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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에 대해 항거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하여

당신은 커트라인을 넘겼다고 자부하는가?

by 발검무적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微子는 떠나가고 箕子는 종이 되고 比干은 간하다가 죽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殷나라에 세 仁者가 있었다.”
미자(微子)의 초상

이 장은 ‘미자편(微子篇)’의 첫 장이다. ‘미자편(微子篇)’의 편명이 된 미자(微子)와 다른 두 명의 인물을 언급한 것이 전부인 내용인데,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폭군이던 주왕(紂王)의 폭정의 시대에 인(仁)을 대표할만한 인물이라고 칭송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원문에서도 역사비평과 같이 공자의 언급이 그들이 인자(仁者)였다는 단 한마디의 평가만이 전한다.


이 장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행보가 저마다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왜 공자가 마지막에 셋의 행동을 평가함에 있어 모두가 인자(仁者)라고 했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먼저, 세 사람의 다른 행보에 대해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주자가 그 사실관계에 대해 배우는 자들을 위해 간략하게 정리한 주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微(미)와 箕(기)는 두 나라 이름이요, ‘子(자)’는 작위이다. 미자는 주왕의 庶兄(서형)이고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은 주왕의 諸父(제부; 숙부)이다. 미자는 주왕이 무도한 것을 보고 떠나가서 종사를 보존하였고 기자와 비간은 모두 간하였는데, 주왕이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어 종으로 삼으니, 기자는 인하여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치욕을 받았다.

폭군이던 주왕(紂王)은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주왕(紂王)은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녹대(鹿臺)’라는 화려한 궁궐을 짓고,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폭정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부정을 바로잡고자 했던 세 사람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 그저 신하가 아닌, 미자는 왕의 형이었고,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은 주왕의 諸父(제부; 숙부)였던 것이다.


주자가 미자(微子)에 대해 주석에서 庶兄(서형)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혹여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인가 오해할까 싶어 조금 정확하게 부연한다. 미자(微子)는 그의 모친이 아직 제을(帝乙)의 첩일 때 그를 낳았고, 그 뒤 본처로 승격(?) 되고 나서 주왕을 낳았기 때문에 비록 동생이지만 예법상 정통으로 인정받은 주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원문과 주석에서의 설명과 같이, 그는 주왕이 무도한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했으나 소용이 없게 되어버리자 주나라로 가버렸다. 은나라가 망한 후 주나라 무왕에 의하여 송(宋) 나라의 제후로 봉해져 송나라의 시조(始祖)가 된다.

기자(箕子)의 초상

종이 되었기 때문에 미친 모습을 보였다는 주자의 주석이 약간 순서상의 어패가 있는 기자(箕子)는 폭정을 바로잡고자 간하였지만 조카가 받아들이지 않자 머리를 막 풀어헤치고 기행을 하는 모습을 보이며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종적을 감춰버렸다고 한다. 일설에는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동쪽 조선(朝鮮) 땅으로 들어가 기자조선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전한다.


비간(比干)은 조카인 주왕에게 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신하 된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간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백성은 구제되지 아니한다.’라는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끈질긴 간언에 화가 났던 주왕은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다. 과연 비간의 심장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 알아보자’며 비간을 죽여 그의 심장을 확인하고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 일화로 이후, 주왕의 잔혹함은 눈덩이처럼 여러 전설(?)로 포장되었다고 후대 학자들은 전한다.


한 사람은 간하다가 통하지 않음을 알고 그 나라를 떠나버렸고, 또 한 사람은 끝내 간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마지막 한 사람은 결국 간하다가 갇혀 노예로 삼는 치욕을 겪게 되자 미친 척을 하며 지냈다는 것이 세 사람의 행보였다.

그 행보에 대해 공자는 왜 모두가 인자(仁者)라고 평가했을까? 주자는 그 행간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분석을 소개한다.


세 사람의 행실이 같지 않으나 똑같이 지성스럽고 惻怛(측달, 간절)한 뜻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사랑의 이치(仁)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의 덕(仁(인))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형이상학적인 냄새가 나는 ‘사랑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의 덕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설명이 확 와닿지는 않지만 대략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같았기에 그 행보가 다르고 결과가 달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같은 인(仁)의 길이었다는 설명이 될 듯하다.

양 씨(楊時(양시))역시 이 장의 본의를 그렇게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이 세 사람은 각각 그 본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똑같이 仁者(인자)라고 이르신 것이다.”


이 장을 읽은 학도들 중에는 미자(微子)가 가장 앞에 언급되어 이 편명을 차지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며 자신의 목숨을 가치없이(?) 내던져가며 들을 마음도 없는 폭군에게 간언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실리적인 판단이 최고라고 자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비간(比干)이나 치욕을 무릅쓰고 미친 행세를 해야만 했던 기자(箕子) 역시 똑같은 인자(仁者)라고 평가했던 공자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겠는가?


11장으로 구성된 ‘미자편(微子篇)’에는, 주로 은자(隱者)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앞서 공부하면서도 충분히 검증한 바와 같이, 공자는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저 은거하는, 전통적인 유학에서 칭송했던 은자(隱者)들의 행보에 대해 그다지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삶을 통해 반드시 은거하는 삶이 최상의 인(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음을 반증하였다.


공자의 시대에 위정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자신이 모셔야 할 주군의 잘못된 폭정을 접하게 되었을 때 소위 배웠다고 하는 자가 취해야 할 행보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 이 장을 통해 보여준 공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주군을 비롯하여 부모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보고 알게 된다면 당연히 그것에 대해서 잘못을 일깨워주고 진심 어린 간언을 통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바로잡는 것이 배운 자의 책무이고 도리라고 공자는 가르쳤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렇게 간하고 간해도 듣지 않는다면 오히려 관계를 그르치고 실질적인 변화도 추구하지 못할 바에는 어느 선에서 그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시중(時中)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었다.

세상을 살다가 겪게 되는 부정과 부패에 자신이 손해입을 것을 알면서도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으며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행동에 옮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그저 바보 같다고 왜 그렇게 인생을 무식하게 사느냐며 요령 없는 삶으로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만 산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반대로 언제나 실천하고 앞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의견을 따박따박 표현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사람들 뒤에 숨어서 눈만 껌뻑이고 있다고 해서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으니 당신도 공범이라며 그저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입을 피해와 세간의 주목을 생각하여 선뜻 나서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나선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또 다른 행동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르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부정을 범하는 자들에게 감시의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철퇴를 내리치는 분위기라면 경찰이나 검찰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공자는 정의구현까지도 필요 없고, 그저 자신이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책무만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사회는 바른 곳을 향해 돌아올 것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렇게 외치고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정자를 찾아 조국을 등지고 떠나 천하를 주유하며 평생을 수천수만의 이들과 평가와 설득의 대화를 가졌지만, 그는 자신이 원한 이상형의 위정자는 고사하고 그렇게 변화해 가겠다며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자가 포기했던가? 공자는 자신이 겪은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결국 새하얀 도화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자신의 학도로 가르쳐 피라미드처럼 올바른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고 제자양성과 저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말년을 바쳤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공자는 성현(聖賢)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공자의 사상으로 인해 세상이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오히려 공자가 걱정하던 그 당시보다 작금의 현실은 더 신랄한 인간의 욕정과 사리사욕을 위해 차마 못할 짓까지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행동들에 대해 정당성을 외치는 미친 위정자들이 세계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세상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특유의 민족성이 똑똑한 것으로 유명하여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의 정점에 절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유명한 유태인들의 본토, 이스라엘마저 우익 정권이 들어서 국민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시위로 드러내고 있다.


미친 쇼맨십으로 끝날 줄 알았던 트럼프가, 현명하기 그지없던 최초의 미국 여성대통령을 꿈꾸던 힐러리를 꺾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미국은 그간 가지고 있던 민낯을 세계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며 독재를 이어가는 시진핑과 푸틴의 권력 굳히기를 보며, 중세 봉건제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지속되냐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결국 그 나라의 결코 적지 않은 국민들은 그들을 나라의 수장이라고 여기고 산다.


우리나라는 무엇이 다른가? 밖에서 보았을 때는, 자신들이 피해자이면서도 간쓸개 모두 내놓고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대통령이 부정을 벌였을 때 촛불을 들어 탄핵까지 성공시킨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그런 대통령과 정부를 가만두고 지켜보는지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내두를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사상사를 되짚어보건대, 한쪽 날개만으로 날 수 있는 새는 없다. 전 세계의 정치판에는 좌익과 우익의 양쪽 날개를 펼치고 균형을 갖춰야만 날 수 있다는 정치논리를 모르는 자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독재자들과 지나친 우익이 설치며 정권을 잡는다는 사실은 정말로 세상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모든 일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총부리를 국민들에게 겨누고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 정권에게조차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권력을 잡고자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자는 없다. 그들은 모두 ‘힘없이 스러져가는 썩은 나라를 위해 내가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미얀마의 군부독재에 대한 반대시위

경찰과 검찰이 그리고 법원이 그리고 공직자가, 국회의원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자기 자식을 위해 적당히 인맥을 이용하고 테크닉(?)을 구사하여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제대로 된 정식 사과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미 유감의 뜻을 표한 바 있다고 하는 것이나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입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일본의 대변인처럼 ‘이제까지 일본이 많이 사과의 의사를 표했는데 굳이 다시 정식적으로 사과의사를 표명 안 했다고 뭐가 그리 문제 될 것이 있냐?’라고 하는 것은 오십보백보를 넘어 듣고 보는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장에서 다양한 방식의 항거 혹은 부정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에 대해서 모두 인정한다고 했던 공자의 평가에도 '절대' 커트라인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그저 침묵하며 눈치만을 보고 내 마음도 사실은 그렇다라고 무언의 지지를 보내겠다는 따위의 행동은, 행동하자며 궐기하는 글에 라이킷 누르고 댓글로 응원한다고 남기고 자기 할 도리 다 했다고 자위하는 공범들에 대해서는 결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만큼 추악한 동조는 결코 없다.

오늘의 당신이 인자(仁者)는 아닐지라도 내일의 당신이 그것을 향하려 노력은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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