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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라고하여 미워하는 것이 어찌 없겠는가?

군자가 도저히 견디지 못해 미워하는 것들.

by 발검무적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子曰: “有惡.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而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曰: “賜也亦有惡乎?” “惡徼以爲知者, 惡不孫以爲勇者, 惡訐以爲直者.”
子貢이 묻기를 “君子도 미워함이 있습니까?”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미워함이 있으니, 남의 악함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며, 下流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며, 勇만 있고 禮가 없는 자를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막힌(융통성이 없는) 자를 미워한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賜야, 너도 미워함이 있느냐?” 하시니, 〈子貢이 대답하였다.〉 “살피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겸손하지 않은 것을 용맹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함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

이 장에서는 자공(子貢)의 질문을 통해 군자가 과연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자공(子貢)의 조심스러운 질문의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미워함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과연 도덕적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군자가 가지고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 공자는 너무도 당연하게 군자가 미워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양 씨(楊時(양시))는 자공(子貢)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인자(仁者)는 사랑하지 않음이 없으니 군자는 미워함이 없을 듯한데, 자공(子貢)이 이런 마음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쭈어서 옳고 그름을 질정한 것이다.”


그 의미에는 앞서 ‘이인(里仁) 편’에서 공부했던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또 남을 미워할 수 있다(唯仁者能好人, 能惡人)”고 했던 설명이나 ‘안연(顔淵) 편’에서 “군자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이루게 해 주고 나쁜 점은 조장하지 않는다. 소인은 이와 반대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라고 한 설명과 일맥상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래 고문(古文)에서 ‘군자(君子)’란, 박애(博愛)와 인후(仁厚)의 덕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자는 이 장의 주석에서 군자(君子)를 일반화시키지 않고 이미 군자의 경지에 오른 공자로 환치시켜 공자가 지극히 혐오(?)했던 것들을 나열한 것으로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訕(산)’은 비방하여 헐뜯는 것이고, ‘窒(질)’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남의 악함을 말하면 仁厚(인후)한 뜻이 없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비방하면 忠敬(충경)하는 마음이 없고, 勇(용)만 있고 禮(예)가 없으면 亂(난)을 일으키고, 과감하기만 하고 막히면 함부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미워하신 것이다.

남의 악함(혹은 단점)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인후(仁厚)한 뜻이 없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단순히 단점을 말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의 단점만을 이야기하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공자만의 독특한 가르침의 방식이 녹아들어 있다.


이어서 下流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경(忠敬)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 두 번째 이유에 대한 주석을 읽을 때쯤 초급자를 벗어난 수준의 이라면 눈치를 채야만 한다. 맞다. 주자의 설명은 공자가 행간에 묻어둔 의도가 군자가 되기 위한 요건을 역으로 설명하고 있음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위에 정통 고문에서 군자(君子)를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는지를 굳이 설명한 것은 그 정의만을 보게 되면 그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가슴을 울리거나 깨달음이 오지 않지만, 오히려 공자의 방식처럼 군자가 어떤 것을 미워하는지에 대한 것에 대한 이유가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지를 살펴보게 되면 군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정의하고 생각하여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앞서 살펴보았던 용맹함(勇)만 있고 禮가 없는 자를 미워한다는 변용을 넣었다. 앞의 공부에서는 용맹함만 있고 그 핵심인 의로움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번엔 의로움(義)이 아닌 예(禮)를 넣어 다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이는 실질적인 대의명분에 의로움을 넣어 설명했던 본질에 대한 설명과 아울러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이 설명을 통해 이 장에서의 가르침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어떻게 융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방식을 좀 더 부각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의 유형으로 제시한, 과감하기만 하고 막힌(융통성이 없는) 자를 미워한다는 설명을 부연설명처럼 넣어, 사회적 조화를 깨는 행동이야말로 군자로서의 가장 큰 결격사유임을 밝혀 혼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다는 식의 고립된 사고방식은 결코 군자라 일컬어질 수 없음을 꼬집는다.


내가 굳이 ‘꼬집는다’라는 풍자의 의미를 설명에 강조하여 넣은 이유는, 이 장에서 공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군자(君子)의 의미는 자기만족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도가 유형마다 확연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배움과 수양의 시작은 물론 자신을 가다듬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의 목표 지향점이랄 수 있는 군자의 풍모를 완성하기 위한 가장 큰 조건은 역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가 없어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 장이 만약 공자의 가르침으로 짧게 끝났다면 여느 장과 같았을지 모르겠으나 공자는 바로 질문을 했던 자공(子貢)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사실 자공(子貢)이 묻고 싶었던 것은 스승의 의견이었으니 단순히 일반화된 군자(君子)가 아니었던 것이었으니 핵심요약 설명을 마치자마자 자공(子貢)에게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단순히 자공(子貢)의 의견을 물었다기보다는 자공(子貢)의 온전한 이해를 확인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자는 자공(子貢)의 답변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惡徼(오요)’ 이하는 자공의 말이다. ‘徼(요)’는 엿보아 살핌이다. ‘訐(알)’은 남의 陰私(음사, 비밀)를 들추어내는 것이다.

물론, 대개 제자에게 질문을 하고 제자가 스승에게 답할 경우 ‘대왈(對曰)’이라는 문구가 반드시 딸려오는 것에 반해, 이 장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이 바로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이 공자의 질문이 아닌 자공(子貢)이 스스로 자신의 이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말한 것이라는 후대 학자들의 견해도 있는데, 그 형태는 차치하더라도 자공(子貢)은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했음을 진일보한 답변의 형태로 대신한다.


적지 않은 <논어(論語)>의 현대 해설서에서는 자공(子貢)의 답변이 공자의 가르침을 반복한 것 정도로 해석하는 경우로 대강 설명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정도였다면 스승인 공자도 실망했을 터이고, 자공(子貢) 역시 굳이 나서서 자신의 의견이라 보태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이 진일보했는지에 대해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다.

“살피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겸손하지 않은 것을 용맹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함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


먼저 자공(子貢)의 설명방식은 유형방식이던 스승의 형태에서 구체적인 그 행동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좀 더 구체화되었다. 그런 행동이라고 하고 설명하는 것과 그런 행동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 적시하는 것과의 뉘앙스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두 번째 눈에 띄는 특징은, 스승이 가르침에 있어 강조했던 두 가지 부분 중에서 사회적인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전체적인 강조점 외에 세부적으로 녹아들어 있던 ‘무엇을 위해 그런 행위를 하는가!’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답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원문을 설명하며 공자가 특유의 방식으로, 군자가 미워할만한 이유를 생각할 거리로 제시했다는 숙제(?)에 대한 즉각적 제출인 셈이다.


자공(子貢)이 이 답변에서 구사하고 있는 좀 더 은미한 고급 사유에 대한 부분까지 생각한다면, 공자가 앞서 강조했던 사회적인 조화를 중심으로 군자다움을 이뤄야 한다는 부분에 대한 것마저도 자공(子貢)이 제시한 세 가지 방식에 모두 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장이 공자의 가르침만으로 끝나지 않고 자공(子貢)의 답변까지 기록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다시 말해, 자공(子貢)이 보여준 배움과 피드백의 방식을 기록을 통해 다른 배우는 자들이 더 생각하고 진일보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그저 스승의 의견을 반복한 것이라고 대강 설명하고 넘어가버린다면 이 장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자공(子貢)이 지적한 세 가지 유형의 미워할만한 요소를 갖춘 자들은 목적이 너무도 명확하게 불순(不純)하다. 살피는 것만으로 지혜를 여긴다 함은 남의 것을 몰래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겸손하지 않는 것을 용맹이라 여김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후안무치하게 구는 것을 의미하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 따위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 자를 지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의 비밀을 들춰내는 것이라 함은 앞서 스승 공자의 설명인 다른 이의 악함(혹은 단점)을 말한다는 의미에 대해 다소 애매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후학들을 위한 구체적인 주석과도 같은 해설에 해당하는 것인데, 단순한 설명을 넘어 앞의 두 가지와 같은 구조를 갖춰 그러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이 정직한 것이라고 행동을 포장하려는 자들의 위선에 일갈을 포효한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한 후씨(侯仲良(후중량))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성현의 미워함이 이와 같으셨으니, 이른바 ‘오직 인자(仁者) 여야 제대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논리를 보여주는 주석을, 오직 자신이 깨끗한 자만이 다른 지저분한 자들의 추잡함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오독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지 않기를 바란다. 성현이, 군자가 누군가를 미워함은 자공(子貢)이 조심스러워했던 나와 다르기 때문에 혐오하는 인간 본성의 미워함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이 주석이 갖는 본래의 의미이다.

미워하는 행위자체가 감정적인 행동이라면 대개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과 부합하지 않거나 자신이 감정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인데, 공자의 답변은 같은 ‘미워함’이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그 근거가 되는 본질이 자신의 감정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배우고 수양했던 과정에서 사회적 조화를 방해하는 것들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일요일 진료를 할 수밖에 없던 함께 침대를 쓰시는 분의 기분전환 겸 화원에서의 산책을 위해 드라이브를 가던 중에 강남 한복판에서부터 시골의 한적한 도로에까지 걸려있는 현수막 두 종류가 연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파란당에서 당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당에서 내보냈다는 ‘이완용의 부활인가?’라는 내용의 현수막과 빨간당에서 철저하게 대통령을 커버하겠다는 의도가 철철 넘기는 ‘외교는 경제우선, 실익우선’이라는 현수막이 그것이었다.

파란당의 현수막이 거슬렸던 이유는, 중앙당에서 전국의 파란당 지역구 사무실에 보냈다는 초안을 보고 특정 지역의 사무실에서 “우리 지역은 보수적 성향이 강해서 그대로 현수막을 달았다가는 반발하는 지역심리를 무시할 수 없다”라고 누구인지도 밝히지 못하면서 인용했던 기레기 언론의 볼멘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강남의 어느 쪽바리 가문의 자손이 그 현수막을 보고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불편해한단 말이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느 파란당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했다는 것인지 빨간당의 스피커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더라’식으로 떠들어댔다.


설사 법적인 조치를 통해 재빨리 재산이 동결되기 전에 자기 밥그릇으로 챙겨갔던 이완용의 후손들이 그 현수막을 본다고 한들 어디 뚫린 입이라고 감히 그것이 불편하다고 할 것이며, 아무리 정치꾼이라 대중의 표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의 부활 같은 짓을 할 것이냐는 내용의 경고성 현수막을 보고 반발을 할 것인가 말이다.

굴욕외교라는 지적에 ‘경제우선, 국익우선’이라는 신박한 개소리를 해대려면 도대체 우리가 얻은 국익이 무엇인지를 브리핑을 통해서든 기자회견을 통해서든 당당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전에 수차례 사과한 내용을 계승한다고 했으니 된 것 아니냐는 말 같지 않은 소리가 정부 공식 멘트로 나오는 것은 이완용이 누군지도 모르는 10대들에게조차 쪽팔린 일이라 생각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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