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그저 웃는다.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齊나라 사람이 女樂(美女인 樂工)을 보내니, 季桓子가 이것을 받고 3일을 조회하지 않자, 孔子께서 떠나가셨다.
이 장은 바로 앞에서 공부했던 내용에서, 제 나라에서 공자가 떠나오게 된 일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연결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오해를 하는 초심자들도 더러 있는 편인데, 실제로 이 일화가 벌어진 시기는 앞의 일화에서 35살이던 공자가 55세가 되어 조국인 노나라를 끝내 떠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벌어진 B.C. 497년이다.
이 장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공자가 어떤 위치였고 노나라의 변화가 어떤 국면을 맞이하였는지에 대한 흐름을 조금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어 간략하게나마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로 한다.
노나라 정공(定公) 9년(B.C. 501년) 공자는 51세의 나이로 중도(中都)의 재(宰)를 시작으로 사공(司空)을 거쳐 드디어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가 된다. 그즈음 어느 사이엔가 열강의 중심이 되어버린 제나라와 협곡(夾谷)에서 회합을 할 때 노 나라의 위신을 대외적으로 세우며 주변 열강에 공자라는 존재감을 각인시키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사구(大司寇) 직에 오른 뒤 바로 악독하여 백성들에게 비난받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며 노나라의 기강이 바로잡히는 계기를 맞이하며 마침내 재상의 직무를 겸하게 된다. 그렇게 공자가 국정을 지휘하며 기강을 세워 나간 지 3개월째가 지나자 노나라에서는 도의(道義)에 의한 질서가 바로잡히게 되었고, 사특한 무리들은 감히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펼쳐 사회를 어지럽힐 생각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며, 남녀가 길을 갈 때에 길을 달리 하게 되었고, 길에 물건을 흘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게 되었으며, 외지에서 도성에 찾아온 사람들은 관리의 도움을 따로 구하지 않아도 마치 자기 마을에서 지내는 것과 같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한다.
노나라가 그렇게 안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그렇지 않아도 천하에 유명세를 떨친 공자가 그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주변 나라부터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연히 주변 열강국의 군주와 모사(謀士)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나라와 가까이 있던 제나라의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던 노나라의 약진이 급격한 번성으로 이어져 자신들을 위협하게 되지 않을까 긴장하게 되었다.
어제 공부했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영(晏嬰)'이라는 걸출한 제나라의 재상이 어쩌면 속좁아 보일 정도로 서른다섯의 공자를 견제하며 제나라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했던 데에는 이와 같은 다각적인 원인이 작용했던 것이다. 어제 설명한 바와 같이 안영(晏嬰) 역시 공자가 훨씬 더 크게 될 인물임을 이미 파악했기 때문에 견제한 것이지 만약 공자가 그닥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간언을 해가면서 공자를 견제하고 내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미 서른다섯 살이었을 즈음에도 공자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가 얼마나 더 큰 인물이 되어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인지를 파악한 안영(晏嬰)의 안목도 안목이었지만 그때로부터 이미 20여 년이 지나 무르익을 대로 익어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노나라의 면모를 변화시키고 재상까지 겸임하며 노나라의 위상을 바꿀 정도의 상황이 되자 제나라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에서는 미녀 80명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강악(康樂)에 맞춰 춤을 익히게 하고는 좋은 말 120 필과 함께 보내어 곡부(曲阜)의 성 밖에 정렬시켰다. 당연히 그 이유는 노나라가 패권(覇權)을 쥐게 될까 봐서였고, 여색(女色)을 대놓고 투입시켜 노 나라의 정치를 훼손시키려고 80명의 미녀 악단을 보낸 것이었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은 미녀들만 골라 그것도 아주 음란하고 자극적인 춤을 익히게 하고 화려한 장식을 한 수레와 말을 보낸 것은 지금으로 치면, 미녀에 더해 멋진 브랜드의 외제차를 선물로 보내온 셈이다.
이 일행은 노나라 성 남문 밖에 자리 잡고는 수레와 말은 요란하게 늘어놓고, 무희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노나라 상경대부(上卿大夫)였던 계환자(季桓子)는 그 모습을 직접 보겠다고 기다리지도 못한 채, 미복(微服) 차림으로 달려가 구경하기를 몇 차례나 하였고, 드디어 노나라 군주 정공(定公)에게까지 권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나라의 군주와 실권자들은 모두 그 설물과 함께 술과 음악에 빠져 탐닉(耽溺)하면서 조정(朝廷)의 정치를 사흘이나 중단하게 된다.
이러한 당시 역사적 상황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자세히 전한다. 이 장은 그러한 상황을 목도한 공자가 도저히 노나라에서 자신의 개혁이 지지받지 못하고 제대로 힘을 받쳐줄 군주도 위정자도 없음에 좌절하여 바로 조국인 노나라를 버리고(?) 천하주유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위의 긴 설명을 주자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해설하는 것으로 정리해 준다.
계환자는 노나라 대부이니 이름이 斯(사)이다. 《史記(사기)》를 상고해 보건대 정공 14년에 공자께서 노나라 司寇(사구)가 되어 정승의 일을 攝行(섭행, 대행)하시니, 제나라 사람이 두려워하여 女樂(여악)을 보내어 저지하였다.
공자가 단 3일(?)이긴 했지만, 제나라의 획책에 여색과 술에 빠져 조정의 정사를 소홀히 하는 모습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군주를 손절하고 아예 조국 노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고 천하로 발길을 돌려 밖에서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사람이고 여색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이니 3일 정도 새로운 장난감(?)에 빠져 정사(政事)에 소홀한 것만으로 법무부장관 및 재상직을 때려치우고 그 나라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공자의 행동이 너무 파격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평범한 초심자들을 위해 윤 씨(尹焞(윤돈))는 왜 그렇게까지 공자가 결정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악을 받고 정사를 태만히 함이 이와 같았으니, 어진 사람을 소홀히 하고 예를 버려서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夫子(부자)께서 이 때문에 떠나가신 것이니, 이른바 ‘幾微(기미)를 보고 일어나서(떠나서) 하루가 지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석에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일화로 소개하기는 했지만, 공자는 다각적으로 여러 일화를 통해 그들이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하여 함께 천하를 도모할 수 없음을 누차 느끼고 있던 차에 이 일이 결정적인 트리거 역할을 했을 뿐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자편(微子篇)’의 3번째 장이기는 하나, 이 편의 전체적인 대의(大意)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다소 감을 잡지 못하고 갸웃해할 초심자들을 위해 범씨(范祖禹(범조우))가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이 편은 인자와 현자의 출처를 기록하고 성인의 행실로써 절충하였으니, 중용의 도를 밝힌 것이다.”
이 편을 시작하며 간략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미자편(微子篇)’에는 위정자들의 출처(出處)에 관련된 일화들을 주로 보여주며 정답이라고는 있을 수 없으나 과거 선현들이 보였던 일화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범을 따라야 할지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편에서는 본의 아니게(?) 전통유학에서 숭상하는 은자(隱者)들에 대한 일화와 언급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마지막 처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공자세가(孔子世家)’를 통해 다시 살펴보자. 원문에서와 같이 계환자와 정공이 정치를 소홀히 하며 3일 조정회의에 나오지 않은 다음날 바로 공자가 모든 직을 내려놓고 노나라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스승 공자의 마뜩잖은 표정을 읽은 자로(子路)가 욱하는 마음에 바로 노나라를 떠버리자고 권하였으나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얼마 안 있어 노나라에서 교제(郊祭; 성 남쪽 들에 나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사)를 지내게 되는데, 군주가 번육(膰肉;제사에 쓴 익힌 고기)을 대부들에게 나눠주는 예법만이라도 제대로 지킨다면 좀 더 노나라에 머무르도록 하겠다. 그렇게만이라도 한다면 노나라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공자는 사실 이 장의 일화를 계기로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였으나 바로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조정을 떠나게 되면 자기가 이제껏 섬겨왔던 군주의 현명하지 못함을 온 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되므로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고 주변 정리를 하면서 떠날 기회를 엿보았던 것이라 하는 분석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의 예언(?)처럼 교제(郊祭)가 거행된 후 정공이 대부들에게 희생의 고기를 나누어주어 오던 음복(飮福)과 같은 관례(慣例)를 지키지 않는 일이 발생했고, 공자는 재상의 일을 대행하는 자신의 책임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자연스럽게(?) 구실을 마련하여 마침내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공자가 타국이던 제나라에서까지 자리를 잡고자 하였으나 결국 노나라 재상인 안영(晏嬰)의 견제에 의해 배척되고난 뒤, 무려 20여 년이나 지나 수많은 부침 끝에 겨우 조국 노나라의 법무부장관 겸 재상의 자리에 올라 이제 겨우 나라를 바꾸고 천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부풀어 올랐던 그 정점의 나이 55세에 공자는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에 대한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 년 전 중국의 기록이긴 하지만 지금 그 상황을 이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자가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속이 상하고 아쉬움에 치를 떨었을지 그 마음을 모두 헤아릴 길이 없다. 그것은 이미 기록을 통해 그가 이후 겪을 천하주유에서의 고생 끝에 중국 천지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뜻을 함께 이뤄줄 군주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지못해 조국을 떠나야 하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공자가 막연하게나마 천하의 어디엔가 자신을 받아줄 그릇의 군주가 있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은 확신이 아니었을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꾼들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천지차이가 아닐 수 없다. 뇌물을 받은 사실이 적발되어 법적으로 자격조차 박탈당해 국회의원 배지를 빼앗기고 같은 당에서 공천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해 떨궈졌거나, 말도 안 되는 언행으로 지탄을 받아 국민들에게조차 선택받지 못했던 자들마저 국민들이 개돼지라 금세 잊는다며 그저 존버하겠다고 여의도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인지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무슨 방송이라도 얼굴을 들이밀며 그 권력의 중독성을 떨치지 못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공자의 출처관이라 할 수 있겠다.
공자의 발톱에 낀 때만큼도 흉내 내지 못할 자들이, 몇 선의 국회의원출신 입네 하며, 혹은 모든 직군의 상위 정점으로 인정받은 검찰출신이라며 대한민국의 고위 공직자에서부터 여의도의 국민들의 공복(公僕)이라는 가면을 쓰고 국회의원직을 누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어느 정치꾼이 과감하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모두가 죽는다며 자신의 잘못이라고 선언하고 그 자리를 던진 자가 있었던가? 파란당과 이전 정부가 밉고 눈꼴셔서 기껏 뽑아줬더니만 1년밖에 안되어 나라꼴이 이게 뭐냐고 항변하는 국민들에게 여당의 최고위원이라는 작자가 당당히 ‘그러면 사기꾼 같은 파란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 살아보지 그러냐?’라고 반문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버젓이 생중계보도가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의 최측근임을 대내외적으로 떠들며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나댄 자가 행안위원장 자리에서 권위의식에 쩔어 같잖은 고성을 지른 것에 균형(?)을 맞추겠다며, 이미 차기 총선불출마를 선언한 파란당의 다선 위원이 잘못에 대해 호통친 것을 나란히 보도하는 기레기 언론의 밸런스 감각을 보며 어이가 없다 못해 맷돌째 내던질 뻔했다. 아이를 호되게 훈육하는 것과 아동학대를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작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도와주지 못하는 대한민국 검경의 행태와 아주 쏙 닮아있어 구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정부와 여당은 죽을 쑤고 있는데, 엄한 소리로 사죄까지 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미국까지 강연 가서 다시 그 사이비 목사를 추켜세우며 광화문을 중심으로 우익을 천하통일 해주어서 편하다고 헛소리를 하는 자가 빨간당의 X맨이 아니라 최고위원이라는 점은, 늘 그렇듯이 그들의 정체성을 아주 명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이 늘 한결같다는 사실은, 어느 한 명 책임을 통감하고 자리를 내놓고 떠나는 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