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에서 살지 않으며 서울 재건축아파트를 산 향원들에게.
子曰: “鄕原德之賊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鄕原은 德의 賊이다.”
이 장에서는 ‘향원(鄕原)’이라는, 초심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개념이 등장한다. 하지만, 개념이 조금 생소할 뿐, 그 존재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흔해서 설명을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될만한 이들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먼저 ‘향원(鄕原)’이라는 존재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鄕(향)’은 鄙俗(비속)의 뜻이다. ‘原(원)’은 愿(원)과 같으니, 《荀子(순자)》〈正論(정론)〉에 原慤(원각)에 대한 註(주)에 “原(원)은 愿(원)으로 읽는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향원은 시골 사람 중에 謹厚(근후)한 자이니, 流俗(유속)과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한다. 이 때문에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근후하다고 칭하는 것이다. 夫子(부자)께서는 〈향원이〉 덕과 비슷하나 덕이 아니어서 도리어 덕을 어지럽힌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덕의 賊(적)이라고 말씀하여 매우 미워하신 것이니, 《孟子(맹자)》 마지막 편(<盡心下>)에 자세히 보인다.
주석의 내용을 읽고 나면 바로 앞의 장에서 공부했던 겉으로만 엄격한 척하며 성인군자 행세를 하면서 안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대로 된 기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들과 같은 부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공자는 향원에 대해, 德이 있는 듯하지만 그 德은 진정한 德이 아니어서 참된 德을 어지럽히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뚜렷한 신조도 자신만의 견해랄 것도 없이 마치 자신이 진짜인양 행세하고 싶은 ‘사이비(似而非)’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주석에서도 대놓고 비슷한 듯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표현을 넣은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이 쭉정이임을 구별해 낼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그러한 존재들은 결코 자신들이 쭉정이가 아닌 듯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언제 어느 장소에서건 나대며 위로 오르겠다면 바둥거린다.
그런데 이 ‘향원(鄕原)’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개념이 있다. 주석에도 언급되어 있고 글자 그대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시골에 근거를 둔 자들이다. 중앙 도심이 아닌 정치의 한복판이 아닌 시골에 있거나 시골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한 자들이라는 의미가 명확하게 규정된 존재라는 말이다.
왜 시골에 근거를 두었던 자들이 더 큰 문제일까? 이 의문에서부터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역으로 찾아가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공자가 시골 출신이라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자가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이 비난받아야 할 핵심은 그들의 출신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서’ 근후(謹厚)한 척하면서, 정작 중앙의 시류(時流)에 편승하여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주자의 해석에 뼈 때리는 방점은 사실 그 이유를 설명한 바로 다음 문장에 있다.
“이 때문에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근후하다고 칭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주자가 읽어낸 공자의 의도 중에서도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들이 촌구석에서 아무것도 모르며 순박하게 사는 이들에게 ‘근후(謹厚)하다’라며 칭송받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주자는 신랄하게 공자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풀이해주고 있다.
그들이 여느 시골 사람들과 달리, 대단하고 훌륭해 보이며 격조 있는(?) 자로 있어 보이는 이유가 바로 내면적인 것에서 발원된 것이 아닌, 그들이 중앙 시류(時流)에 아부하고 부화뇌동하여 그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기 위해 아첨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내면의 내실을 갖춰서 시골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경외를 받는 것이 아님을 공자는 이 장에서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들이 껍데기로만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거짓 근후(勤厚)’를 갖추게 된 이유라고는 고작 그들이 중앙에 닿아있는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한 결과물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이 짧은 문장에 공자는 담아낸다.
결국 그러한 자들의 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덕인 양 구는 사이비에 해당하는 행동은, 뭇 시골의 대중들로 하여금 眞僞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므로,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향원(鄕原)이야말로 德의 賊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한편, 주자가 위 주석에서 뒤에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학도들이 있을까 싶어 그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서 ‘자로(子路) 편’에서 공자는 “중도(中道)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얻어 같이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뜻이 큰 사람이나 절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뜻이 큰 사람은 나아가 取하려 하고 절조를 지키는 사람은 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시 말해, 中道에 맞게 행동하는 선비가 없다고 해서 향원(鄕原)을 선택해서는 안 되며, 차라리 뜻이 큰 광자(狂者)나 절조(節操) 있는 견자(狷者)와 함께 일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고 부패한 권력의 곁에서 기생하는 향원(鄕原)은 당연히 자신의 비리와 올곧지 못함을 지적하는 광자(狂者)나 견자(狷者)를 견제(그럴 깜냥이나 되는지 의심되기는 하지만)하고 모함하고 비난하며 자신과 비교되어 자신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다.
주자가 주석에서 언급했던 <맹자(孟子)>의 ‘盡心(진심)·下’에 보면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적확한 설명이 나온다. 향원은 광자(狂者)와 견자(狷者)를 두고 “행하는 것이 어이 그리 쓸쓸하고 고독하단 말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바에는 이 세상 사람들과 살면서 사람 좋다고 인정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맹자는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한 말을 인용하며, ‘내 문전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르지 않아도 내가 유감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오직 향원이로다. 향원은 덕의 적이다’라 말했다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공자가 그렇게까지 향원(鄕原)의 유해함에 대해서 역설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그들이 가짜 덕(德)을 마치 진정한 덕(德) 인양 치적하고 내세우는 바람에 혹여 그것이 진정한 덕(德)이라 여겨 시골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아 넘어가 그들을 후덕하다며 추앙하는 이들이 많아질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향원(鄕原) 자체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에 붙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도 잘못이며, 올곧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멀쩡한 이들에게 모함까지 해가며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려는 것도 잘못이지만, 가장 큰 잘못은 그들이 그런 사이비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 시골의 어리석은 민중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사회를 좀먹어가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향원(鄕原)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미 시골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중앙권력의 눈에 띄고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것들을 움켜쥐겠다고 중앙에 진출한 자들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골이라는 말은 폄하의 의미로 들어가 있을 뿐, 정작 시골에 있던 도시에 있던 그것은 크게 중요한 권역의 의미를 이미 상실한 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장에서 공자가 증오의 시선을 오롯이 드러내는 향원(鄕原)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정말 소름 돋게도 작금의 대한민국 여의도 한복판에서 기생하는 향원(鄕原)들이 매직아이처럼 입체적으로 눈앞에 선하게 드러나는 것은 나만의 착시였을까?
지난 공부를 하면서 언급했던 ‘향판(鄕判)’을 기억하는가? 향원(鄕原)과 그 이름마저도 유사한 ‘향판(鄕判)’이라는 개념은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특수용어(?)이다. 판사이기는 하되, 본래 판사는 지역권력이나 토착비리세력들과 결탁하여 법조비리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검사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인사를 통해 근무지를 바꾸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그런데, 검사는 그런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판사만이 원활한(무엇이 어떻게 원활해지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으나) 지역 재판을 위해 그 지역에서 근무지 변경 없이 계속해서 판사를 지내도록 하는 모순된(?) 제도를 대한민국 법원에서는 운영하고 있다.
뭐, 처음 취지대로 운영되기만 한다면 제대로 된 판사가 지역의 특성과 문제점을 충분히 이해하여 원활한 재판을 진행하는데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미실현 과거형을 쓰느냐고? 그 본래의 취지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은 경상도의 저 한구석 대한민국의 정치적 특수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 이상한 지역의 향판들만이 신기하게도 빨간당의 배지를 달고 여의도에 입성하는 기현상을 자아내고 있다는 통계 때문에 그러하다.
대선 때도 그렇지만 유독 빨간당의 당대표 선거를 하는데 경상도 그 뜨거운 여름냄비 같은 지역에 사람들이 몰려가 자신들을 지지해 달라고 구걸하는 것도 그렇고, 그곳에서 파란당의 푸른색은 결코 씨도 뿌릴 수 없다는 점을 보더라도 그러하고, 군바리의 딸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던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물론 향판의 폐해는 경상도는 물론이고 전라도에서도 대대적인 법조비리와 연루된 사실이 있어 그 취지자체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결과임이 밝혀진 바 있다.)
통일이 되지도 않은 한반도의 아랫도리 절반, 그리 넓지도 않은 대한민국의 땅에서 경상도 아주 작은 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 출신의 향판들이 하나같이 번호표를 받아 들고 여의도에 입성하는 것도 우습지만,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의, 그것도 성적이 우수하여 판사로 임용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재산 불리겠다고 자신이 살지도 않는 재건축 아파트를 서울에 사두고 배를 불리며 판사님 판사님이라고 불리다가 이제는 의원님, 원내대표님 등등으로 불리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대한민국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
그곳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촌이다. 대한민국의 절반이상되는 국민들은 그곳의 땅을 밟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 촌구석에서 견제는 고사하고 균형적인 사상적 밸런스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에 대한 지지와 환호성만을 들으며 반평생을 보낸 자들이 과연 균형 잡힌 국정을 수행할 능력이 된다고 할 수 있을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아부하는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인 왕은 언제가 그 끝이 비극적이었고 그 권력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국민들 대다수의 분노와 정의의 목소리를 담아 군바리의 딸을 청와대에서 끌어내렸던 촛불이 성성하던 때에는 대다수 국민들의 민의(民意)라며 탄핵에 동의하며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그지없던 빨간당 인물들은 산천이 변할 시간의 절반도 흐르지 전에 누가 감히 빨간당의 여왕에게 감히 탄핵의 반기를 들었냐며 전혀 생뚱맞은 표정으로 반역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광기를 드러냈다.
태극기부대라는 정체성마저 모호한 광기 어린 집단의 집회에서 단상에 서는 자들의 면면은, 자칭 하나님을 혼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성 목사, 자신들에 반하는 이들은 무조건 빨갱이라는 그 옛날 국정원 고위급 인사, 한때 민주화를 외치며 동지였다가 어느 순간 망령이 든 표정으로 빨간당의 기치를 맨 앞에서 흔드는 한물간 정치퇴물 등 저마다 다르지만, 그들의 목적과 지향점만은 모두 하나같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한때 누렸던 것이 알량한 그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해서 마약중독자보다 훨씬 광기 어린 충혈된 눈으로 자신들이 다시 한번 판사님, 검사님, 차장님, 의원님, 위원장님 등등으로 불리며 그들끼리 술잔을 높이 들어 질펀하고 걸쭉한 농담을 하며 자신들의 세상이라며 확인받고 싶어 할 뿐이다.
사회를 좀먹고 나라를 퇴보시키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이익만이 전부인 작자들이 경상도 한 특정지역에서 자생하여 어떻게 해서든 그 이상한 지역의 지지를 마치 빨간당만의 정통성이라며 그 시장 한복판에 가서 손을 비비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장에서 공자의 분노가 결코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좁은 대한민국 땅에 다시 판을 가르고 그곳의 국민들에게 대대로 집단최면을 걸어 마치 무슨 짓거리를 해도 용납되는 것처럼 몰고 가는 것들을 계속 근후(謹厚)하다고 속아주는 당신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이젠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