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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여성혐오주의자였다고 누가 그러더냐?

잘 알지 못하면 일단 입을 다물고 찾아서 공부할 것.

by 발검무적
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女子와 小人은 기르기가(대하기가) 어려우니,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 하면 원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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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공자나 <논어(論語)>에 대해서 껍데기로만 몇 번 주워들은 자들이 공자를 여성 혐오주의자로 뒤집어씌우는 논리의 근거로 제법 언급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듯이 인용되곤 하는 장이다. 공자나 <논어(論語)>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에 정치논리로서 계급논리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학자를 위장한 정치꾼들이 유학을 유교로 변신시키며 곡학아세(曲學阿世)하여, 고려시대까지 활발했던 여권신장을 누르려고 했던 찌질한 획책의 일환으로 반복 재생산되었기 때문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자는 여자와 소인을 한 카테고리에 언급하여 그런 오독(誤讀)의 빌미를 제공하였을까? 혹자 중에서는 이 말자체도 공자의 말이 아닌 후대에 편집되어 호도된 내용이라고 아예 논외의 내용으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반드시 그렇게까지 선을 긋는 것도 논리적인 어폐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자는 그냥 남성에 반대되는 의미로 여성을 의미하는 젠더로서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 주자의 주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원문의 ‘소인(小人)’이 도덕적으로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로서 군자의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 신분이 낮은 이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힌트를 조금 더 주자면, 그러한 신분계층이 낮은 ‘소인(小人)’과 여자가 같은 카테고리에 엮일 수 있는 범주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왜 공자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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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먼저 주자가 이 장의 가르침을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주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의 소인은 또한 마부와 노예 등의 하인을 이른다. 군자(위정자)가 臣妾(신첩)에 대하여 장엄함으로써 임하고 자애로움으로써 기르면 이 두 가지의 병폐가 없을 것이다.


신분이 낮은 이들을 통칭하기 위한 용어로 ‘소인(小人)’을 썼고, 굳이 신분이 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같은 카테고리에 넣어서 쓴 사실에 대해 주자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신분이 위에 있는 군자(君子)가 그의 배우자에 해당하는 처첩(妻妾)이라는 용어로 환치시켜 설명할 뿐이다.


사실 주자는 이미 그 설명을 다 했다. 신분상으로 소인의 대척점에 있는 군자(君子)를 언급하되 그것이 도덕적인 완성형 인간으로서가 아닌 신분상으로 위에 있는 자라고 언급하여 설명하면서 그가 배우자인 처첩(妻妾), 그러니까 여자들에게 장엄하면서도 자애롭게 길러주면(?) 원문에 언급한 두 가지 병폐가 없어질 것이라 한 것이다.


이제 힌트는 다시 두 가지 병폐로 넘어간다. 도대체 소인과 여자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 하면 원망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여권신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난리가 날 ‘기른다’라는 표현을 썼단 말인가? 행여 여자의 사회적 위치가 노비에 해당하는 소인(小人)들과 똑같다고 폄하한 것이라고 다시 페미니스트들의 짧은 고문 상식에 기름이라도 뿌릴까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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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강조하지만, 잘 모르면서 자신의 짧은 상식과 지식으로 그저 그것이 사실인 양 흥분하여 분노하고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언제나 모든 일을 그르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얼굴에 똥칠을 할 뿐이다. 원문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고 소인과 여자의 공통점, 그리고 신분적으로 그들에게 제대로 대해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해결이라며 군자(힌트로 내가 ‘위정자’라 해석하였다)에게 일러주는 의미를 다시 파악해 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인과 여자의 공통점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2,500여 년 전 공자의 시대는 너무도 당연하게(?) 공부할 수 있는 신분의 벽이 상당히 높았다. 남성, 그것도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이들만이 배울 수 있었고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태생적인 이유에서부터 여러 가지 사회적 이유가 있었기에 그 모든 이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실제로 신분이 낮은 수많은 백성들과 신분은 높을지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공인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라는 자들이 유학을 유교로 변질시켜 자신들의 정치논리로 사용하면서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인권신장이나 변화를 억누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시기가 짧지 않은 기간 이어지면서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학교를 갈 수 있는 상황은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에서 공자의 설명은 결코 조선시대 그들의 논리로 사용될만한 그 어떤 단초도 없으며 무엇보다 공자는 봉건 신분제에 대해서도 정치적 논리로 아랫사람들을 억눌러야 한다는 궤변이나 여자들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폄하했다고 볼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언급도 그럴만한 일화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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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현대 해설서에서는 주자의 주석조차 검증하지 않고 ‘소인(小人)’을 버젓이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존재로 번역을 하는 것으로 시작부터 작정하고 삼천포로 빠져버리거나 여자(女子)의 ‘여(女)’를 ‘여(汝;너, 당신)’로 해석하는 변두리 해석을 찾아내서는 “너의 아들은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르기 힘들다”라는 식의 기괴하기 그지없는 말도 안 되는 해석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기가 막힌 오역 중에는 이 장의 내용이, 공자가 자신의 가정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 말이라며, “집안의 여자와 노비를 먹여 살리는 일이 힘들다.”라며 기상천외한 코미디에서나 볼 법한 내용을 말이랍시고 내뱉어 <논어(論語)>를 욕되게 만든 것도 있었다.


이 장의 구조와 소인(小人)과 여자가 함께 사용된 것만 보더라도 어느 한쪽에만 맞는 견강부회(牽强附會)식 해석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 법도 한데, 왜 저런 식의 무지하면서도 겁 없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호도하는지, 내가 배움이 낮아 이해도가 떨어진 탓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가 원한다면 인(仁)은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인간의 애정이란 본능을 긍정하고,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공평한 인정을 설파했던 공자가 말도 안 되는 사회적 불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몰이해는 통찰력은 고사하고 그저 무지와 무식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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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긴 하지만, 후대 고증학자들 중에서는 공자를 시작으로 그의 자손들이 이혼을 한 사실을 들어 공자가 여성에 대한 그 어떤 편견도 없었음을 반증하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공자는 아들 백어(伯魚)를 낳은 견관씨(幵官氏)와 이혼했고,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 역시 그의 아들 자사(子思)를 낳은 부인과 이혼했다. 이혼 DNA(?)가 있었던 탓인지 자사(子思) 역시 아들 자상(子上)을 낳은 부인과 이혼했다는 사실관계에서 유추한 분석인데, 이혼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여성의 주체적인 의견을 감안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만약 배우고 익혀 스스로 알 수 있는 존재라면 서로 간의 오해가 생길 일도 없겠으나 공식적으로 사회적으로 배울 수가 없는 존재의 대명사로 공자는 소인(小人)과 여자(女子)를 내세워, 처음부터 배우고 익혀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배운 자로서의 군자(도덕적인 의미가 아닌 배울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를 설정하여 배운 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 바로 이 장의 대의(大意)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아직 더 중요한, 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만 한다는 가르침은 풀이하지도 못했다. 왜 ‘그들을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는 표현을 썼을까?


사회적 신분상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가까이한다는 말의 의미는 ‘예를 허물고 대한다’는 뜻이다. 배운 자라면,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 사이가 가깝다고 여길수록 예의(禮儀)를 지켜야만 한다고 공자는 가르쳤다. 내가 부족해도 나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학덕(學德)을 갖춘 상대도 그러할진대 내 부족함을 지적해 줄 수 없는 배움이 없는 여자와 소인(小人)을 대함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래야만 한다는 권계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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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너무 거리를 두고 멀리 하게 되면 그들은 상대를 원망(怨望)하게 된다. 멀리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되, 배움을 통해 그 원인을 자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으나 그런 배움이나 수양과정을 거치지 못한 소인(小人)은 본능적으로 그저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하게 되니 그것을 조절해야 하는 것은 결국 배우고 익혀 그것을 알고 있는 군자(위정자) 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장의 내용은 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하여 여성을 노비에 비유하는 이상한 내용이 아닌 배우고 익힌 특권을 갖춘 위정자의 입장에서 그렇지 못한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을 담고 있다.


2,500여 년이 흘렀고 시대는 천지가 개변할 정도로 변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신분제도 따위의 벽에 걸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은 없다. 오로지 스스로 게으르고 교만하여 배우기를 꺼려하고 배워도 그것을 사리사욕의 방편으로만 사용하고 그런 목적으로만 사용해 버릇하여 그 배움이 얄팍하고 사특하기 그지없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을 뿐이다.


연전에 한 대학의 철학과 강사라는 여자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튜버의 인사법을 뜬금없이 페미니즘 논의로 끌어들여 제대로 헛다리를 짚어 해당 유튜버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5천만 원의 배상금을 내놓으라는 판결을 받는 해프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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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유튜버가 자신의 이름인 보겸과 하이루(인터넷 인사법)를 합쳐 ‘보이루~’라고 한 것은 뜬금없이 10대에서부터 심지어 30,40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여성 폄하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는 내용으로 해석하여 버젓이 자신의 논문에 넣은 것이다. 이미 재판부에서 판결문을 통해 명시하였다시피, 이미 논란 이전 어마어마한 구독자수를 자랑하는 해당 유튜브를 보아왔던 이들이라면, 아니 나중에 그 사안을 알게 되어 사실관계를 파악한 이들이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관계 확인의 문제가 다였다. 복잡하고 첨예한 사실관계의 다툼도 없었고, 무엇보다 흥미위주의 내용을 중심으로 영상을 제작했던 해당 유튜버가 자신의 이름을 그런 지저분한 논란으로 사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대학교수도 아니고 시간강사니까, 혹은 한국대학이 아닌 프랑스의 대학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어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거나 페미니즘 철학이라고 간판을 달고 강의하니까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은 그야말로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와 그녀를 지지하는 ‘여시(여성시대) 카페’의 같은 무리들이 법원의 판결과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도, 자신이 저지른 그 사소한 잘못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여혐논리로 악용하고자 하는 획책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재판을 통해 확인하지 않더라도 진작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실관계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서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시켰음을 인정하는 것은 페미니스트 이전에 소위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가 아니다. 모든 공부의 시작은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이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명확하게 분별하기 위한 안목을 갖추기 위한 과정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페미니즘보다는 훨씬 더 거시적이고 기본적인 것임을 그녀들은 과연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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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치꾼들의 잘못이 아닌, 뜬금없는 저 밑의 말도 안 되는 수준을 사례로 드느냐고 의아해할 학도들도 있겠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그녀들이 국정농단당시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와 사진을 찍고 SNS에 그 사진을 올리며 한 마디도 거들지 않았을까? 그녀들조차 자신들의 눈에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방만한 정치를 하는 정치꾼들이 썩어빠진 행태가 맘에 안 든다며 탄식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치꾼들을 욕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결코 보이지 않는 듯이 눈을 질끈 감는다.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배우지 못하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판단을 갖지 못한 구조적 모순의 피해자들은 그렇다 손 치더라도 시대가 변하고 사실관계 확인에서부터 기본이 되는 공부를 얼마든지 할 수 있음에도 그들의 행동이 무지한 자들보다 더 무식하고 기괴한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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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들은 결코 모르고 있지 않다. 왜 그런지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하면서 그저 국익을 우선하여 피해자 입장임에도 가해자에게 엎드려놓고, 다 내놓고서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으니까 뭔가 해줄 거라는 구걸모드까지 하는 데에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 이외에 그 어떤 이유도 만들기 어렵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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