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겉치레가 전부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禮이다 禮이다 하지만 玉帛(옥과 폐백)을 이르겠는가. 樂이다 樂이다 하지만 鍾鼓(종과 북)를 이르겠는가.”
이 장에는 예악(禮樂)에 대한 공자의 가치관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는 비유가 묵직한 울림으로 담겨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예악(禮樂)이라는 것이 결국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상징되어 그것뿐이라 한정됨을 경계하고 정작 그 안에 담겨 있는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는 일갈이 여운을 남기는 장이기도 하다.
공자의 이 완곡하면서도 매섭기 그지없는 비유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안으로 공경하면서 玉帛(옥백)으로 받들면 예가 되고, 안으로 화하면서 鍾鼓(종고)로 나타내면 樂(악)이 된다. 그 근본(敬(경)과 和(화))을 빠뜨리고 오로지 그 끝(옥백과 종고)만을 일삼는다면 어찌 예 · 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존 주석의 해설방식과 달리, 첫 문장에서부터 어떻게 예악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풀이하는 방식이 이채로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방식의 방점은 안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을 강조하고 있는 점인데, 예(禮)에 있어서는 공경하는 마음이 안에 충만하여야 하며, 악(樂)에 있어서는 조화로움을 생각하는 마음이 충만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본래 옥백(玉帛)은 외교 관례에 있어 군주들이 서로 만나는 경우에 옥을 교환하던 예법에서 유래되었던 것인데, 그 옥을 반드시 아름다운 비단으로 포장했던 것을 포함하여 예법이라고 일컫는 것을 통칭한 것이다.
한편, 특정 악기의 연주를 통해 인간의 오감(五感)중에서도 청각을 자극하는 것을 중심으로,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동장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의 복장 등등 외재적인 것들이 만들어냈던 웅장한 분위기를 통칭하고 있다. 물론 공자가 가리키고 있는 종고(鐘鼓)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결코 귀에 들리거나 외재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설명하고 이해함에 있어 설명하려는 스승이나 그것을 이해해 보려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온전히 눈에 보이는 것처럼 파악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공자가 이 장에서 한탄한 것에 대해, 주자는 그 근본이 되는 마음은 이미 망각해 버린 채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귀에 들리는 소리만에 집착하여 그것이 오히려 근본이고 지켜야 할 본질인 것으로 오도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탄식하는 이유를 잊지 말라고 일러준다.
공경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여 마음은 생각한다고 하면서 행실에는 방만함으로 가득하여 공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음을 공자나 그것을 수양하고 실천해 본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굉장히 공경하는 듯하게 옷을 여미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듯 하지만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지키는 겉치레만으로 전락하게 되면 그 행동을 왜 하는가에 대한 본래 마음가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 형식만이 남아버리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네 제사 풍습을 들 수 있다. 며느리들에게 시월드 지옥을 선사한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시월드 지옥의 대표적인 노동이라는 제사는 말 그대로 전을 부치고 죽어라 주방에서 기름냄새를 맡아야 하는 노동의 일환으로 전락해 버렸을 뿐 그 제사가 갖는 의미 본질 자체를 경건하게 되새기며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마음을 기리는 것은 없어져버린 지 오래가 되어버렸다.
조선시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유교(儒敎)에서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해 버린 나머지 마치 유생(儒生)들이 모여 공자의 제사를 치르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얼마나 하나하나의 격식을 갖추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처럼, 정작 제사 당일 추모해야 할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음은 어디론가 휘발되어 버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제사음식을 제대로 갖추고 제사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몇 번을 절하고 수저와 젓가락을 어떻게 두는지에 대한 껍데기 형식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코 예의 본질이 아님을 공자는 이 장에서 역설한다.
그래서 공자가 탄식했던 당대의 한탄스러운 현실과 그 행간을 통해 공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가르침의 정수를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예는 하나의 질서〔序(서)〕이며 악은 하나의 조화〔和(화)〕이니, 다만 序(서)와 和(화) 이 두 글자가 많은 義理(의리)를 함축하고 있다. 천하에는 한 가지 사물도 예 · 악이 없는 것이 없으니, 우선 예를 들면 여기에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을 적에 하나가 바르지 않으면 곧 질서가 없는 것이고, 질서가 없으면 괴리되고, 괴리되면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 또 도적들은 지극히 부도덕하나 그들에게도 예 · 악이 있으니, 반드시 수령(두목)과 부하가 있어서 서로 명령을 들어 따라야만 도적질을 할 수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반란하여 기강이 없어서 단 하루도 서로 모여 도적질을 할 수가 없다. 예 · 악은 어느 곳이든 없는 곳이 없으니,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주석에 사용된 극단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사례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부도덕한 짓으로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들마저도 예악을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사는 곳, 그 어디에 예악이 없는 곳은 없다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재미있는 비유 직전에 든 또 하나의 비유도 간과하기 쉽지만, 이 세상에서 예악(禮樂)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강조한 것으로는 오히려 적실한 비유인 ‘두 개의 의자’ 이야기가 있다. 눈앞에 놓인 두 개의 의자 중에서 하나가 바르지 않으면 곧 질서가 없는 것이고, 질서가 없으면 괴리되고, 괴리되면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는 내용이 비유는 가장 중요한 바르고 바르지 않은 것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의자가 바르게 놓여 있는가에 대한 것은 눈에 보이는, 말 그대로 공자가 이 장에서 설명했던 사람들이 흔히 바로 보았을 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 의자만 보더라도 바르게 놓여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바로 정리하거나 세워두지 않게 되면 그 현상이 지속되는 법인데,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거나 보고서도 원래 그렇게 두는 것이려니 하는 식으로 방관하게 되면 그 무질서는 괴리를 낳게 되고 그것은 결국 조화로움을 깨뜨려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3월의 시작이던 삼일절 아침에 핸드폰의 메시지에 예고되었던 대로 무료 데이터가 30기가 제공되어 있었다. 현상적인 것을 생각해 보면, 코로나 정국에 사람들이 통신사의 데이터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이익이 증대했음에도 기존의 폭리(아마도 통신사에서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에 대해 언급하며 무언의 압박을 했던 대통령실의 압박성 발언이 알아서 기는 이와 같은 퍼포먼스로 이어졌다는 진상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다.
전기세와 가스요금을 올려 서민들이 요금 폭탄을 맞은 것에 대해 기레기 언론들이 마치 정부나 공기업의 보도자료를 뿌리듯이 한전이나 가스공사의 불가피한(?) 사정에 대해서 떠들어대며 역대 최고의 적자가 어떻다는 둥 결국 그 마이너스는 국민들이 메워야 한다는 둥 하는 뉴스를 보며 불쾌감이 상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죽는소리를 내며 대통령의 눈치만을 살피는 공기업들이 역대 최고의 흑자를 보며 말단 직원부터 임원들에게 돈잔치를 하던 그 시절, 그들은 결코 전기세나 가스요금을 획기적으로 내리지 않았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국제유가가 너무 오른다면서 폭리를 취하며 어마어마한 돈잔치를 해댄 정유사는 정부의 세금 혜택까지 등에 없고 최고의 수익을 올렸지만 다시 국제유가가 내려갈 때는 먼 산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얻은 혜택을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리가 전 세계적으로 인상된다면서 신나게 대출금리를 올려 지상최대의 돈잔치를 벌이던 은행권은 대놓고 대통령의 쓴소리를 듣고 나서야 직원들끼리 퍼주고 퍼내가던 돈잔치를 잠시 멈추며 머리를 풀섶에 박은 채 눈만 껌벅이며 눈치를 보고 있다. 그들의 이익을 대출금리 인하 등으로 서민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어떤 기획서에도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라. 당신이 그렇게 욕하길 좋아하는 사리사욕의 화신이던 정치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그들이 코로나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외재적 원인에 쾌재(?)를 부르며 표정관리를 하면서 금리를 올리고, 유가를 올려 받으며 나중에 그러한 원인들이 해소되었음에도 결코 오른 요금을 낮추지 않으며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는데 그것은 그들이 정치꾼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해당 회사의 오너나 임원들, 몇몇에 의한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데는 물론이고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 당신을 비롯한 자칭 서민이고 중산층이라는 국민들이 요소요소에 녹아들어 가 있음을 부정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된다.
은행이 코로나로 인해 이제 직원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서 직원들을 명퇴시켰다며 대단한 조직관리를 한 것처럼 정부에게 낸 보고서의 이면에는 어차피 이루어졌어야 할 명예퇴직을 시행하면서 퇴직금으로 수억 원씩을 가방 가득 들려 내보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 은행과 명퇴자들 사이에 암묵적 동의로 이루어졌다.
한전이 희대의 수익을 얻었을 때 그들은 이전에 올린 전기세를 내리거나 상황이 지금처럼 더 안 좋아졌을 때를 대비한 대비(?) 시스템조차 마련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신의 직장이라며 대단한 업무를 하지 않아도 짠 밥을 노래하며 호봉을 올리고 월급과 성과급을 지급하며 모두가 만족한 돈잔치를 하는 것에 표정관리를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1자로 들이세웠더랬다.
이번 달, 그것도 대통령의 반협박(?)에 못 이겨 겨우 단 한 달 19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데이터를 30기가 제공한다고 생색을 내는 통신사들은 또 뭐가 다르던가? 그들은 알뜰폰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자회사를 각기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만 검색하더라도 그들이 홍보를 위해 몇 달씩이나 무료요금제로 메인 통신사의 상품이 아닌 것을 찾는 소비자들에게 호객행위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3월 30기가 전 국민(?) 데이터 제공 이벤트에 슬그머니 알뜰폰은 빠져 있다. 자회사가 본 통신사와는 등기상 별개의 회사라는 사실에는 (하도 대통령실에서 강조를 하는 그놈의)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하지만, 말이 조금 달라졌을 뿐, 알뜰폰을 사용하는 적지 않은 국민들은 19세 이상의 전 국민에 해당하지 않는 사각에 빠진다.
어차피 지원금이 필요 없는 경제사정이 넉넉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30기가 데이터 따위가 살림에 그야말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물가가 올라 그간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사상 최대의 이익을 누렸던 통신사들이 정말로 예의 염치의 기본을 생각했다면 이런 선심성 퍼포먼스보다는 통신의 기본요금을 파격적으로 낮추는 시행이 필요했음에도 그들은 그 목에 들어오는 칼을 피하려고 이와 같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벤트를 펼친 것이다.
전 국민 누구나가 사용할 수밖에 없는 스마트폰 요금이 바짝 오른 물가에 더해 부담이 되는 것은 서민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데이터 30기가를 한 달 일시적으로 더 준다고 해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통신사에서 자신들의 기본요금이나 통신요금 인하로 국민생활에 보탬을 주라는 정부의 결정은 끔찍하게도 듣기 싫었던 것이다.
왜 예악(禮樂)의 본질에 집중하라는 이 장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뜬금없이 대기업들의 이기주의를 성토하느냐고 생뚱맞다 여겼는가?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하려고 했던 예악의 본질이 과연 예의나 음악에 한정된 것이라 여기는가? 주석에서 강조하여 설명했던 것처럼 모든 예악은 사회를 유지시켜야 할 질서이고, 그 질서는 본래 가져야 할 예악의 본질과 같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공경하는 마음과 조화롭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예악을 필두로 한 모든 사회의 질서들이 갖춰야 할 기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내가 그것을 행함에 있어 그것을 수용하는 이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감사해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이익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면서 마치 스스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배려하는 듯한 억지 발연기는 오히려 그들이 자신이 가진 이익이 조금이라도 아이스크림처럼 녹을까 봐 불안해하는 속내를 그대로 노출시켜 그 추한 민낯을 드러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