되는 개념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恭’이라는 개념이다. 뒤의 설명방식에서도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장의 다섯 가지는 나열식이 아닌 연쇄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시작점은 ‘恭’ 에서부터이다. 앞서 공부했던 내용들을 통해 공자가 ‘恭’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면, ‘안연(顔淵) 편’에서 ‘문밖에 나가 사람을 대할 때는 큰손님을 대접하듯이 공손히 하고, 백성을 부릴 적에는 큰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공경히 해야 한다’고 한 것이나, ‘자로(子路) 편’에서 ‘평상시 집에 거처할 때도 공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한 것이 좋은 참고가 된다.
즉, 공자에게 있어 ‘恭’의 개념은 개인적인 수양이 밖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을 대함으로서 그 수양의 영향력이 파급을 미치고 상호관계를 통해 그 부분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독특한 개념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 지레 이러한 해설에 감탄할 필요는 없다. 이미 수백년 전이던 조선 인조 때의 조익(趙翼)은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을 이미 깨닫고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서재이름을 ‘공재(恭齋)’라 짓고 그 의미를 기리기 위해 <恭齋說>이라는 글까지 남긴 바 있으니 나는 그저 선배들의 공부를 눈동냥 귀동냥으로 주워 들어 겨우 흉내 내며 공부하는 말학(末學)에 지나지 않을 뿐인 존재이다.
조익(趙翼)은 그 글을 통해 ‘천하의 도는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한다.’라고 공자가 왜 ‘공(恭)’을 강조하고 이 장에서 왜 그것이 가장 첫 시작이자 사회를 바르게 세우는 데 있어 촉매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가 설명한 가장 가까운 것이란 자신의 용모를 삼가여 갖추는 일이고, 그 용모를 제대로 갖추려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성형외과를 기웃거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삼가는 공손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장에서의 다섯 가지 개념인 ‘恭寬信敏惠’는 마음의 덕목으로 볼 수도 있고 仁政의 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 앞서 내가 ‘恭’을 설명하면서 개인적인 수양이 인간관계를 통해 사적 영역에서 공적인 관계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그것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수양이 충분히 쌓여 그것이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 드러나는 것도 맞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갈등을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다시 들여다보는 역방향의 수양방식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공부를 준비하지 않고서 시험을 볼 수 없다고 끊임없이 시험을 준비만 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성적향상을 노력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고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서 그 시험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겠다고 시험에 응시하는 뇌가 없는 뻔뻔한 자도 있겠으나, 시험을 충분히 준비했다고 여기더라도 자신의 준비가 어디가 부족한지 그리고 어떻게 시험에 준비해야 하는지를 시험에 응시하지 않고서 내내 준비만 하는 방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시험도 그러할진대, 인생의 과정을 그리고 자신을 완성된 인격체로 다듬어가는 평생의 공부를 하면서 오로지 자신만 완성하면 된다는 식으로 책만 읽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는 것은 공자가 그토록 경계했던 잘못된 은자(隱者)의 길을 택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공부의 시작은 자신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하고 도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나를 바로잡음을 기본으로 하여 내 주변을 시작으로 사회의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올바르게 고쳐나가고 변화시켜 나감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 이 장에는 담겨 있다.
이 장의 행간에 담겨있는 공자의 이러한 큰 뜻을 파악한 장경부(張栻(장식))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능히 이 다섯 가지를 천하에 행한다면 그 마음이 공평하고 두루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손함이 근본일 것이다.”
내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그것을 한 손에 쥔 아이가 행복해하며 사탕을 입에 넣는 순간, 다시 먹음직스러운 도넛을 주면 아이는 사탕을 입에 넣기도 전에 다른 빈손으로 냉큼 도넛을 받아 쥔다. 여기까지는 아이도 행복하고 주는 사람도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다시 도넛을 먹을지 사탕을 먹을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아이에게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주게 되면 이제 아이는 행복했던 표정을 곤란한 표정으로 바꿔지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기 시작한다. 손은 두 개뿐인데, 눈앞에 보이는 저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받으려면 아직 한 입도 베어 물지 못한 도넛을 내려놓거나 막 달콤함을 입안에 남겨둔 사탕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행여 과감하게 아이스크림의 유혹에 마음이 동하여 그것을 먼저 잡겠다고 사탕을 손에서 놓기라고 한 순간,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채 손에 쥐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져 흙이 범벅이 되어버린 사탕을 보며 눈앞에 흐려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본능에 자신도 모르게 사탕을 놓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탕을 포기할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웃픈 상황이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 아이에게만 한정된 상황이라 생각하는가?
사탕이나 도넛, 아이스크림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입장에서 배가 고파 그 어떤 것이라고 먹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여기던 거지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정을 받아, 밥을 먹게 되고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받게 되면 처음에 고마웠던 마음에서 바로 사특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당장 배가 고파 끼니도 해결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그러한 것을 제공한 이의 따스한 온정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할 것을 생각함이 인간 된 도리라고 도덕책이나 성경에는 적혀 있지만, 그의 사악한 본능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이의 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동화적이고 은유적인 비유에 당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만 들렸나?
아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가 군부독재의 말도 안 되는 나라 상황에 이제까지 몰랐던 사회현실에 눈을 뜨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염병을 만들고 옆에서 백골단에게 짓밟히던 연약한 여학생을 보며 눈이 뒤집혀 날아 차기를 하던 젊은이가 구치소에 끌려가게 되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겠다며 친구들과 뜻을 합쳐 총학생회에 들어가고 그렇게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정치판까지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뭐 역사적 흐름이 그러했으니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누군가의 보좌관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 그것이 자신이 먹고사는 일이 되면서, 그리고 억울함에 의원실에 달려온 사람들의 매달림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하면서 의원실을 드나드는 기레기들과 어울리며 의원실에 도움이 되는 보도자료를 위주로 민원을 살피게 되고, 자신이 믿고 따르던 선배 정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비리를 덮고 처리하는 하청인으로 전락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스스로 자위하기를 ‘나는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청춘이 있다’며 최면을 건다.
정치후원금을 챙기려고 비문투성이의 글을 저서랍시고 시집이니 책이니 내는 선배 정치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자신도 포트폴리오를 만들겠다며 경력을 위해 비문투성이의 글을 같잖은 책을 준비하고, 지자체가 활성화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랍시고 시의원 구의원 자리가 마련되니 목소리 큰 동네 아줌마나 재건축 위원장들도 설치는 판인데 정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자신에게 한 자리 공천해 달라며 술자리에서 비벼대어 그렇게 시의원, 구의원 자리에서 시작해서 기어코 국회에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호칭이 의원님으로 바뀌면서 태도도 바뀌기 시작한다. 자기 자식이 하필이면 공부를 못해서 명문대학은 고사하고 사법고시조차 시도할 수 없을 것 같은 망작(?)이어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보고 듣고 익힌 대로 스펙을 만들어주고 인맥을 동원하여 의전원에 넣고 로스쿨에 넣고, 능력이 부족해도 동기, 선후배의 병원이나 로펌에 패 돌리듯 서로 품앗이 취업을 시켜 그렇게 그렇게 썩어 들어간다.
그렇게 그들은 그 자신이 사회를 좀먹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부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범이 돼라 강요하고 자기 부모와 자식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가르치기는커녕, 누구나 그렇게 하는데 문제 될 것이 없다며 후안무치를 가르치는 사회악의 주범이 되고 만다. 당신이 정치인이 아니라고 강남에 아파트 하나 없는 소시민이라며 그들과 다르다고, 당신은 양심껏 공손함을 시작으로 바르게 산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