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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도록 당신은 무엇을 쌓아왔던가?

지금까지 당신이 미래의 당신임을 왜 모르는가?

by 발검무적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이가 40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대로 끝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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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양화(陽貨) 편’의 맨 마지막 장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사회적 조화를 다각적으로 펼쳐 보였던 이 편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다소 직설적인 탓에 새삼스럽게 옷깃을 다시 저미게 되는 가르침을 보여준다.


굳이 마흔이라는 나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40대면 지금의 중년이 아닌 말년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정도의 나이이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쌓아온 존재의 특징을 바꿀 수 없는 말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스스로 돌아보건대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대로 끝장이라는 설명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갖는 특성상 일반론적인 설명보다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한 말이겠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동파(蘇軾(소식))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또한 까닭이 있어서 하신 말씀이나,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주자는 이 장에서 마흔이 갖는 의미와 공자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40세는 덕이 이루어지는 때인데,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여기에 끝날뿐이니, 사람들에게 제때에 미쳐서 선으로 옮기고 허물을 고칠 것을 권면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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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분히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이 장에서도 각별히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라는 표현이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짓을 한다는 것으로 새기고 간과할 수 있는 이 표현은 결코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표현이다.


앞서 다양한 일화에서 보였던 것처럼 공자 역시 사람들에게 늘 인기 있고 인정받고 추앙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상갓집 개라고 비아냥을 들어가면서 제대로 예(禮)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다는 미움 아닌 미움을 샀던 일화가 무수하게 있었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칠순을 넘기도록 자신을 살피며 공부하고 사회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공자의 인생이 끝장이라는 폄하를 받아야 옳을 것인가?


이와 같이 공자의 삶만 반추해 보더라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좋은 소리만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행간의 의미에는 어떤 뜻이 녹아들어 가 있는 것일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앞서 이 편의 24장에서 공자는 군자도 미워함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남의 악함을 말하는 자, 하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훼방하는 자, 용기만 있고 예의가 없는 자, 과감하기만 하고 융통성 없는 자를 미워한다고 했다. 이것이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미움의 구체적인 사례이고 설명이자 그 기준이다.


그 장에서는 공자의 구체적인 사례의 제시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자공(子貢)의 설명을 부연하는 것으로 공자가 사용한 ‘미움’이라는 용어가 세간(世間)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감정적인 용어가 아님을 명확히 하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탐지해서 그가 말하기도 전에 사실을 말해버리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거나 상대방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불손하고 교만하게 굴면서 스스로 용기가 있다고 여기며 상대방의 사적인 비밀까지 폭로하면서 스스로 정직하다고 여기는 자를 미워한다고 한다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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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해 보건대, 이 장에서 불혹(不惑)인 마흔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마흔이 되어서도 공자가 미워한 자나 자공이 미워한 자처럼 행동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니 행여 주변에서 인기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가슴이 뜨끔해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떠나 공자나 자공의 구체적인 사례에 해당되지 않는가를 살피는 것은 훨씬 더 모골이 송연해지는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성적매기는 일이 될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마흔의 나이를 설명하며 不惑(불혹)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하였다. 그 정확한 의미는, 나의 외부에 있는 명예나 부귀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理念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기(禮記)>에서는 마흔의 나이를 强이라고 했는데 마흔이 되어야 비로소 벼슬을 살고 공적활동을 할 수 있는 연령이라고 본 것이다. 어찌 보면 말년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완성하여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완숙기정도의 의미로 파악하고 설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앞서 공부했던 거백옥(蘧伯玉)의 케이스와 같이, 五十이 되어서야 지난 四十九年의 잘못을 깨달았다며 새로운 발전기를 맞았던 경우를 보더라도 그러하고 칠순이 되도록 능력이 없다고 아내에게 버림받고 그저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주군을 기다렸던 강태공(姜太公)의 고사를 생각하더라도 누구나 인생의 전기(轉機)가 있기 마련이니, 이 장에서의 ‘마흔’이라는 구체적인 수치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거백옥(蘧伯玉)이나 강태공(姜太公)이 마흔이 되도록 아무것도 갖춰놓지 못했다면 그들은 자기 인생의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흔이라는 시간은 태어나서 무려 40년이다. 백세시대라고 하는 현재를 생각하더라도 마흔이라면 이른바 자신의 주전공이라고 하는 기술을 이미 완성해서 먹고살고 있을 시기이고, 도덕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에 대한 가치관이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할 시기인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search.pstatic.jpg 거백옥(蘧伯玉)의 초상

어려서 처음 무언가를 배우면서 하는 실수를 마흔까지 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잘못된 습관을 고치지 못한 것이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바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옳다. 태어나서 40여 년이 될 때까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축적하게 되는 삶의 지혜 등은 온전히 자신의 형태로 공고히 자리 잡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 공자가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부른 이유이고 이 장에서 올바름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자질을 판단하는 시점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어디서 썩은 정치인들의 몹쓸 습관만을 배워서 자리에만 욕심을 내는 2,30대에 청년 정치인이라는 이들을 보면, 그들이 서른아홉까지는 그렇게 노쇠하고 사특하기 그지없는 정치 선배들의 꼴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마흔이 되었을 때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득도할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썩은 기득권을 차지하고 앉아 고약한 냄새를 피우고 있는 그 옛날 386세대들을 보면, 젊은 날의 정의에 대한 혈기만은 그나마 봐줄만했는데 이제는 그때의 정의감마저 잃어버린 채 그저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자신이 누리게 된 그 알량한 부와 지위와 명예를 자기 자식대에 어떻게 해서든 대물림하려는 꼴을 보노라면, 한숨을 넘어 땅이 꺼질 정도의 탄식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다.


굳이 공자가, 마흔이 되었을 때도 미움받을 짓을 하고 있다면 ‘끝장일 뿐이다.’라는 과격하고도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마흔이 완성의 정점이어서가 아니라 40년 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자신의 지향하는 방식대로 쌓아놓아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 다시 모두 허물어버리고 처음부터 쌓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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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기반이나 수양과정이라고는 전혀 없던, 빨간당의 스피커 노릇을 하던 젊은이가 청년최고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빨간당을 대표하는 젊은이인 듯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서 그가 듣보잡이던 시절부터 어퍼컷의 대선후보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인 듯 거들먹거리며 청년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을 꿰차는 그 과정과 동년배의 당대표와 난타전을 감수하면서까지 지금의 실세 정권에 바짝 붙어 헤헤거리는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졸 학력의 이 젊은이는 경성제대가 출신이거나 검찰출신이 아니면 중용하지 않는 현 정부의 성향상 이전의 빨간당 당대표나 파란당의 듣보잡 여자아이와 같이 소모품으로 사용하다가 전락할 공산이 크다. 빨간당이 당대표가 하버드 출신이라는 내세우기 좋은 스펙을 가지고 군바리 딸에게 발탁되었다가 지금 그 꼴을 당하는 것을 보건대, 그가 정치인으로 대성할 것이라고 점치는 이는 빨간당 내에조차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흔이 되기도 전인 이제 서른을 넘긴 지 몇 해가 되지 않은 지금이 끝장인 것일까? 이 장의 짧고 묵직한 메시지를 읽으며 공자가 과연 이 가르침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배우는 자들에게 던진 것을 이 글을 읽는 학도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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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한 것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기(轉機)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분명히 강조한 바 있다. 이제까지 방송에 나가서 젊은 나이를 내세우며 마치 지금 젊은이들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참람되이 말하는 후안무치한 정치적 스피커 노릇이 과연 젊은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일까?


물론, 마흔이 언저리에서부터 마흔을 훌쩍 넘은 이들조차, 조금이라도 그놈의 정치적 인지도를 챙기겠답시고 변호사라는 명찰을 차고, 교수라고 소개받고 기레기 언론에 나와서는 해외 토픽의 기사를 더듬거리며 읽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꼬락서니를 보고 롤모델로 삼아 정치판에 투신한 것이라면 더 해줄 조언은 없다.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떠드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소모품으로 실효기간을 잃어가고 있음을 버려지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앞서 해설한 바와 같이, 원문에는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상은 그 미움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내가 스스로 찾아 판단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의해 판단되는 것은 한참 늦어버리고 만다.


속 깊은 이야기 한번 나누지 않아도 한 번의 행동만으로도 타의 모범이 되는 이들이 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종이더미를 산처럼 리어카에 싣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가만히 뒤에서 미는 교복 입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느 늦은 밤시간 한강다리를 지나려는데 뜬금없이 다리에 매달려 투신하려는 교복 입은 어린 여학생을 보고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우고 달려가 아무 말없이 아이를 안아주는 이웃을 보면서 속이 뭉클해지는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를 잊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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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지검에서 인권감독관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던 부장검사급 고위 검사가 자기 자식이 저지른 학폭을 인지하고서도 자식을 꾸짖고 자식의 잘못을 혼내고 당장 피해자인 학생과 그 부모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지는 못할지언정, 자신이 평생 익힌 법기술을 통해 무려 10번의 법적조치를 취해가며 자기 자식이 반성문에조차 반성의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교정했다.


우스운 것은 그가 국가수사본부직이라는 상징적인 고위직에 지명되고 세간의 이름을 타고나서야, 그리고 경찰조직의 수장으로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인물이 오는 것에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버린 경찰 정보조직에서 아는 기레기를 통해 그 사건을 터트렸을 때에서야 그는 피해 학생과 그 학부모에게 죄송하다는 사죄를 표현했다. 경찰 정보조직에서 이미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그의 치부책을 가지고 있다가 마침 대박이 난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와 맞물려 사회적 파장을 핵폭탄급으로 하여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엄마, 그 주변에 동조했던 교사 및 기타 등등의 조연들은 얼마나 사회의 미움을 받고 있는가?


하지만,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당신이 대신 생각해 보라. 그들이 정말로 지금 과거 자신의 잘못을 뼈에 사무치게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지금은 군대에 가서 90일 후에 제대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의 그 아들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자기 집안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스캔들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맘껏 짓밟으며 비아냥거렸던 친구에게 반성의 마음을 눈곱만치라고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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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당시 그 사실을 알고서도 약자를 도와주지 못하고 정의에 눈감았던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동급생의 고백 담긴 편지가 훨씬 더 진실에 가깝게 심금을 울렸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통에 절박해하던 친구를 두둔해주지 못하고 방관했던 우리가 공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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