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란 말이다.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對曰: “未也.” “居!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由야, 너는 六言과 六蔽를 들었느냐?” 하시자, 〈子路가〉 대답하였다.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앉거라. 내 너에게 말해 주리라. 仁만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가리어짐)이 어리석게 되고〔愚〕, 지혜〔智〕만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방탕하게 되고〔蕩〕, 믿음〔信〕만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해치게 되고〔賊〕, 정직함〔直〕만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급하게 되고〔絞〕, 용맹〔勇〕만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亂을 일으키게 되고〔亂〕, 剛한 것만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경솔하게 된다.〔狂〕”
이 장은 그 유명한 路에게 ‘육언육폐(六言六蔽)’에 대한 가르침이다. 앞서 공자의 가르침이 아닌 편집자가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찬입(竄入)해서 넣은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내용과 마찬가지로 같은 의심을 받는 장이기도 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공자의 평소 가르칠 때의 어투와 그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평소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았던 자로(子路)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하기 위해 택한 방식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仁, 知, 信, 直, 勇, 剛의 六言도 학문을 깊이 탐구하여 그 바름을 얻지 못하게 되면, 각각 愚, 蕩, 賊, 絞, 亂, 狂의 六蔽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한 내용이다. 六蔽에서 ‘蔽’의 의미에 대해 주자는 ‘가리움’이라 설명한다.
한편, 원문에 보면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居, 吾語女.(앉거라. 내 너에게 말해 주리라.)“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예에 군자가 질문할 때에 그 단서(話題(화제))를 바꾸면 일어나 대답한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자로에게 말씀하여 다시 앉게 하고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본래 이 표현은 일종이 상투어구로 자리 잡은 말로, 스승이 제자에게 본격적인 훈시를 시작하기에 앞서 의례적인 행동으로, 본래 은(殷) 나라의 왕족 정년집단에 장로(長老)가 훈시를 내릴 때 취했던 일종의 격식으로 삼았던 것이 전국시대에 공자의 방식을 흉내 내며 일어났던 제자백사들의 사숙(私塾)들이 일종의 교과서처럼 답습하기 시작했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六言과 六蔽에 대한 공자의 설명은 사실 원문에 드러내놓고 있듯이 그 방점이 제대로 된 배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부분에 찍혀 있다. 다시 말해, 六言과 六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 필요한, 진정한 앎을 위한 노력과 수양, 그리고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왜 뜬금없이(?) 제대로 된 공부와 실천, 그리고 수양에 대한 것들이 강조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다. 이 의구심에 대한 해답을 찾는 실마리는, 공자가 이 설명을 해준 대상이, 다혈질이자 평소 善言善行을 보면 곧바로 받아들이고 義理에 용맹했으나 학문에는 좀처럼 깊이가 없어 폐해(弊害)에 빠질 우려가 있었던 자로(子路)였다는 점에 있다.
이미 우직하게 스승에게 들은 훌륭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언제든 바로 실천하고 그날을 넘기지 않으려는 단호함을 보였던 자로(子路)에게 굳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 범할 수 있는 실수와 폐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공자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이 장의 내용에는 담겨 있다.
다시 말해, 六言이라는 훌륭한 개념이 있는 것을 알면 자로(子路) 같은 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행하겠다고 당장 덤벼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고 분석해 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공부가 바탕이 되어 명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은 이상, 결국 그것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을 넘어 六蔽라는 실수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하면 어떻게 된다는 설명이 아닌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에 어떤 폐단이 있게 될지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고서 행하는 이에게 굳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를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가르침의 대상이 자로(子路)라는 점은 그가 그 부분이 부족했고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 여겼기에 六蔽라는 설명을 통해 그가 잘못했을 경우 어떤 곤란한 점이 생기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기존 공자의 은미하게 설명하는 가르침의 방식과 다소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 장이 단순한 찬입(竄入)이라는 의심 아닌 의심도 받게 된 것이라 추정된다.
그래서 六言과 六蔽에 대한 공자의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그 핵심을 정리한다.
六言(육언)은 모두 아름다운 덕이다. 그러나 한갓 좋아하기만 하고, 배워서 그 이치를 밝히지 않으면 각각 가리어지는 폐단이 있다. ‘愚(우)’는 함정에 빠뜨릴 수 있고 속일 수 있는 것과 같은 류이고, ‘蕩(탕)’은 높은 것을 다하고 넓은 것을 다하여 그치는 곳이 없음을 이르고, ‘賊(적)’은 물건을 상해함을 이른다. ‘勇(용)’은 강의 발로이고, ‘剛(강)’은 용의 體(체)이다. ‘狂(광)’은 조급하고 경솔한 것이다.
자로(子路)를 위한 맞춤 가르침이라는 사실은 이 장의 개념들이 차지한 순서를 보면 다시 한번 공자의 세심한 배려가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았음을 재확인시켜준다. 다혈질의 자로(子路)가 가장 끌리고 좋아했을 개념을 굳이 六言 중에서 찾아보자면, 直, 勇, 剛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 개념들은 자로(子路)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미 갖추었다고 여겼을 확률이 낮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놓인 仁, 知, 信은 자로(子路)를 비롯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일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그 부분들이 먼저 선행되어야 함을 자로(子路)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공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냈던 범 씨(范祖禹(범조우))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자로(子路)는 善(선)을 행하는 데에 용감하였으나 그의 결함은 배움을 좋아하여 그 이치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勇(용), 剛(강), 信(신), 直(직)은 또 모두 그의 치우친 점을 바로잡아 주신 것이다.”
뒤의 네 가지 개념들에만 너무 경도되었던, 그리고 그나마도 제대로 그 본질을 이해한 것이 아닌 겉만 흉내 내는 형태에 그치지 않았던 자로(子路)에게 스승 공자는 그렇게 이제까지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스스로의 한계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라는 경고와 조언을 그가 겪게 될 폐단으로 설명해 준 것이 바로 이 장의 가르침이 갖는 본질이다.
‘호학(好學; 배우기를 좋아하게 되면)’이라는 단서로 설명되는 이 여섯 가지의 이어짐은 자세히 보면 단순히 배움이나 실천, 혹은 수양의 부분만을 강조한 것만은 아니다.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배우고 익혀 제대로 알면’의 의미 외에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 껍데기만을 숭앙하고 자랑하고 내세우다보면’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겸비하고 중용(中庸)의 실질적인 의미를 조화롭게 이루어낼 수 있는 경지까지의 노력을 잊지 말라는 조언에 다름 아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그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인(仁)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저 좋아만 하고 그것을 배우고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어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리석게 된다고 하였다. 어리석다는 실제로 다음 항목인 지(知)와 오히려 더 밀접한 관련이 있을 법한데, 인(仁)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왜 어리석다는 폐단을 지적했던 것일까?
생각건대, 인(仁)의 개념은 사람을 배려하고 인정하며 포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마음만 갖추고자 한다면 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을 넘어 결국 자신의 일은 물론 큰일을 도모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 총체적 난국을 한 마디로 정리한 단어는 ‘어리석다’인 것이다.
어리석다의 반대개념일 수 있는 지(智)에 대해 설명하면서는, 그것을 좋아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엉터리 지식꾼이 되어버리고 만다고 설명한다. 타고난 지혜로움은 결코 계속해서 배워나가는 이의 노력을 이길 수 없다. 많이 아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아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총명함을 믿고 약삭빠르게 눈치를 보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하고 그렇게 배워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배운 것처럼 티를 내고 싶은 자는 텅 빈 수레를 계속 흔들며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잘 알지 못하고 무식하면 차라리 조용히 입 다물고 더 배우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삼가는 마음을 가져도 부족할 판에 대개 그렇게 분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른 자들은 자신이 많이 가지고 있는 척을 하고 싶어 한다.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가지고 있는 척 연기를 하고 거짓을 꾸며대기 시작하면 언제고 그 시한폭탄은 터지고 만다. 대개 그 폭탄은 거짓된 허장성세를 벌인 자가 가장 치명상을 입기 좋을 때, 가장 심각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때 터지기 마련이다.
‘믿음’으로 설명되는 ‘신(信)’의 본질과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껍데기만 좋아하게 되면 너무 진지해져 융통성을 잃게 된다는 의미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던 원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실에 대해 냉철한 이성을 통해 명확한 분석을 하지 않는다면 그저 고지식한 고집쟁이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바름’을 의미하는 ‘직(直)’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대로 그 이치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생기는 폐단을 편협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역시 위와 같은 이유이다. 용(勇)과 강(剛)에 대한 설명도 비슷한 설명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 행간의 의미에 대해 조금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앞서 위작이 아니냐고까지 의심받았던 장에서 공자가 보여주었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 필요한 다양한 정보에 대한 파악과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요리재료가 있더라도 그 요리 재료가 본래 가지고 있는 맛을 살리는 이론과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요리는 고사하고 그 재료들을 손질하는 데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는 말처럼 먹어보지 않고 다뤄보지도 않은 재료들을 가지고 멋진 요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
직접 보면서 내 입에 들어가는 요리들도 그러할진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대단한 개념들은 그 사람이 그것을 갖추었는지를 파악하기도 어렵지만 정말로 그 개념을 궁행실천(躬行實踐)하는 이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훌륭한 개념들에 대해서 좋아하고 그것을 선호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일 수 있다. 공자가 이 장을 통해 자로(子路)를 필두로 한 배우는 자들, 혹은 일반인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배려 깊은 가르침은 결국 실제로 보고 듣고 확인하고 배우고 익혀서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막연하게 남에게 듣기만 하고 책에 나온 훌륭한 내용을 밑줄치고 필사만 해서는 결코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호된 죽비이다.
국회의원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만 한다는 한심한 제안을 하는 국회의원의 정신머리가 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을 속 시원하게 후려치며 국회의원은 지금의 절반정도로 줄여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며 오히려 지금의 문제는 그 썩은 국회의원들이 너무도 많아서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이다 발언은 백번 옳은 지적이고 맞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말을 한 자가, 깡패가 자신을 위협하는 게 두려워 권력을 택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나라가 썩어 들어갈 때 정작 자신이 국회의원으로 당대표로 그 복마전을 이끄는 자였다면 그 말이 아무리 옳더라도 울림은 결코 커질 수가 없다. 그의 삶이, 그 발언을 오롯이 지탱하기에는 턱없이 얄팍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책을 읽으며, 훌륭한 성현의 가르침을 형광펜으로 칠하고 포스트잇에 필사하고 아예 매일 새벽 노트에 필사를 해내간다고 해서 온전히 그것이 당신의 삶이 될 수 없다. 결국 그것이 좋다고 동경하고 있어 보인다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삶에 투영하여 실천하지 않는 이상, 공허한 말장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