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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은 결코 박학다식한 이들의 저작이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 누구도 무시 못할 목소리가 담겨 있다.

by 발검무적
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孔子께서 伯魚에게 이르셨다. “너는 〈周南〉과 〈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周南〉과 〈召南〉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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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앞에서 공부했던 내용에 이어 <시경(詩經)>을 공부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강조하는 일화를 담아내고 있다. 이미 그에 앞서 ‘계씨(季氏) 편’의 13장에서 공자는 아들 백어(伯魚)가 시를 배우지 않은 사실을 알고서 ‘<시경(詩經)>을 배우지 않으면 남을 應待(응대)할 때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꾸짖은 바가 있기에 아버지의 입장으로도, 먼저 학습의 길을 걸었던 선배이자 스승의 입장으로도 일관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경(詩經)>이 어떤 책인지 공부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위 원문에서처럼 <시경(詩經)>이라는 고유명사를 쓰지 않고 〈周南〉과 〈召南〉이라는 구체적인 편명을 들어 말한 탓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런 의문을 맞닥뜨릴 초심자들을 위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爲(위)’는 學(학)과 같다. 〈周南(주남)〉과 〈召南(소남)〉은 《詩經(시경)》의 첫머리 편명인데, 그 내용이 모두 자기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이다. ‘담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다.’는 것은 지극히 가까운 곳에 나아가서 한 물건도 보이는 것이 없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가 <시경(詩經)>이라는 표현 대신에 〈周南(주남)〉과 〈召南(소남)〉이라 표현한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처음 등장하는 편명을 언급하여 <시경(詩經)>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에게 권계를 주기 위한 중의적인 은미함을 담아내며 그 전체를 대표하여 언급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참고를 위해 소개하자면, 다산(茶山; 정약용)은 그 이유에 대해, 시가 아닌 음악성을 강조하였다고 음악공부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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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5 수인 〈周南(주남)〉과 〈召南(소남)〉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편집과 설명의 시각이 대개 도덕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어, 자기 몸을 바르게 닦고 자기 가정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일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 25수의 시들은 대개 남녀와 부부의 일을 소재로 삼아 남녀의 정을 솔직하게 노래했다고 보는 쪽에 무게를 더 두는 견해들도 있다.


단순하게 한 가지 메시지만으로 하나의 색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공자의 가르침이 갖는 특성상, 이 두 가지를 내용을 모두 종합적으로 판단하건대, 아마도 공자는 이 시를 읽고 공부한 이들이 세상에 올바른 도리를 행하여 남녀 간의 애정적인 주제라 하더라도 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음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높게 평가한 시각이 엿보인다.


또, 주석의 후반부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장에서 공자는 독특한 비유, ‘담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다.’는 표현을 구사하였는데 그 설명에 방점이 있음을 설명에서 잊지 않는다. 굳이 현대어로 설명하자면 ‘담장’의 해석은 말 그대로 ‘벽’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말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지 중간에 높고 견고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제대로 한 걸음 나아갈 수조차 없는 상황임을 역설한 비유에 다름 아니다. 이는 그전에 백어(伯魚)에게 설명했던 <시경(詩經)>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말조차도 제대로 전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비유적으로 완곡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사대부 어쩌고 주자학 어쩌고 떠들어댔던 조선시대의 정치꾼들이 비틀어서 가두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지금 이 내용만 보더라도 공자의 순수한 성정에 대한 인정과 표현방식에 대한 솔직함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의도가 얼마나 왜곡되고 조작되었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기에 아주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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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본연의 감정이랄 수 있는 남녀 간의 감정을 비롯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여과 없이 표현하는 거친 노래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토로의 한 방식이라면 그것만한 문학은 없다는 것이 공자의 문학관이고 음악관이었으며 학문관이었다.


제대로 배우고 많이 알고 지식적인 부분이 얼마나 많이 쌓여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로한 거친 서민들의 노래를 읽고 듣고 함께 공감하고 그 안에 오롯이 담겨 있는 감성을 길어낼 수 없다면 그것은 공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무엇보다 그렇지 않은 수많은 백성들을 어루만질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공자의 일침임을 이 장은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공자가 칠순을 앞두고 있던 69세의 그 해에, 아들 백어(伯魚)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가 느꼈을 단장(斷腸)의 심정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마는, 공자는 그 슬픔과 아쉬움을 백어(伯魚)의 아들이던 자신의 손자였던 자사(子思)를 통해 어루만져야만 했다. 앞에서 한번 간략히 설명하긴 했지만, 자사(子思)는 증자(曾子)에게서 사사(師事)하였고, 후에 노나라 목공(穆公)의 스승까지 된 인물이다. 특히 그의 학술과 수양의 정점은 조부였던 공자의 덕을 드러내기 위해 <중용(中庸)>을 저술한 것으로 완성(?)된다.


혹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 장의 대화는 아들 백어(伯魚)가 결혼하기 직전에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을 전한 것이라고 하여 공자가 <시경(詩經)>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재차 삼차 강조한 것만으로도 기본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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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그런 관심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이 배우고 익힌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더 많이 익힌 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이치상으로도 합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당연한 사실들은 현실에서 전혀 정반대의 결과로 표출되고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어이없는 자들을 수도 없이 목도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벌어지곤 한다. 조금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운전을 더 잘하는 사람이 초보운전인 사람들을 피해하고 안전운전을 하고 방어운전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리 운전을 썩 잘하지도 않은 이들이 초보 딱지를 큼지막하게 써붙인 차들을 보며 비아냥거리고 빵빵거리고 오히려 더 무시하고 윽박지르며 욕설까지 서슴지 않는다. 더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그저 그들에게 과연 깜빡이조차 제대로 켜지 못해 끼어들지 못했던 초보시절이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굳이 올챙이 적 시절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공감할만한 이야기이다.


위 사례의 행간에서도 이미 눈치챈 학도들이 있겠지만, 언제나 서툴기 그지없이 시끄러운 잡음을 만들어내고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언행을 서슴지 않아 갈등을 조장하는 자들은 언제나 고수(高手)가 아닌 어설픈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레이싱을 하고, 특별한 운전면허를 가지고 운전을 한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베테랑들이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지 못한 초보들에게 욕설을 내뱉고 소리를 지르며 클락숀을 눌러대는 모습을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문리(文理)가 트여 지금은 현대어로 사용하지도 않는 한문 고문(古文)을 술술 읽는 학자가 한문으로 된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궁금해하는 일반인에게 핀잔을 주거나 왜 이런 간단한 것도 읽지 못하느냐며 면박을 주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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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그런 일들은 이제 운전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으면서, 그것도 제대로 정식 운전 훈련을 받거나 레이싱은커녕 서킷에서 운전대를 잡아보지도 않은 어설픈 자들이 그저 ‘초보’라고 써붙인 종이를 보며 자신보다 한참 밑이라고 무시하고 얕잡아보려는 마음이 슬금거리고 동할 뿐이다. 그 흔한 한정식 집에 걸려 있는 초서로 휘갈겨 쓴 뜻 모를 병풍의 문구를 보며 진정한 학자라면 자연스럽게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읽고 설명해 줄지언정 그런 것도 모르냐며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수영 국가대표선수가 휴양지에 놀러 가 호텔 풀장에서 훈련 때처럼 다이빙 입수를 하고 가열하게 수영을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란 말이다.


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뭔가 허장성세를 과시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이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고 충분한 위치에 올라본 적이 없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허접하고 알량한 것들이 대단한 것임을 어떻게든 알리고 떠벌여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가장 좋은 경우는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있는 자가 아닌 전혀 그렇지 않은 자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으로 심리적 불안감을 우월감으로 환치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정신의학적으로 그런 형태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완곡하게 말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아직 인격이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어린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나 스승이 그러한 부분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졸하기 그지없는 것인가를 일러주어야만 하는데 이미 인격이 완성되었어야 할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제대로 집에서나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지 못하여 나이 먹어서까지 추잡하기 그지없는 언행을 반복한다면 그것을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을 넘어 그 자식과 손자에게까지 대대손손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문학적 치명적 유전자를 남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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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장의 내용을 풀이하면서, 공자가 <시경(詩經)>을 반드시 먼저 공부해야 할 기본서로 꼽은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였다시피 <시경(詩經)>의 노래들은 제대로 공부하고 더 많이 공부한 식자층들이 지어낸 노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그 노래들을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다고 편집자의 독법이자 <시경(詩經)>을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설명하고 역설했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담겨 있다고 하였다.


이 장의 가르침에는 그 다양한 이유들 가운데에도, 가장 큰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법과 그렇게 표현된 감정이 기교가 좀 떨어지고 세련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방식과 내용은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특별히 다시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시경(詩經)>을 배우지 않고서는 더불어 말조차 할 수 없다는 의미에는 굉장히 다양한 다각도의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많이 배운 성현의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고 세련되고 정련된 언어의 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 배경과 행간에는 그럴만한 공자의 교육관과 가치관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요 며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국가수사본부장의 임명과 그의 부끄럽기 그지없는 자식의 사고처리를 보면서 나는 기레기들이 떠들어대는 문면의 글들보다 정말로 얄팍하기 그지없는 정치꾼들의 암투와 기레기들의 동조와 그들에게 여전히 휘둘리며 쉽사리 끓어오르고 금세 식어버리는 냄비 같은 국민성을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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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시즌2를 시작하게 될 <더 글로리>를 언급하며 그 인기몰이의 노이즈 마케팅을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제작사와 홍보팀도 그렇겠지만, 여지없이 편집칸 하나 찾아 먹겠다고 <더 글로리>를 인용하는 국회의원이나, 이미 5년 전에 공중파 뉴스를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보도되었던 당시 사건의 부당함에 대해 이제사 떠들어대는 기레기 언론이나 정치꾼들도 지금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가져야 할 본연의 책임의식은 그 어디에서도 한 줌 찾아볼 길이 없다.


검찰과 경찰의 첨예한 대립을 이야기로 다루며, 공전의 히트를 쳐 시즌2까지 제작되었던 <비밀의 숲>이라는 장르물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대통령과 함께 특수통 검찰 출신의 인물이 이른바 한국형 FBI라는 경찰특수조직의 수장을 맡게 되는 것에 불만을 대놓고 터트리던 경찰이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일을 당연히(?) 감행했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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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드라마를 한창 쓰던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드라마 제작의 시청자 눈높이는 언제나 중2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중2 수준의 지적 수준을 가진 드라마를 이해할만한 국민들이라면 이 코미디 같은 흑막의 전말을 굳이 해설을 통해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학폭사건이 불거졌던 5년 전, 문제의 인물은 중앙지검에서 그 이름도 대단한 ‘인권감독관’ 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어퍼컷을 쳐올리며 대통령이 된 이는 당시 중앙지검장이었으며 미국식 인사검증을 입에 담으며 문제의 인물과 연수원 동기였던, 법무부장관은 당시 같은 중앙지검 차장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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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이 버젓이 중앙지검의 직함과 함께 부적절한 행동으로 방송까지 탄 일에 대해 몰랐단다. 그들이 과연 이 장에서 강조한 <시경(詩經)>공부를 하지 않아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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