齊나라 景公이 孔子를 대우하며 말하기를 “季氏와 같이 대우함은 내 하지 못하겠으나 季氏와 孟氏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 하고는 〈다시〉 “내가 늙었으니, 〈그의 말을〉쓰지 못하겠다.”라고 하자, 孔子께서 떠나가셨다.
이 장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에 따르자면, 공자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이제 자신의 뜻을 막 펼치겠다고 세상에 투신하기 시작할 즈음이던 서른 중반에 있었던 일화를 묘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조금 더 정확하게 고증해 보자면, 공자가 노나라의 소공과 함께 제나라에 갔던 것은 B.C. 517년이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 B.C. 515년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증에 따르자면 제(齊) 나라 경공(景公)의 나이는 당시 예순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앞서 공부했던 ‘공야장(公冶長) 편’의 16장과 ‘안연(顏淵) 편’의 11장에서 살펴본 바 있어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공자에게 마치 홀대가 아닌 듯이 홀대를 시전 하여 공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떠나게 만든 제(齊) 나라 경공(景公)이라는 인물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안연(顏淵) 편’의 11장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시각으로도 묘사되는 듯했지만, ‘계씨(季氏) 편’의 12장에는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비교되며 형편없는 평균 이하로 묘사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의 그가 보인 언행이 갖는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워할 이들을 위해 주자는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
노나라 三卿(삼경) 중에 계씨가 가장 귀하였고 맹씨는 下卿(하경)이었다. 공자께서 떠나가신 일은 《史記(사기)》〈孔子世家(공자세가)〉에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반드시 공자를 대면하여 말한 것이 아니요, 스스로 그 신하에게 말한 것인데, 공자께서 들으신 것이다.
사실 주자의 해석을 보더라도 원문에서 제 나라 경공이 보인 언행이 무엇이 그렇게 우유부단한 것이며 왜 공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떠났는지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정보가 부족할 것이다.
그 빠져있는 퍼즐을 채우기 위해서는 일단 당시의 상황을 먼저 명확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원문에 사용된 대접의 등급을 표현하는 ‘季孟之間’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季孟은 노나라의 三卿(삼경) 중 계씨와 맹씨를 가리킨다. 여기서 삼경이란, 앞서 <논어(論語)>를 공부하며 공자가 노나라의 가장 유력한 권력가들을 의미하는 말로, 이른바 ‘三桓(삼환)’이라고 불렸던 이들이다. 구체적으로는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의 집안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그들의 권력과 지위 고하(高下)도 같은 그 순서였다.
다시 말해, 원문에서 경공(景公)이 공자에 대한 예우의 등급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우하겠다는 말은, 삼경 중 으뜸이었던 계씨의 수준으로 대우할 수는 없지만 下卿(하경) 정도의 대우로 공자를 대우해 주겠다는 말이라고 주자는 해석하였다.
앞서 간략히 설명한 바와 같이, 공자는 노나라의 정변을 피해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이제 막 세간에 예(禮)의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져 천하에서도 공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래서 경공(景公)은 공자의 명성에 걸맞게 최고대우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2등급 대우를 하는 것은 너무 홀대하는 것 같으니 그 사이의 대우를 하겠노라고 말을 뭉뚱그린 셈이다.
공자가 만약 이 워딩에 발끈하고 그를 손절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며 공자의 그릇이 성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정도로 원문을 오독하고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문해력부터 차근히 키워나갈 필요가 있으니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정작 그렇게 대우하겠다고 공언했던 경공(景公)은 손님대접이 소홀해지기 시작하더니, 공자의 처소를 드나들던 제나라 신하들까지도 차츰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결론이 이 장의 마지막에 구차하기 그지없는 경공의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경공(景公)은 실제로 재위기간이 무려 58년간이나 되었던 롱런한 군주였다.
굳이 그의 기나긴 재위기간을 설명한 이유는, 그가 공자에게 이 같잖은 변명으로 그를 쓰지 못하겠다고 해놓고서도 무려 25년이나 더 재위했음을 명확하게 지적하기 위함이다. 즉, 말년이라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정계에서 물러나 훌륭한 후계자에게 선위를 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아서 쓸 수 없다고 헛소리를 떠들어놓고서 무려 25년이나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 것이다. 공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냥 잘라내면 그만이었을 것을 왜 처음에 계손씨 다음의 대접을 하겠다고까지 호들갑을 떨면서 공자를 붙잡을 것처럼 굴었는가 하는 점이다.
안영(晏嬰)의 초상화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당시 제 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안영(晏嬰)의 견제와 질투로 인한 필사적인 저지와 방해에 있었다. 주자의 해설과 같이 원문에서 경공(景公)이 자신이 늙었으니 도저히 공자를 중용할 수 없다고 한 말은, 그나마 공자를 불러 예를 갖추고 공자에게 전달한 의사도 아니었다. 그가 신하에게 전하는 말을 제삼자를 통해 공자가 나중에 듣게 된 것이다.
현대드라마의 장면으로 그려보자면, 회장이 중용하겠다고 약속하여 문밖의 로비에서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데, 회장실에서 회장이 비서실장에게 큰소리로 떠들며 그렇게 전하라는 말이 공자에게 전해지는 그야말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공자가 경공(景公)에게 실망한 것은 자신을 천하의 현인으로 VIP급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서가 아니었다. 어떤 홀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만 준다면 그 가치이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자신이 있는 혈기방장한 30대였고, 그만큼 자신감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였던 경공(景公)에게 가졌던 마지막 기대감이 중간에서 그의 곁을 지키던 안영(晏嬰)이라는 재상의 농간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만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물론 안영(晏嬰) 이전의 노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안영(晏嬰)이라는 재상의 그릇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간파하지 못할 공자도 아니었다. 공자가 기대를 가졌던 것은 경공(景公)이 그러한 외재적인 사소한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중용해 줄 만한 그릇이 되는 군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모두 인지하고 이해한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공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공(景公)을 손절하고 떠난 이유를 설명한다.
“계씨는 강성한 신하이니, 군주가 그를 대우하는 예가 지극히 융숭하였다. 그러나 공자를 대우한 것이 아니요,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 대우한다면 예우가 또한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내가 늙었으니 쓰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떠나가신 것이다. 이는 대우의 경중에 달려 있지 않고, 다만 〈공자의 말씀을〉 쓰지 못한다 하였기 때문에 떠나가셨을 뿐이다.”
대우가 훌륭하든 아니면 미관말직이든 공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일을 맡겨줄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다음은 자신의 능력으로 가치를 증명해 보일 자신감이 있었던 혈기방장한 30대였기에 더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곁에서 뭔가 기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함에 공자는 과감하게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공자에 대한 인사박대는 이렇게 서막을 올린다. 공자 자신조차도 35살에 시작된 이러한 상황이 칠순을 넘어 자신의 인생을 마칠 즈음까지 이어질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넓은 중국 천하의 단 한 명의 위정자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써줄 군주가 없을 것이라 예감하고 확신했다면 아무리 성인 공자였다 하더라도, 그 험난한 인생 여정을 묵묵히 걷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를 등용하는 일에 있어 필사적이었던 당시 재상, 안영(晏嬰)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궁금함을 가질 학도들이 있을 듯하여 간략하게 그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사실, 이 장만 보고, 위의 간략한 설명만 들으면 안영(晏嬰)이 마치 공자 같은 큰 그릇을 질시한 찌질한 인물정도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에서 백이숙제 바로 다음으로 관중과 함께 실린 비중 있는 인물로, 사실 그는 이 장의 사건과는 별개로 제나라에 있어 명재상이었고, 심지어 이후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인물로 평가되어 ‘안자(晏子)’라고 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수천 년이 지나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 빨간당의 어린 당대표가 대통령이 된 이와 그 무리를 비판할 때 사용했던 양두구육(羊頭狗肉;양의 머리를 간판에 걸고 개의 고기를 판다)의 근원이 된 사자성어 ‘우두마육(牛頭馬肉)’를 처음 언급하며 처음으로 섬겼던 제 나라 영공이 정신을 번쩍 차리도록 했던 일화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는 제 나라 장공(莊公)을 과감하게 떠나 시골에 은거하고 지냈는데, 장공이 자신의 사부이자 자신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재상 최저(崔杼)의 미모의 처와 사통한 것이 원인이 되어 최저(崔杼)가 장공을 죽여버리고 장공의 이복동생 공자 저구(杵臼, 이후 제 경공(景公))를 군주로 옹립하게 된다.
이때, 반대파를 억누르기 위하여 모든 신하를 제나라의 시조 태공(太公)을 모신 사당에 모아놓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들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할 것을 요구하고, 맹세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러나, 안영(晏嬰)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군주와 공실을 편들지 않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드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하였다. 최저는 이에 격분하여 안영을 죽이려 하였으나 좌우에서 가신들이 ‘군주를 죽인 데다 명망 높은 안영마저 죽이면 민심이 등을 돌릴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며 만류하자 안영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이에 안영은 ‘큰 불인(不仁)을 저질러놓고 작은 인을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유유히 돌아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안영(晏嬰)은 경공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치열한 정권다툼 끝에 경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며 재상이 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 나라 경공이라는 인물은 본래 노는 것만 좋아했던 우유부단의 대명사로 안영의 수많은 간언으로 겨우 제나라 국사를 지탱한 자였다. 그 상황과 구체적인 간언들과 안영(晏嬰)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이 담긴, <안자춘추(晏子春秋)>전편에 걸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제나라는 안영에 의해 춘추오패의 필두였던 제 환공의 시대를 다시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듣고 있던 터였다.
왜 안영(晏嬰)이 그리도 공자를 견제했는가에 대한 부분은 <안자춘추(晏子春秋)>의 당시 기록을 보면, 표면상(?)으로는 유학을 하는 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양한 기록을 살펴보건대, 안영(晏嬰)은 공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누구보다 가장 먼저 확실하게 알았던 인물이었다. 이른바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점에서 안영(晏嬰)은 자신에게 예(禮)를 가르친 현인 월석보보다도 공자가 현인 중의 현인이라고 제경공에게 평가한 바 있다.
추측컨대, 외교의 고수였던 안영(晏嬰)은 같은 산에 호랑이가 둘 일수 없음을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고, 공자가 제 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경우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균열이 생길 것을 충분히 예감하고 불안해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학계의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가 하버드나 서울대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정말로 그 분야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정부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이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아니, 최고점은 고사하고, 외국 현지교수들과 세미나장에서 만나 제대로 소통하지도 못하는 해당 외국어 학과 교수가 전국 지방에 발에 채이는 상황이나 미국에서 학위를 받아왔다는 경영학과나 공대 교수가 영어로 논문을 쓰고 콘퍼런스를 주체하지도 못하는 일이 왜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니 뭐니 하며, 나랏돈으로 일해야 할 시간에 버젓이 공무출장을 빙자하여 코로나 엔데믹에 신나게 휘파람을 부르며 해외 유명 관광지로 날아가 외유를 즐기는 지방의원들에게, 공항에서 마주친 외유 국회의원단들이 무슨 낯으로 쓴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 한심한 자들에게 배지를 달아준 것은 결국 당신이었으니 당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