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이해하려 하지도 않으며 사욕에만 혈안인 자들에게
佛肸召, 子欲往. 子路曰: “昔者, 由也聞諸夫子曰: ‘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肸以中牟畔, 子之往也如之何?”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 ‘堅乎磨而不磷?’ 不曰: ‘白乎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佛肹이 부르자, 孔子께서 가려고 하셨다. 子路가 말하였다. “옛날에 제(由)가 夫子께 들으니, ‘직접 그 몸에 不善을 한 자는 君子가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佛肹이 지금 中牟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夫子께서 가려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러한 말을 했었다. 〈그러나〉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찌 뒤웅박과 같아서 한 곳에만 매달려 있어 먹지 못하는 것과 같겠는가.”
이 장에서는 앞서 5장에서는 살펴보았던 사례와 거의 유사한 상황과 문답을 그려내고 있다. 앞서 5장에서는, 노(魯) 나라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던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비읍(費邑)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영입하려 하자 공자가 이에 응하려고 했다. 이에 제자 자로(子路)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고 따지자 공자는 魯나라에 서주(西周)의 도를 일으키겠노라는 뜻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번 장에서는 인물이 필힐(佛肹)이라는 이로 바뀌었을 뿐, 상황은 같다. 이 인물과 당시 상황에 대해 주자는 간략히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필힐(佛肹)은 진나라 대부 조 씨(趙簡子(조간자))의 中牟(중모) 땅 邑宰(읍재)이다.
이번에도 역시 자로(子路)가, ‘직접 그 몸에 不善을 한 자는 君子가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언급하며 불편한 심기를 질문으로 드러낸다. 이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앞서 공부했던 장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로(子路)는 필힐(佛肹)이 夫子를 더럽힐까 걱정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물어 父子(부자)의 가심을 저지하려 한 것이다. ‘親(친)’은 自(자, 직접)와 같다. ‘不入(불입)’은 그 黨(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는 내용은, 앞서 공자가 보여주었던 주군이 누가 되었든 간에 자신의 정치를 펼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겠다는 내용과 약간 결을 달리 한 표현으로 그 핵심을 강조한다. 자신이 확고한 사람이라면 설사 주군으로 삼는 이가 부족하고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에 물들지 않고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펼칠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공자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磷(린)’은 얇아지는 것이고 ‘涅(열)’은 검은 물을 들이는 물건이니, 남의 불선(不善)이 나를 더럽힐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단순히 불선(不善)함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단계가 어떤 경지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경지에도 이르지 못한 자들이 자만하여 자신의 부정함을 구차하게 변명하려는 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양 씨(楊時(양시))가 던진다.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은 뒤에야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을 수 있는 것이니, 만약 단단함과 흼이 부족하면서 스스로 갈고 물들여지는 데에 시험하려고 한다면 얇아지고 검어지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보았던 5장과 달리 이 장에서는 공자가 마지막 문장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내가 어찌 뒤웅박과 같아서 한 곳에만 매달려 있어 먹지 못하는 것과 같겠는가.”
언뜻 처음 듣기에는 한 번에 쉽게 이해하기 다소 어려움이 있는 이 마지막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연한다.
‘匏(포)’는 뒤웅박이다. 뒤웅박은 한 곳에 매달려 있어 마시고 먹지 못하지만 사람은 이와 같지 않은 것이다.
간략하게 이 뜻을 설명하자면, 박은 그저 식물이라서 매달려 있어도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야 하거나 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이니 자신이 능동적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무언가 행동해야 함에 방점을 찍는 변명 아닌 자신의 변(辨)을 정리한 것이다.
이 마지막 일갈이 앞서 5장과 다르다고 한 부분은, 구체적으로 공자가 자신이 천하를 바로잡기 위해 그 무엇이든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에 첫 번째 방점이 있다. 공자에게 있어 수동적으로 가만히 매달려있으며 영양분을 공급받는 박은 은자(隱者)를 자처하며 자신 한 사람의 지조만을 지키겠다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5장에서 여러 후대 학자들이 그 내용에 대해 진위여부를 의심하며 공자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고 의심했던 바와 같이 이 장의 역사적 고증문제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후대학자들은 잘못된 편입으로 들어가게 된 조작된 내용으로 이 장을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필힐이 난을 일으켰다는 시기는 노나라 哀公(애공) 5년, 공자의 나이 63세 때 일이었다. 그해 여름에 진(晉) 나라의 조간자(趙簡子)가 범인(范寅)의 세력을 꺾기 위해 위나라를 토벌하고, 범 씨의 힘이 뻗쳐있던 진나라의 변읍(邊邑)인 중모(中牟)를 포위하였다. 이때 조간자의 가신이던 필힐이 중모(中牟)의 읍재로 있었는데, 중모(中牟)를 근거지로 조간자에게 반기를 들었다. 필힐이 공자를 영입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그 사단이 벌어지기 2년여 즈음부터 조간자(趙簡子)는 당시 진(晉)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필힐의 난이 벌어져 그가 공자를 청하기 전에 조간자(趙簡子)가 이미 2년 전이던 그 시기에 공자를 영입하기 위한 제안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위(衛) 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는 노쇠한 영공(靈公)이 정치에 열의라고는 보이지 않고 자신을 등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위나라에서의 노력을 접고 실제로 조간자(趙簡子)에게 의탁할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그런데 위(衛) 나라에서 진(晉) 나라로 가려면 황하를 건너야만 했다. 공자 일행이 황하를 건너기 위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극적(?)으로, 조간자가 진나라의 어진 대부였던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 이 두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눈앞의 황하에 다가가 강물줄기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저 출렁대는 물이여! 내가 저 물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운명이로다.”
야사(野史)에 전하는 호사가(好事家)들의 말에 의하면, 천하를 쟁패하고자 했던 조간자(趙簡子)의 큰 야망은 조나라의 두명독(竇鳴犢)과 진나라의 순화(舜華), 그리고 노나라의 공자(孔子), 이렇게 세 걸출한 인물들만 죽여버리면 아무도 자신의 야망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순차적으로 앞서 두 인물을 제거하고 공자도 마지막으로 제거할 생각으로 영입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공자에게 영입을 제안하여 예를 갖춰 모시는 것처럼 한 뒤에, 황하를 건너는 배에서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앞서 두 인물들이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가 발길을 돌리며 그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전한다.
내가 굳이 필힐에게 가려던 공자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전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앞의 5장에 대한 진위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그 사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자의 행동이 갖는 의미를 풀이했던 것과 같이, 그저 자로(子路)의 말만 듣고서 공자가 경거망동(輕擧妄動)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조간자(趙簡子)와 있었던 일의 진위여부가 100%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해야 하겠지만, 그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공자는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던 조간자(趙簡子)에게 좋은 감정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조간자(趙簡子)에게 반기를 든 필힐이 조간자(趙簡子)를 제거하겠다고 대의명분을 세웠다면 최소한 공자에게는 필힐의 명분을 들어보고 판단할 계기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조간자(趙簡子)가 이전에 벌였던 불선(不善)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실적 근거가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킨 필힐의 반란은 들어볼 만한 대의명분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될 여지가 아주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상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자신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는 박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마지막 일갈은 공자의 당시 마음이 얼마나 절박했는지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 장의 상황이 벌어진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나이가 환갑을 넘긴 63세 때의 일이었다.
조국에서 쫓겨나듯 노나라를 떠나 천하주유를 한지 햇수로는 이미 8년이 지나던 시기였다. 양화(陽貨)를 만났던 때가 48세, 공산불요와의 일이 있었던 것이 50세였는데, 그렇게 공자의 초조함이 절정에 달했던 정점이 위령공(衛靈公) 때의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서도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어 조간자(趙簡子)에게까지 가려하였는데 암살당할 위기까지 감지했다면 이제 공자의 입장에서는 나이 예순을 넘어 자신의 인생이 결국 아무것도 이뤄놓지 못한 채 사그라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고뇌가 컸을 시기라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공자는 필힐에게도 그의 몸을 기탁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사적 논평이나 사실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공자에게는 공자만의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종합적인 분석 끝에 공자는 필힐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분통을 터뜨렸던 자로(子路)의 말에 따랐던 것이 아님은 <논어(論語)>를 공부하고 조금이라도 공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파악한 학도라면 이해할 것이다. 오히려 당시 모든 스승의 행동에 동행하며 사실관계 및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자로(子路)의 반발이 도리어 좀 더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그러한 사실을 하나하나 다혈질의 제자에게 설명할 수 없었던 공자의 답답함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유추했던 장경부(張栻(장식))는 후학들이 섣불리 그 내용을 오독하고 오해를 만들까 싶어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깊은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자로가 예전에 들었던 것은 군자가 몸을 지키는 떳떳한 법이요, 夫子(부자)께서 금일에 하신 말씀은 성인이 도를 체행하는 큰 權道(권도)이다. 그러나 부자께서 公山弗擾(공산불요)와 필힐의 부름에 모두 가려고 하셨던 것은 천하에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며, 끝내 가시지 않은 것은 이 사람을 끝내 변화시킬 수 없고 일을 끝내 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니, 하나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仁(인)이고 하나는 남을 알아보는 지혜이다.”
이 마지막 주석에서 방점은 역시 마지막 문장에 있다. 장경부(張栻(장식))를 위시한 선배 학자들은 이미 사실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 판단을 하기 위해 얼마나 다각적인 분석과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것인지 짧지만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식구끼리도 별것 아닌 이익 때문에 의절하네 집안싸움을 벌이네 하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천륜을 거스른 범죄가 아무렇지도 않게 터져 뉴스에조차 다뤄지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무너져버렸는가에 대해 분석하고 논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왜냐고 묻고 싶나? 당신이나 그들이 과연 그 원인을 모르고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사는지를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