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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잃을까 그렇게 걱정하고 또 하는가?

움켜쥔 것을 버려야 다른 것을 쥘 수 있을 것 아닌가?

by 발검무적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비루한 사람과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을 것을 걱정하나니, 만일 잃을 것을 걱정한다면 이르지 않는 바가(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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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도저히 저급하여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비열한 인격의 정치꾼들이 아무 생각이나 지조라고는 없이 오로지 높은 지위나 권력,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첫 문장에서부터 그런 저열한 자들과 더불어 임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표현으로 그들과 함께 조정에 서는 것 자체가 굴욕이고 모욕이라는 살벌한(?) 직격탄을 날린다. 여기에 사용된 ‘비부(鄙夫)’라는 용어는 기존에 그저 소인(小人)으로 지칭하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 새로운 단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여 공자의 의도를 풀어준다.


‘鄙夫(비부)’는 용렬하고 악하며 비루하고 졸렬한 자의 칭호이다.


그리고 뒤이어 그들이 왜 ‘鄙夫(비부)’라 불리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之’라는 라임을 딱딱 맞춰가며 설명한다. ‘患得之’의 해석을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한다.’라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이해를 쉽게 하지 못할 초심자들을 위해 하 씨(何晏(하안))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통해 설명해 준다.


“‘얻을 것을 걱정한다.’는 것은 얻지 못할까 걱정함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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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것을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지 못할까 ‘만’을 걱정하며 끙끙거리다가 기어코 알량한 그 지위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되면 그것을 잃지 않을까 ‘만’을 걱정하기에 그들이 비루하다는 신랄한 표현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들이 소인(小人)보다도 못한 비루하기 그지없는 ‘鄙夫(비부)’라 불린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사리사욕에만 매달려 전전긍긍하기를 마지않는 이들의 본질을 설명하는 마지막 문장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그 피날레를 장식한다.


“만일 잃을 것을 걱정한다면 이르지 않는 바가(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내가 바로 이전의 문장을 풀이하면서 ‘만’이라는 글자에 작은따옴표를 찍어 강조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것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부화뇌동(附和雷同) 하기 때문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까 싶어 공자는 마지막 문장에서 그 ‘鄙夫(비부)’들이 그들이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에 못하는 짓 없이 해서는 안될 짓을 자행한다는 냉철한 현실적 분석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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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주자는 <장자(莊子)>의 ‘열어구(列禦寇)’에 나오는 문장을 끌어와 적나라한 ‘鄙夫(비부)’들의 행태를 설명한다.


작게는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 것과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함이 모두 〈부귀를〉 잃을까 걱정하는 데서 생길 뿐이다.


‘吮癰舐痔(연옹지치;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 것)’라는 어구는 본래 <장자(莊子)>의 ‘열어구(列禦寇)’에 나오는 설명으로, 비굴하고 악착같이 아첨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비유로 유명한 표현이다. 작다는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그렇게 더럽고 도저히 못할 짓까지 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부귀와 지위를 잃게 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하는 짓이고 더 크게는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게 된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공자의 이 신랄한 현실적 비유에 대해 송나라의 호씨(胡寅(호인))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이 장의 가르침을 요약정리한다.


“許昌(허창)의 靳裁之(근재지)가 말하기를 ‘선비의 등급이 대개 세 가지가 있으니, 도덕에 뜻을 둔 자는 공명이 그 마음을 얽맬 수 없고, 공명에 뜻을 둔 자는 부귀가 그 마음을 얽맬 수 없고, 부귀에만 뜻을 둘 뿐인 자는 못하는 짓이 없다.’ 하였으니, 부귀에 뜻을 둔다는 것은 바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비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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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근재지(靳裁之)의 말을 인용하여 선비의 등급이라고 세 가지를 나누기는 했지만, 결국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등급은 선비라는 말을 넣을 수 없을 정도의 저열한 인간 말종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선비의 등급이라고 넣었는지에 대한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칭 스스로가 선비라 칭하고 정계에 투신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겠다고 활개 치는 이들이 있으니 그 부분을 더 은미 하게 후려치는 강한 풍자임을 알 수 있다.


도덕이 가장 위에 있고, 그다음에 공명함을 바라는 것까지도 인간의 본능인지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명을 바라는 자는 최소한 부귀함을 탐내지는 않는다고 하는 비유가 묘하게도 현실적인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그 선이 애매하기 때문에 공명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부귀를 탐내기 시작하는 자들이 허울이라 비판받을 수 있는 공명마저도 내버리고 오로지 부귀만을 탐내기 시작하면 못할 짓이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보자. 앞서 라임을 딱딱 맞췄던 대명사 ‘之’가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조금 더 심화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자연스럽게 위의 해석에서는 그것을 지위나 부귀로 설명하였으니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본래 원문에서 대명사의 지칭 목적어를 찾는 고문의 문법적 특성을 감안하면 본래의 의도는 모시는 임금에게서 받는 총애가 바로 그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조금씩 뒤의 주석으로 갈수록 임금의 총애는 오히려 뒷전이 되어버리고 자신이 차지한 지위나 공명이 될 것이고, 시대가 더 흘러서는 그 헛된 공명도 필요 없어져 오로지 실질적인 이익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만’을 탐욕스럽게 추구하기에 내내 불안하고 걱정하는 마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미 앞서 ‘술이(述而) 편’의 36장에서 언급되었던 ‘소인은 늘 근심에 차 있다’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가르침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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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가르침을 조금 철학적으로 돌려놓으면, 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근심하는가를 보면 그가 평소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신기한(?) 논리의 귀결을 확인하게 된다.


어제 공부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수십 년간을 그래왔다시피 소인(小人) 보다 못한 ‘鄙夫(비부)’들이 그득 차 있다. 이제 정치판에서 밀려 퇴물취급을 받으면서도 빨간당의 정치적 핵의 한가운데 들어앉아 시장이랍시고 끝끝내 끝방 늙은이로 사라질까 봐 두려워 내내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고 SNS로 중앙정치에 손을 들어 보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군바리 딸을 탄핵으로 끌어내릴 때까지도 대통령 대행 총리라는 몇 달 사용하지도 않을 책상의 명판부터 새겨서 사진을 찍어 올리고는 교회 장로랍시고 굵직한 목소리로 후안무치하게 자신이 공안검사출신임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자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스물을 갓 넘고 겨우 대선판에서 반짝 번개탄으로 주목을 받았던 지잡대 여자 아이는 자신이 왜 계속 비대위원장 같은 거 하면 안 되느냐면서 여의도에서 어떻게 해서든 한번 차지했던 영화를 누리겠다며 어울리지도 않는 남성용 슈트 정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고 싶어 한다. 군바리 딸에 의해 하버드 출신에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배경을 등에 업고 잠시 번개탄으로 쓰였던 자는 정치적 역학적 흐름을 교묘하게 타고 올라 당대표까지 하더니, 단 한 번도 그 어리석다는 개돼지의 선택조차 받아본 적이 없으면서 어디서 나쁜 정치판의 악습만을 보고 배워 추문을 터트리더니 끝까지 그 판에서 떨궈지는 것이 싫었는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맹구처럼 책상 위로 날아오를 기세로 팔을 들며 자신을 봐달라 외친다.


광화문에 용돈을 받아가며 빨간당의 선동부대 역할을 하는 태극기 부대의 집회에 내내 얼굴을 내밀던 면면들을 보면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며 오로지 돈이 목적이어서, 어디서 재벌들이 하는 짓을 보고 들은 것은 있어서 자기 아들에게 모든 승계를 하려는 비루한 자부터, 한때 운동권이었다며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 듯싶었는데, 노쇠한 것인가 싶은 순간, 그 먼 좌측 끝에서 우측 끝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날아가 신영복 선생을 언급하면서 빨갱이가 어쩌고 망발을 하질 않나, 성조기를 흔드는 배경 사이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나와 WWF(미국 프로레슬링)의 듣보잡 선수처럼 경례를 올려 부치며 산골 도지사로 기어코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들을 보자면 그들이 평소 무엇을 최우선시하며 살아왔는지를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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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기념사에서부터 엊그제에 이르기까지 내내 시끄러운 위안부 사과 및 배상문제와 관련된 한일관계의 개선에 대한 이슈는 그와 관련된 자들의 지향점을 거슬러 추정하기에 아주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정부 청사들이 몰려 있어 공무원이 절반이상이라는 세종시에 버젓이 삼일절에 일장기를 게양해 놓고, 북한의 인공기만 달지 않으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며 유체이탈 화법을 쓴 목사라는 자는 기어코 해당 교단의 노회에서 이름이 파이게 생겼다.


마치 데자뷔 같아 소름이 돋긴 했는데, 사실 오랜 기간 내가 연재했던 논픽션 소설, <현역목사 아동학대 사건>의 주인공 역시 본래 그 교단이 아니면서 워낙 대형 교단이니 그 세력에 편승하고자 지역 노회에 회원 자격으로 가입했다가 해당 사건에 연루된 것이 경찰과 검찰에 언급되면서 마침내는 지역 노회에서 회원자격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magazine/badcopstory


강남 한복판에 마치 궁궐 같은 위용을 자랑하는 대형 건물의 해당 교단은 과연 하나님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버릴 거라며 망발을 하는 사이비 목사나, 자신의 딸을 물건처럼 던지려 하고, 일반인들에게 저주의 기도라며 괴성을 내지르는 목사나, 자신은 일본인이라서 한국 사람들을 싫어해서 일장기를 달았다는 헛소리를 떠드는 그 목사들에게 왜 회원비를 받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교단 노회에 이름을 올려주고 그냥 품어주었을까?


아니, 왜 진작에 그들의 그릇된 품행을 안에서 단속하지 못하고 형사건이 관련되어 뉴스를 타고나서 자기 교단의 이름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나서야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일까? 결국 그들이 그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그들도 알고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광화문에서 망령된 발언을 해대며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만을 위해 발버둥 치고 한때 누렸던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영화를 누리겠다고 혈안이 된 그 추악한 민낯을 보면서 손가락질하고 혀를 끌끌 차며 남의 일처럼 비난했던 당신이 이제 당신과 교회를 같이 다니거나 너무도 거대해서 이미 당신의 교단일지도 모를 그들, 그리고 같이 기도를 드리는 곁에 있는 그들이 보여주는 추악한 민낯에 대해서도 모른 척을 하며 당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할 것인가?


전근을 가지 않아도 되는 사립학교랍시고 수십 년을 차근차근 권력에로의 계단에 오르며, 결국 교무부장이 되어 자신의 딸들에게 훔친 답안지를 외우게 시키면서 그가 스스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직업으로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이제는 무색해진 시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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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정교사도 아닌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는 데에도 뒷돈이 필요한 것이 공공연한 룰이 되어버린 사회를, 그 돈을 내놓으라는 자들만 욕할 셈인가? 사회의 부정은 결코 그것을 누리는 한둘에 의해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 듣고 진행하는 인간들은 결국 가장 밑의 현장에서 일하는 당신들의 딸이고 아들이며 당신이고 당신의 친구들이지 않은가 말이다.


경찰청장이 구속되어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한 사회, 대통령이 된 자들은 이미 대선이나 경선과정에서 나왔던 비리가 기필코 사실로 밝혀져 감옥으로 가는 사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정치적 노선과 이익을 공유해야 하는 이들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감옥을 간 것이 정치탄압이라며 후안무치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이 판치는 사회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가 그들의 나라이고 그들의 사회인가? 당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사회가 다 그렇지 뭐.’라던가 ‘나 하나 달라진다고 해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따위의 자기변명을 늘어놓다가 당신은 스파이더맨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도둑을 방조했다가 그 도둑에게 삼촌을 잃은 피터파커가 되어버리고 만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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