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댐으로 바람을 쐬러 가자는 함께 침대 쓰시는 분의 요청(?)에 따라 운전을 하고 막 하남 톨게이트를 나올 즈음의 일이었다.
낡은 하남 톨게이트는 입구가 3개였는데, 하필 설연휴 첫날이라고 고속도로비가 면제된다는 이유였던지 차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렸다. 문제는 톨게이트 통과구역은 3개인데 바로 50미터도 가지 않아 출구차선이 하나로 쏠리는 이른바 병목 구역이라는 고질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거였다.
2차선에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10킬로도 되지 않는 거북이걸음으로 병목을 향하는 차들 사이에 천천히 1차선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틈이 생겼음에도 뭘 하는지 진행하지 않는 1차선의 지프 랭글리를 보며 그대로 1차선에 진입하려고 하는데, 굉음에 가까운 엔진음을 내며 그 짧은 거리를 지프가 확 다가섰다.
아무래도 접촉사고 나기 딱 좋겠다 싶어 급정차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비롯한 동승자 3명은 손목이 꺾이거나 머리를 부딪힐 정도의 급정차였다. 그런데 그 차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운전석 쪽의 사이드미러를 향해 오더니 기어코 사이드 미러를 아작 내며 유유히(?) 도주해 버렸다.
아마도 앞의 병목구역에 멈춰 선 차들 때문에 달릴 수도 없었지만 자신도 접촉사고를 의식했는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면서도 접촉사고가 났는데도 그냥 도주한 것이었다. 어차피 병목구역을 빠져나가지 못한 터라 클락숀을 눌러 사고가 났음을 알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차에서 내려 몇 미터를 뛰어가 그 차를 세웠다.
그는 뭐가 찔렸는지 차문을 열고 나오며 준비된 멘트를 내질렀다.
"내가 1차선이니까 우선권이 있어서 그냥 직진한 건데 뭐가 문제예요?"
"차를 치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합니까?"
어지간하면 접촉한 것은 죄송하게 되었다고 사과하고 대물처리하겠다고 보험사를 부르는 것으로 원만하게 보내줄 만도 한 상황이었다. 뒤에서는 차를 빼라고 빵빵거려 대는데, 일단 옆 공간으로 차를 세워두고 그와 다시 마주했다. 지프에서 내린 그가 나를 부른 호칭은 그의 입에는 아주 익숙하겠으나 나에게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사장님'이었다.
"사장님 차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내 차는 멀쩡한대."
휀다가 근육질처럼 육중한 플라스틱 커버로 높이 올려진 지프 랭글러는 세단인 내 차의 사이드 미러를 손톱으로 잡고 뒤집듯 안에 내장된 자동조율장치 억지로 잡아 뜯어 아작을 냈는데 사이드 미러 유리가 깨지지 않았으니 그의 눈에는 멀쩡하다고 보였던가보다.
"댁의 차가 멀쩡하다고 내 차도 멀쩡할 거라 생각하면 안 되죠. 보험사를 부르실 건가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까지 할까요?"
"아! 맘대로 하세요. 다 불러! 불러! 사장님도 보험사 부르세요!"
"보험사를 불러서 대물처리하고 사과할 맘이 없다는 거죠?"
다시 명확하게 그의 의사를 물었다. 아마도 그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밀리거나 사과하면 끝이라고 잘못된 교과서에서 배운 듯했다.
"나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건데, 사장님이 신고할 거면 해보세요."
그가 감정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너무 명확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섣불리 조언한다는 것 자체가 상황이나 입장상 그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도 자명했다. 그래서 그가 전화하다가 말고 건네주는 상대방 보험사 현장출동 직원의 전화에 대고 말했다.
"그쪽 차량은 아무런 손실이 없다고 이미 이 사람이 말했고, 내 차만 사이드 미러가 상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급정차하느라 나랑 동승자들이 다치기는 했는데, 계속 자기가 아무런 잘못 없다고 따지겠다고 하고 경찰에 그냥 신고하라고 하는데, 일 크게 벌이기 싫으니 그쪽에서 잘 타일러서 수습하시지요."
나름 나이를 먹은 중년의 아저씨 목소리가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
"일단 그쪽도 보험사를 부르시구요. 경찰에 신고하실 거면 그냥 하시라고 하니 하세요. 그리고 저는 현장 출동직원이라 굳이 뭘 중재하거나 일이 커질 거라고 우리 쪽 고객님한테 설명해 드릴 입장이 아닙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굳이 자기 회사의 손실을 따져봐야 자기 주머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대놓고 튕겨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쪽에 대인 대물피해,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당사자가 말하는데 내가 왜 우리 쪽 보험사를 불러야 하지요?"
"네?"
그가 어물거리며 대답을 못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거야 보험사끼리 얘기를 하는 게 말이 빠르니까...."
"됐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테니 그렇게 하죠."
그렇게 112를 부르니 고속도로 상이라도 고속도로순찰대가 한참을 있다가 도착했다. 법적으로는 엄밀히 뺑소니 신고였고, 만약 사고자가 인지하지 못했다고 우겨대더라도 최소한 사고 후 미조치가 되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설렁설렁 동승자를 파악하고 조서를 적어달라고 하고 신분을 기재한 후 자리를 떴다. 황당한 것은 먼저 도착해 있던 상대방 현장출동 직원과 똑같은 말을 출동경찰도 반복했다.
"그냥 사고 났으니까 본인도 보험사를 부르면 보험사직원들끼리 고순대(고속도로 순찰대)에 와서 알아서 처리할 텐데요. 그렇게 하시지 굳이 직접 하시면 귀찮으실 텐데요."
"내가 가장 잘 아니 내가 처리하는 게 더 낫습니다."
그러면서 조서의 마지막에 경찰 측이나 상대방 측에 본인의 보험사 정보를 알려주는 것에 동의하냐는 부분이 있어 모두 동의 거부하겠다고 표기를 했더니 경찰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대로 사라졌다. 남아있던 상대편 보험사 직원도 자기는 현장 출동 확인만 했고, 경찰에 신고했으니 경찰에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자기가 뭐 해줄 것은 없다며 명함은 고사하고 신고번호조차 남겨주지 않고 사라졌다.
어이없는 일은 그가 다가 아니었다. 겨우 서막이 오른 것뿐이었다.
마침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가 고장이 나서 내쪽의 자료는 없었고, 무엇보다 있다 하더라도 측면이었기 때문에 영상을 정확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바로 뒷차량의 블랙박스를 확보하던가 주변 cctv를 확보해야만 했다. 연휴의 시작일이었기에 사고 조사 담당이 고순대에서 배정되는 것도 한참 걸린다고 해서 하루가 지나 밤에 출근한다는 담당에게 전화를 자정이 다되어 걸었다.
"죄송한데, 측면 사고라 영상자료를 확보해야 하는데, 뒷차량의 블랙박스나 톨게이트 cctv 자료가 삭제되기 전에 긴급하게 확보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연휴인데 뭐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 아까 상대방 보험사 직원에게서 그쪽 운전자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했는데요. 이 차가 1차선이라 그냥 직진하는데 선생님이 2차선에서 들어오시려고 하는 영상은 있거든요. 그러면 선생님이 잘못한 거예요."
"네? 그 차가 접촉하기 전에 나는 차를 정차했고, 정차한 상태의 내 차를 그 차가 접촉하고 도주하는 걸 내가 가서 잡았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
"그건 뺑소니이거나 최소한 사고 후 미조치입니다. 그 사람은 도주하다가 나한테 잡혔어요."
"아니, 그건 선생님 말씀이고 이 사람은 차가 닿은 줄도 몰랐답니다. 그래서 그냥 가려고 하는데 잡았다고 하던데요."
"그럼 가장 중요한 게 내가 차를 급정차했다는 것과 정차한 상태의 내 차를 그 사람이 치고 도주한 거니까 영상이 더 중요하겠네요. 영상 보존기간이 짧으니 최대한 빨리 확보 부탁드립니다."
"아이 귀찮게... 하여간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에게 설연휴 내내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그는 하루 야간 근무를 하고 이틀을 쉰다며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그리고 연휴가 다 끝나던 마지막 날 그에게 연락이 왔다.
"일단 뒤에 있던 차량을 조회해서 연락이 되었어요. 나이가 많으신 분인데 그분한테 블랙박스를 근처 경찰서에 제출해 달라고 했으니 조금 기다려보세요."
그리고 연휴가 끝난 다음 날, 그에게 전화가 와서는 심드렁한 변명이 터져 나왔다.
"죄송한데, 이미 그 블랙박스에는 영상이 다 지워졌답니다. 날짜가 많이 지났잖아요."
"톨게이트인데 거기 cctv가 없나요?"
"네? 지나간 차량의 번호를 조회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영장을 청구해야 하고, cctv 같은 건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방 운전자한테 후면 블랙박스 영상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후면만 고장 났다고 하면서 자꾸 자기 귀찮게 하면 인피 접수하고 병원에 들어가 드러눕겠답니다."
"뭐라구요? 접촉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뺑소니 혐의를 부인한 피의자가 그 사고로 대인 접수를 하고 병원에 간다고 하면 그건 자기 뺑소니 사실을 인정하는 거 아닌가요?"
"에? 아니 그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도로공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하남 톨게이트의 전면을 비추는 cctv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영상은 3일밖에 보관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고순대의 사고 처리 담당자가, 대놓고 그 자료를 확보해 달라고 사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요청했는데, 그걸 몰랐다고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톨게이트 위에 cctv가 있는데 영상보관기간이 3일밖에 안되어서 이미 삭제가 되었답니다. 그거 요청해서 받으면 되는데 굳이 뒷차량까지 조회해서 연휴 다 지나서 받아보네 마네 하다가 영상이 없다고 하는 건 내가 어떻게 이해하면 됩니까?"
"네? 아니 영상이 3일밖에 보존이 안 되는 게 제 책임은 아니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내가 전화했을 때 바로 확보요청했으면 그냥 확보되는 거잖아요?"
"지금 다 지워져서 없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그런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게다가 지금 상대방이 병원에 간다고 대인 신고하겠다고 하는데 계속하실 거예요? 어차피 대인 사고가 아니라서 그냥 여기서 접으시면 끝납니다."
"뭐라구요?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립니까? 그게 지금 사건 담당 경찰이 할 소리입니까? 사건을 덮으라고 나한테 강요하는 거예요?"
"아 모르겠고, 잘 생각해 보고 알려주세요."
그 길로 하남경찰서장실에 전화를 걸고, 해당 조사관이 속해있는 고순대 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그와의 통화녹취를 보내주겠다고 한바탕 했더니 정황을 조사하고 다시 대장에게 전화가 와서는 해당 조사관이 해서는 안될 언행을 한 것을 인정하니 녹취까지 공개할 필요 없이 주의조치하고 다른 경찰로 조사관을 교체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내 보험사라며 전화가 왔다.
"선생님. 1월 21일 차 사고나셨다구요. 상대방 운전자가 지금 저희 회사 측에 전화를 해서는 대인접수하겠다고 사고를 접수했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급정차로 인해 대인 접수도 못하고 직접 돈을 내고 병원을 갔었는데, 나는 보험접수를 한 적도 없고, 경찰에 내 보험사 개인 정보 동의를 하지 않겠다고까지 표기했는데, 상대방 운전자가 경찰에게 정보를 받았다면서 직접 대인 사고 접수를 하고 병원에 갔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사건의 정점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본인과 딸아이, 그리고 뒷좌석에 노부모님이 두 분 타고 계셨다면서 네 명을 접수하셨습니다."
"현장에 뺑소니 신고받아서 온 경찰이 동승자 확인했을 때 딸아이와 두 사람뿐이었는데요."
"네?"
"정말 어이가 없네요. 게다가 내가 뻉소니 신고를 했더니 자기는 사고가 난 지도 몰라서 도주가 아니라 그냥 현장을 이탈했다고 진술했는데, 이러면 이거 보험사기까지 인정되는 거 아닌가요?"
"아! 현장 진술조서를 확인해 봐야겠지만, 선생님 말씀이 맞으시다면 그건 명백한 보험사기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실확인해 보세요. 저는 현장 경찰과 담당 조사관에게 그쪽 동승자가 운전자와 딸아이 두 둘 뿐이라는 사실진술을 녹취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대인 신고로 사건이 확대되면서 사건은 고순대(고속도로 순찰대)가 아닌 경찰서 교통수사계로 정식 이첩되었다. 그런데 2월 내내 해당 경찰서의 담당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담당이 연가를 이어서 써가며 여행하고 쉬느라 일주일 있다가 나온다고 했다가 일주일이 지나도 메모를 남겼음에도 연락을 오지 않았다. 서너 번이나 동일한 통화와 메시지를 남겼음에도 연락이 없어 나중엔 너무 화가 나서 교통수사계장에게 직접 연락해서 이 업무태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고 했더니 자기가 대신 사과하겠다며 제대로 연락드리고 조속히 처리하겠다고 전화에 메시지에 사과를 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주일 동안 담당 조사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다시 계장에게 항의 전화를 했더니 "아직도 연락을 안드렸다구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화들짝 놀라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 조사관은 내게 물었다.
"아, 제가 담당 조사관인데요. 뭐가 궁금하셔서 그렇게 전화를 하셨을까요?"
"네?"
궁금하다니. 뻉소니 신고를 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몇 번이나 전화하고 전화를 달라고 메시지까지 남겼는데 무시하고 있다가 한다는 말이 뭐가 궁금하냐니? 어이가 없다 못해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상대방 조사일정 잡았구요. 그거 끝나면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조금 기다리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그와 전화를 끊고 기다린 끝에 겨우 조사일정이 잡히고 그 촌구석의 경찰서까지 찾아가 문제의 조사관을 대면했다. 그의 책상 끝에 있는 명함에는 그가 이제 경찰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순경'이라는 직위가 명확하게 박혀 있었다.
괜한 감정다툼은 의미가 없기에 예의를 갖추고 진술을 모두 마쳤다. 내내 그가 사건을 대강 마무리하려 한다는 인상이 강하기는 했지만(예컨대, 굳이 병원을 가실 필요가 있었느냐, 정말 병원에 간 게 맞느냐, 차가 접촉할 때 충격은 아니지 않았느냐 등등 시비 거는 듯한 질문에 비추어) 사고 직접 급정차를 하며 생긴 부상 때문이라고 차분히 설명했고, 무엇보다 그가 뺑소니를 부인하고 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인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고순대 담당 조사관을 통해 자꾸 귀찮게 하면 인피접수를 하고 병원에 드러눕겠다는 식의 겁박을 하고, 동의하지도 않은 개인정보를 받아 보험사에 인피접수를 한 것으로 보건대, 사고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이 그 사고로 인해 다쳐서 병원에 간다고 한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현장출동 경찰이 동승자 확인할 때 없었던 뒷좌석의 노부모가 갑자기 대인 접수가 되었다. 이건 명백한 보험사기다.라고까지 주장하자 그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건 이 교통사고건이랑은 무관하니까 저는 그냥 교통사고건만 처리할게요."
뺑소니의 증명여부에 피의자의 인지여부가 형사상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그에게 강변해 줄 필요가 없다 느낀 것은 그의 눈빛 뒤로 그가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생각이 없다는 여러 가지 객관적인 증거가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달 여가 지나고 난 뒤에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안 왔다. 상대방 보험사에서는 경찰의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내 처리를 미루고 있었기에 다시 그 대단한 '순경' 조사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랬더니 또 일주일이나 연락과 메시지를 씹다가 계장에게 연락이 가자 그가 심드렁하게 연락해서 말했다.
"저희는 이 사건이 뺑소니가 아니라고 결론지었구요.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2차선에서 진입하려던 선생님의 잘못이 있을 뿐, 자기 차선을 가던 차량은 혐의가 없으니 선생님에게 잘못이 있지만 상대방 차에 물적 피해도 없고 해서 공소권 없음으로 송치할 예정입니다."
"인지를 못했는데 그 사고로 인해 다쳤다고 병원에 간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네?"
"내 말 알아들었잖아요. 그 사람이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사고로 인해 다쳤다고 주장하는 게 모순되지 않냐고 묻는 겁니다."
"저는 담당 조사관으로서 그분이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는 주장을 믿구요."
"당신이 그 사람 변호사면 그렇게 말해도 되는데, 조사관이잖아요. 인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그 사고로 다쳐서 병원에 가냐구 묻잖아요. 대답해 보세요."
"그래서 검찰에 송치하는 거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검찰에서 재조사를 하라고 내려보낼 겁니다."
정말 마지막 그의 뻔뻔한 멘트에는 넌더리가 났다. 짭새라고 하는 것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뭉개고 넘어가려 하면서 하는 소리, 심지어 수사종결권이 경찰에게 공식적으로 넘어갔음에도 버젓이 자신들이 잘못이 있다면 다시 검찰에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는 헛소리로 법과 현장을 잘 알지 못하는 민간인들을 속여먹는 짓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게 사람이 죽어나간 엄청난 이슈몰이를 한 사건도 아닌데 검찰에서 무슨 대단한 공적이 쌓인다고 이 사건을 검사가 제대로 들여다보기나 할 것 같아요? 그대로 검찰 직원이 도장 찍어서 보낸다는 거 당신이나 나나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음...."
핵심을 찔린 그는 제대로 답변도 하지 못했다.
"하여간 저희는 그렇게 결론 내렸고, 이제 보고서 작성해서 송치하면 그만이니까 그런 줄 아세요."
"이거 정식으로 청문감사관실에 문제제기해도 괜찮습니까?"
"아! 맘대로 하세요~!"
순경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후 서장실과 청문감사실에 정식 민원이 들어갔고, 청문감사관이 교통조사계에 몇 번이나 들락거리고 사안을 파악한 후에야 청문감사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교수님. 말씀하신 사안에 대해 재검토와 재수사를 진행하도록 조치했으니까 조금 기다려주시지요."
"아니, 하나 물읍시다. 처음 전화할 때는 양쪽 얘기도 듣고 사안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해서 내가 기다렸는데, 뺑소니사고를 냈는데 자기가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 사실은 본인만 아니까 내가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로 인해서 자기와 심지어 동승하지도 않았던 부모님까지 병원에 가겠다고 보험접수했으면 그건 정말로 앞뒤가 안 맞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건.... 저어, 제가 담당이 아니라...."
"아니 이제 담당만 알 수 있는 복잡한 사안도 아니잖아요. 사고가 난 줄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피의자가 그 사고로 인해서 다쳤다고 병원에 갔어요. 그 인과관계를 수사하는 조사관이 확인하고서도 피의자가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들인답니다. 이게 정상적인 판단이고 상식입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 말씀드리기가 뭐 한 상황이라.... 일단 정식 문제를 제기하셨으니 재수사 결과를 기다려보시지요."
끝까지 사실관계 인정하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청문관과의 통화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처음 사고를 내고 정중히 사과하고 물적 피해에 대해 보험처리를 하겠다고 나왔더라면....
보험사 현장직원이 얼른 상황을 파악하고 같은 편의 입장에서 일처리를 원만하게 하고 자기 회사의 피해손실이 더 커지지 않도록 자기 일처럼 처리했더라면....
처음 사건을 맡았던 고순대 조사관이 제대로 처리하고 중간에서 원만하게 사과하고 대물처리하라고 피의자에게 일러주고 연휴를 편하게 맞았더라면...
경찰서의 순경이 자기 연차 다 찾아먹고 놀러 다닐 것이 아니라 사안을 파악하고 다시 한번 피의자에게 상황이 심각할 수 있으니(뺑소니든 사고 후 미조치로 대인접수가 들어가면 면허정지 혹은 취소를 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벌점도 그렇고 벌금도 적지 않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대물처리하고 원만하게 처리하라고 조율했더라면...
순경의 말도 안 되는 일처리에 청문감사관이 사안을 파악한 뒤 정중히 사과하고 일처리를 제대로 마무리지었더라면...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일이 아주 긴 시간 여러 사람으로 엮이며 지저분해지는 경우라 우리 주변엔 너무도 많다.
군바리 딸의 뒤에 최순실이라는 여자가 있었고, 청와대에 버젓이 경례를 받으며 드나드는 꼴을 수많은 경비와 관련자들이 알고 있었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어느 한 사람 그것을 바로잡지 않고 있다가 십상시 사건이니 뭐니 최순실의 남편이 등장하고 어어... 하다가 그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촛불이 광화문을 꽉 채워 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 줄, 군바리 딸도 그 측근들중 어느 누구도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고순대의 경찰이 굳이 멀쩡한 톨게이트의 cctv를 확보하지 않고 시일을 뭉개고 피의자의 편을 들어가며 보험사 정보까지 제공했으며, 대인접수를 하는 순간 그것이 뺑소니를 인정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오히려 사건을 뭉개려 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정식 사건을 이첩받은 순경마저도 그 전모를 모두 확인하고서도 그냥 사건을 뭉개려 했는지... 정확한 그들의 사정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지 않은 부패한 경찰들이 뚫린 입이라고 "아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경찰이 뒷돈을 먹고 사건을 뭉개고 진실을 덮고 합니까?"라고 하면서 결국 비리사실이 밝혀져 감옥으로 가는 일이 지금 이 순간까지 비일비재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경찰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말을 서글프지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만나봤던 그 수많은 경찰들의 행동이 하나같이 상식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경찰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두 손 모으고 앉아 경청하고 싶다.
나도 죽기 전에, 정의감에 넘치는, 돈은 없지만 가오가 없지는 않은 경찰을 단 한 명쯤은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