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하나를 고치려다가 깨달음을 얻다.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들 한다.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기준도 다르고 타이밍도 다르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온 지 이제 보름여를 넘기면서 짐정리와 연구실 정리가 얼추 다 끝나갔다. 사실 정리하고 나면 뭘 정리했나 싶으면서도 텅 빈 그야말로 휑하던 연구실을 냉장고와 서재, 그리고 컴퓨터를 2대 들여놓고, 다시 그에 맞춰 모니터를 2개씩 맞춰 들여놓고 응접실을 대신할 소파와 차를 끓일 다구와 포트에서부터 책장을 채워 넣을 책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다시 그 안을 채울 책을 선별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자질구레하게 손이 갈 일은 너무도 많았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우연히 백팩에 실려온 USB 3개가 눈에 띄었다.
물론 외장하드도 2개나 꺼내서 정리하다가 오래된 도시바 외장하드의 접촉이 불량하기 그지없어 3.0에서는 그나마 쌩쌩거리다가 2.0에서는 힘없이 헛도는 소리를 내는 것이 못내 거슬려 따로 분해해서 다시 외장하드 케이스를 구매해서 깔끔하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백팩에서 발견된 3개의 USB 중에 침대를 함께 쓰시는 분이 22기가나 채워 넣은 전공 관련 PDF파일들이 가득한 폴더를 보고서는 뭔가 정리를 해둬야겠다 싶어 컴퓨터의 하드로 옮기고 막 재포맷을 하려던 참에 사고는 일어나고 말았다.
32기가나 되는데 FAT형식으로 되어 있던 것을 NTFS형식으로 바꿔서 깔끔하게 정리하려던 것이 포맷이 진행되지 않는가 싶더니 이내 아예 형태자체가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흔히 발견되는 '디스크 없음'도 아니고 '미디어 없음'으로 컴퓨터에 꽂으면 인식음이 나오지만 잡히지도 않고 무엇보다 파티션 자체도 잡히지 않아 웬만한 복구 프로그램이나 파티션을 잡는 프로그램으로도 잡히지가 않는 것이 아닌가?
살짝 열이 받기 시작했다.
침대를 함께 쓰는 분은 내가 컴퓨터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 일단 자신이 컴퓨터에 대해 잘 몰라서도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뭐라고 내내 씩씩 거리며 노려보고 씨름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특히 그녀에게 있어 컴퓨터 문제는 그냥 새로 사면 되는 문제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혼 전 내가 샀던 오래된 일본식 대형 레이저 프린터를 굳이 110 볼트 도란스(이걸 알아듣는 이들은 연식을 대강 서로 알만 할 것이다)에 꽂아서 쓰다가 문제가 생겨 1박 2일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고치는 것을 보고 짜증을 냈던 것이 아마도 그 시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결과적으로 부품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프린터는 장렬히 전사를 하고 말았다.)
일단 침대를 함께 쓰시는 분의 자료를 컴퓨터에 옮겨두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물론 그녀는 자신이 이 USB에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 자명했지만)
디스크 없음이나 그나마 컴퓨터에 인식이 된다면 파티션만 잡고 다시 CHKDSK나 기본적인 방식으로도 살릴 수 있겠으나 인식음은 나오면서도 '미디어 없음'으로 형태조차 잡히지 않는 경우는 처음 당하는 경우였다. 대개 이 경우 침대를 함께 쓰시는 분이 곁에 있었다면 당연히 자료는 무사했고 32기가 USB는 그냥 쓰레기통에 가고 그걸 살릴 시간과 에너지를 보다 더 경제적인 부분에 쓰라고 명령(?)했을 것이 뻔했다.
그녀가 곁에 없어 마음 편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돌입했다.
관련 자료를 검색하고 커뮤니티를 몇 개 찾아보니 러시아 사이트에 들어가서 해당 USB의 타입을 확인해 내고 그 사양에 맞는 회사의 툴을 찾아 다운로드 받아 다시 복구를 돌려 초기화 포맷을 하는 방법이 나와 있었다. 방법은 찾았지만 초기화 포맷은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하여 내내 연구실에서 밤새 그러고 있기 뭐해서 사택으로 돌아와 노트북으로 해결한다고 돌렸는데 원하는 컴플리트의 C가 뜨질 않았다. 다시 돌려놓고 새벽 운동 전에 체크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운동을 마치고 다시 해당 작업을 찬찬히 복기해서 연구실 컴퓨터에서 다시 돌려놓고 점식식사를 하고 왔더니 드디어 프로그램에 C가 확실하게 떴다.
그렇게 사망선고 직전의 USB는 저승 앞까지 갔다가 다시 부활하였다.
NTFS로 재포맷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무엇이 문제인지 버벅되어 다시 로우포맷으로 FAT형식에 맞춰주고서야 안정적인 형태로 완전한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이 별것 아닌 USB 부활 과정을 설명하는지 이상한가?
내가 굳이 이 과정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다.
망가졌다고 버리면 되었을 이 녀석을 살리는 과정을 겪으며 내가 컴퓨터를 처음 배웠던 80년대 중반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다시 압축되어 흘러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이 지난한 컴퓨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우리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행복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를 의미한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생활 루틴이 변함이 없고 만나는 사람들이 변함이 없으며 그것이 스트레스가 가장 없는 형태로 초점이 맞춰져 고착화된다면 그야말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확률은 상당히 줄어든다.
무슨 말이냐고?
간단히 말해, 아무것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시도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 그들을 알기 위해 파악하고 그들과 뭔가 공조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거나 그들을 도와주는 일을 벌이지 않으며 늘 같은 곳에서 같은 메뉴로 식사하고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면 행복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행복하지 않다는 스트레스를 받을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컴퓨터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너무도 당연히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발전을 거듭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그 '에러'라고 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지, 이미 완성된 것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 자체도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의거한다.
어느 누군가는 미완성이라고 내가 표현한 컴퓨터 만으로도 이게 없던 시절에 비해 지금 이 정도가 어디냐며 에러가 나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포기하고 그 기능 안에서 만족스럽게 늘 그 정도의 작업만을 하며 행복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컴퓨터 관련 재벌이 된 이들은, 그들이 만든 혹은 그들이 배우기 시작했던 그 기기와 소프트웨어에서 부족하거나 에러라고 뜨는 부분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들을 밤새우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대가로 지금의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쥐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쥐게 된 가장 기본적인 시작은,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로 인해 장애가 되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해결하는 이유가 언제나 돈인 것은 아니고, 대개 컴퓨터 관련 공돌이들의 경우, 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언제나 첫 번째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잘 되던 컴퓨터가 갑자기 안되거나 멀쩡하던 USB가 포맷이 안 되는 경우, 혹은 내가 날려버린 데이터를 다시 복구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걸 포기하거나 돈을 내고 전문가를 찾는다.
하지만, 컴퓨터를 조금이라도 아는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처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돌입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찾아보고, 관련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그 과정을 다시 복기하고, 혹은 그 방법들을 자신의 나름대로 믹스하여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본다.
그렇게 해서 멀쩡한 컴퓨터를 저승에 보내기도 하고 결국 중요한 데이터를 살리지 못하고 그냥 버려야 하는 일이 벌이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인생이 그 과정과 다른가?
아니 너무도 똑같이 닮아 있지 않은가?
뭔가 심각한 억울한 일을 당해 자신이 법원까지 가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일반인의 대부분은 너무도 당연히 변호사를 찾는다. 그런데 어떤 변호사도 그 사안에 대해서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당신에게 처음 상담을 받고 대단한 변호사니 수임료도 어마어마 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으며 영업했던 사무장이 그 대단한 변호사보다 당신의 사안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변호사에게는 이미 선불로 수임료를 받아버려 이제 움직이는 것은 나중에 받은 성공보수가 얼마나 큰 지, 혹은 그저 일상에 지나지 않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졌어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쩌겠어 따져서 이길 수도 없을 텐데... 어쩌고 이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라는 것을 선택한다. 이른바 이솝우화의 신포도 이론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는 것이다.
늘 먹던 내게 익숙한 식당을 매번 가는 이유는 그만큼 안정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그 식당만 간다면 실패에 대한 스트레스 따위를 받지 않아도 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널린 그 수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원천봉쇄되는 것이다.
실패는 언제나 아프다.
어쩌면 그 데미지가 너무 커서 당신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물론 이건 당신의 신포도 이론에 의거한 변명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부러워마지않는 성공한 그들은 모두는 그러한 과정을 모두 감내하고 통과해 내고서야 지금의 그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부도 하기 싫어하고, 그저 잠만 자고 게임만 하고 적당히 놀고 싶어 하면서 전교 1등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보면 당신은 뭐라고 충고할 것인가? 아니 과연 충고할 가치가 있는 아이라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당신의 꼴을 보라.
노력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고, 잘못된 꼴을 보고서도 바로잡으려 들지 않으면서 정치인들을 탓하고 욕할 뿐 그 어느 하나 자신의 노력으로 불편함을 개선해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안 좋은 방법으로 부와 명예를 가로채고 청문회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는가?
아니라고?
물론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게다. 그들이 지저분하고 쓰레기짓을 해서 지들만의 리그로 돈과 명예를 위해 얼마나 꼴사나운 짓을 했느냐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당신의 모습도 물론 당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뒤로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보고, 그들이 사는 집값을 듣고 그들이 등록한 공직자 재산 등록을 뉴스를 통해 보면서 당신이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혹은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동경하지 않았나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가?
갑자기 고장 난 USB를 고치는 일이 대단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해 인생 자체가 모조리 부인당하고 감옥까지 들어간 돈 없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자의 일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며 그저 혀를 끌끌 차는 정도로 지나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늘 변함없는 루틴을 반복하며 늘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고 늘 먹던 것만 먹으러 다니는 것이 소확행이라고 할지 자위하며 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USB로 언제나처럼 똑같은 작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고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
당신이 아무리 평온한 변화가 없는 그놈의 소확행이라고 부르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당신이 더 공부해서 배우지 않고 더 노력해서 변화하지 않고 그 번거로움과 스트레스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더 넓은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한다면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나 파문에 그 어떤 대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제야 억울하다고 눈물 콧물 흘리며 국회의사당을 들어가 보려고 해도 아무도 당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작지만 사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변화는 일어난다.
하다못해 자고 일어나 당신의 침대를 치우고 방을 치우고 새벽운동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인생을 바꾸기 시작한다.
귀찮고 힘들고 하기 싫을 게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과 스트레스 없이 당신의 삶이 더 위로 올라가거나 당신의 삶이 더 개선되거나 하다못해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그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단어하나 외우지 않고 PC방에 가서 라면 먹으며 게임하고 싶은 아이가 자기도 전교 1등 하고 싶다고 누가 되고 싶지 않겠느냐고 한다면 당신이 뭐라 할 것인지 잘 생각해 봐라.
당신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 USB를 고쳐 쓰는 것과 무에 그리 다른지 이 연휴에 곰곰이 생각해 봐라.
일반인에 비해 수많은 고난과 스트레스를 극복하며 살아왔던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행복을 생산하지 않고, 소비할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