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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듣고 읽은 것이 바로 네 것이 되더냐?

진정한 네 것은 마음에, 뼈에 새기고 실천될 때만 그리 된단다.

by 발검무적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德을 버리는 것이다.”

이 장은 간략한 아홉 글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마치 선문답(禪門答)을 읽는 듯 알 듯 모를 듯하는 묘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길에서 무언가를 듣고서 길에서 말하는 행동이 왜 덕(德)을 버린다는 표현을 했을까? 덕을 버린다는 말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으나 결국 道聽而塗說(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다)라는 묘한 전제가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떤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 장의 내용에 대해, '근거 없는 허황한 소문을 이리저리 퍼뜨리고 다니거나 교훈이 될 만한 말을 깊이 새기지 않고 바로 옮기는 경박한 태도를 비유한다'라고 설명한 것도 있는데, 과연 그 해석이 맞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인쇄까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정확한 이해를 위해, 먼저 주자가 공자의 이 묘한 가르침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비록 좋은 말을 들었더라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 그 덕을 버리는 것이다.


주석에서 알 수 있다시피, 주자는 공자의 의도를, 다른 이에게 들은 것들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온전한 덕(德)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주자의 이러한 해설에 퇴계(退溪; 이황)도 지지하는 공감의 해설을 보였다.

한편, 왕 씨(王安石(왕안석))는 이 장에서 말하는 덕을 버리는 행위로까지 비난받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군자는 前人(전인)들의 훌륭한 말씀과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덕을 쌓으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을 버리는 것이다.”


해설인 듯 해설 아닌 이 주석은 결국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설하기보다는 앞문장의 전제를 통해, 역시 아무리 훌륭한 말이나 행실을 알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과 그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행간의 의미를 풀어냈다.


다시 말해, 주자를 중심으로 이제까지 살펴본 학자들의 이해는, 길에서 들은 내용을 이제까지 배우고 익히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수많은 성인군자들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보되,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려는 노력과 수양을 거치지 않고서 그저 옮기기만 하는 허장성세형 입 털기를 지극히 경계하는 가르침으로 파악된다.


앞의 해설과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르게 읽은 학자들 중에서는 이 장의 해설을 다음과 같이 하기도 한 이도 있다.

“집에서 어설프게 들은 것을 곧 자기의 설(說)인 양 길에서 연설하는 것은 덕을 길에 내버리는 것이다.”


이 해석이 이전 주자와 같은 견해와 결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이해하자면, 방점은 역시 ‘어설프게 들은 것을 곧 자신의 설(說)인 양 떠들어대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전 장들에서 보아왔던 겉으로만 성인군자인척 하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거나 자신에게부터 엄격하게 적용하지 못한다고 공자로부터 신랄한 지적을 받았던 가짜 지식인들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요즘은 워낙 시설이 잘 되어 있어 그런 것이 없긴 하지만 낡은 책들이 새책보다 훨씬 많았던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오래된 서고를 지날 때면 맡을 수 있었던 약간의 쾌쾌한 듯한 도서관만이 가지고 있는 내음이 그리워지곤 한다. 종이에 인쇄된 석유내가 다 빠져버려 나무와 나이가 먹어가며 누렇게 변색되어 가면서 만드는 그 내음을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싱그러움과 함께 밟으며 책을 고르고 새롭게 머리와 마음을 채울 책을 두 손 가득 안고 나오는 추억은 생각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더랬다.


그렇게 도서관에만 가더라도 우리가 세상에는 아직도 익히지 못하고 다 읽지 못한 동서고금의 성현들이 남긴 고전들은 아직도 산처럼 쌓여 있고, 심지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읽어낸 이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일반인들도 아니고 소위 공부를 업으로 삼았다는 학자들의 논문이나 이제 그 길을 걷겠다며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보면 그들이 과연 기본이 되는 공부를 차근히 하고서 이 길을 걷겠다고 하는 것인가 한심하기 그지없어 들고 있던 빨간펜마저 놓고 그냥 그 쓰레기 더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일이 늘어가고 있다.


그나마 명문대의 학자와 대학원생이라는 자들도 그러할진대, 어설프게 자신이 몇 권 되지도 않는 책들을 그것도 원서나 원전의 형태도 아닌 번역서나 해설서를 읽고서 잘못된 해석까지도 그대로 답습하며 난 척을 하는 자들이 버젓이 방송에 나와 그것이 자신이 씹어 소화시킨 자신만의 이해 결과물인양 연기하는 꼴 같지도 않은 모습을 보는 것은 여간 힘든 고문이 아니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 굳이 그것들을 찾아보는 사람처럼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고 비아냥거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도 그들의 범행을 암묵적으로 동의해 주거나 무지를 통해 그저 무관심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자기 책임을 방기한 공범에 다름 아니라고 내가 도리어 지적해주고 싶다. 공부를 업으로 삼은 학자의 의무는 자신의 연구를 제대로 완성하는 것도 있겠지만 세상에 대해 그렇지 못한 가짜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옥석을 가려주고 그것이 세상을 미혹하여 그것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내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다.


괜한 오지랖이라고 자기 연구나 묵묵히 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하는 동료들도 없지 않으나 공자의 입장에서 탄식에 마지않았던, 세상에 도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나만 은거하고 은자(隱者)라 자칭하며 세상에 시선을 떨구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논리를 세웠던 자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시대가 변하고 변하여 이제는 유튜버가 먹고사는 직업으로 인식되는 시대이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민감한 정치적 흐름에 편승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이용하는 행태 역시 도처에서 만연하고 있음을 본다. 문제는 그들이 그저 자신의 목소리만을 내는 것으로 부족하다 싶을 때 그 흔하디 흔한 ‘권위에의 인용’이라는 것을 사용한다.


그것은 어떤 통계자료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말인 경우도 있고, 누군가의 이론인 경우도 있으며, 누군가의 책인 경우도 있다. 물론 전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몇 마디만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얄팍하기 그지없는 밑천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전문가들은 많지 않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들의 그 권위의 인용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거나 조금 심한 경우는 그 허장성세가 대단해 보인다며 홀딱 넘어가버려 그의 논리에 동조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들의 대다수가 공부하는 분위기이고 객관적인 사실검증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다면 그들이 감히 그런 허접하기 그지없는 밑천을 가지고 제대로 공부조차 하지 않고서 어설픈 발연기를 하더라도 그들을 한 방에 박살 내버리고 다시는 그런 정신상태로 안일하게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고 정치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한 자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못할 것이다.


한때 여성과 청년을 대변하는 감투를 쓰고 파란당의 비대위원장자리까지 올랐던 여자아이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겠다가 국회의원만이 빌릴 수 있는 국회의원 내의 기자회견장을 얻지 못해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야외에서 기자회견하던 모습을 딱하게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어제는 당당히 그 기자회견장을 빌려준 의원을 하나 얻었다며 뭔가 대단한 척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이제 딱함을 넘어 저 아이가 막장의 끝을 가기로 마음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한심스러웠다.

그녀에게 기자회견장을 대신 빌려주는 일을 한 파란당의 국회의원은 안팎으로 욕을 먹으면서까지 자신이 그런 총대를 메었던 이유가, ‘내 딸과 같은 어린 여자아이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용만 당하고 팽 당했다는 생각’때문이라고 인터뷰에 밝혔다. 그 어린 여자아이가 딸뻘이나 될 정도로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정치판에서 초선의원이 아닌 그가 그 허접한 변명을 주절거리는 내용에도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의 그 후안무치한 변명을 들어준다 하더라도, 겨우 지잡대를 갓 졸업하면서 정상적인 노력이라면 시장판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자기 아버지뻘의 국회의원들 위에서 카메라 샤워를 받으며 비대위원장이라는 존재를 받으며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고서 이용가치가 없어져 팽 당해버린 후에서야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그 위로 올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꼬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이가 원하는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스피치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예약해 주었다는 말이 된다. 그 얼마나 무책임한 동정이고 어설픈 공조란 말인가?


그녀가 팽 당한 이후에 그렇게 얼굴을 비추고 싶어 하는 방송도 그렇고, 굳이 꾸역꾸역 거리며 국회의사당 내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녀의 기자회견 내용에 제대로 담겨 있던가? 아니다. 그녀가 기레기들의 언론에 노출되는 경우는 단 한 경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빨간당의 파란당 찍어 누르기의 차도살인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녀가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자신이 마치 여성을 그리고 청년을 대표하는 대단한 인물로 인식해 달라고 징징거리는 것은 빨간당의 당대표였다가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자신이 마치 빨간당의 청년 목소리의 정신적 지주라고 혼자서만 목놓아 외치는 꼴과 그야말로 데칼코마니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모래시계 검사의 모델이라며 과거의 망언은 모두 진공청소기에 넣어둔 것처럼 빌빌 거리다가 못해 빨간당의 배꼽인 지역의 시장으로까지 밀려났음에도 SNS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대는 자의 망령난 행동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를 비유하며 준비해 온 원고마저도 제대로 띄어 읽지 못하며 더듬거리는 얼굴에는 살이 잔뜩 올랐지만 속은 다 삭아버린 민증 나이만 젊은 그 노쇄한 전 빨간당 당대표의 표현을 들으며 웃펐다. 이문열의 해당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개 40대 이후의 노년층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표하는 2,30대 청년들이 이문열의 작품을 비유로 삼아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너무도 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가?


파란당의 당대표가 기소되자 빨간당의 의도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새삼스럽게 내는 것처럼 나대는 이른바 비명계의 인사들이 방송에 연일 나오는 것이 과연 어떤 영향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그들이 어느 한 명이라도 다음 총선에서 나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출마하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빨간당은 파란당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여간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목적은 저마다 다르다. 자신의 스펙이나 정치적 경력으로 보건대 비대위원장직은 고사하고 청년위원조차 할 수 없는 깜냥임을 인정하기 싫은 권력중독자 여자아이를 비롯해서 이미 빨간당에서 내쳐졌음에도 언젠가 자신의 텀이 올 것이라 믿고 자신을 잊지 말라며 내부의 친구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빨간당의 전 당대표, 경상도 촌구석 시장까지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대선주자를 꿈꿨던 큰 형님이랍시고 그곳 시정을 돌볼 생각 없이 내내 여의도에 온마음이 쏠려 있는 퇴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목적하는 바는 다르지만 그 동상이몽의 지향점은 묘하게 파란당의 폭망에 몰려 있다.


그 지향점을 설정한 것은 용산의 대통령실이고 빨간당임을 잘 알면서도 어차피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에 득이 된다면 얼마든지 동조하겠다는 자들의 망나니 칼춤 쇼가 연일 펼쳐지는 셈이다. 그들의 논리는 삼일절에 버젓이 일장기를 달고 자신을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이라고 떠들어댔던 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만끽할 뿐이고 법적으로 저촉되지 않는 행위를 한 것뿐이란다.

그런데 딱한 것은 그렇게 당당하다면 왜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둘러댔으며, 왜 그 구차한 변명을 자신의 교회설교에서 그것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벌인 일처럼 유체이탈화법으로 말했던 것인지, 나는 정말 도무지 도대체가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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