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이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질문이로구나! 예는 사치스럽기 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고, 상사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한다."
임방의 질문에 공자가 크게 그를 허여(인정)하며,
크게 칭찬하는 공자의 모습이 약간 낯설다.
공자가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을 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공자가 칭찬해준 배경에는,
그가 어떤 의도로 질문을 했는지를 알고
그의 레벨 성취도가 높음을 인정해주는 것임과 동시에,이 질문을 통해 공자 자신이 설파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는 반가움이 섞여 있다.
막연한 개념어에 대한 본질을 묻고 설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바로 전 장에서 '인'을 설명하고 다룰 때의 우리가 그러하였다.
이번 질문에서는, 예의 근본을 묻는다.
유학이나 유교에서 '예'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요즘 젊은이들에게 물으면 까다로운 절차나 과정등을 강조한 것이라는 오해하는 경우를
자주 보고 듣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으로 변질되면서
이상한 쪽으로 흐른 악영향이다.
실제 예의 본질, 주자가 주석에서 강조하고 있는 알맹이는, '본질(本質)'이라는 단어의 뒷 글자인 '질(質)' 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참고로 그 반대되는 꾸밈 혹은 형식을
고문에서는 문(文)이라고 한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조화를 이루어
모두 아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고문에서 문법적으로 비교를 하면서 '차라리'라는 표현을 넣는다.
'차라리'라는 뜻은 최선이 아닌 차선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 표현을 쓰는 것은 최선이 무엇임을 함께 보여주는고급 문법이다.
즉, "두 가지 모두 하는 것이 좋은데, 만약 그것이 안된다면'차라리'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한다면 이쪽이 낫다."라는 화법이다.
사치스러운 것은 허영이고,
그것은 검소함과 절약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형식과 절차도 중요하고,
그 본질은 더더욱 중요하다.
예의 근본은 거창하고 화려한 형식에 있기보다는
검소한 마음가짐에 있다는 아주 단순명료한 점을 강조한다.
그 행간의 깊은 뜻에는 '진실됨'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유명한 누군가가 죽었다고 해서 장례식장을 간다.
일단 엄청나게 많은 화환들이 들어서는 복도를 가득 채운다.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본질을 뒤집을 수는 없다.
화환을 보낸 자가 직접 문상을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진정 슬픔을 보이며
유족에게 그 슬픔을 진정성있게 담아 전달하는 것은화환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으니 공자가 다시 강조하였고공자가 강조한지 수천년이 지났것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은 근본을 잃고 썩어가고 있다.
비싼 명차를 타고, 명품을 온 몸에 휘감고
명품백을 들고 아무리 설치고 다녀도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일뿐,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고싶어하고
그러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는
주변의 대우이고 대접이다.
자신이 10년 넘은 국산똥차를 끌고 호텔을 갔을 때와최신형 고급 외제차를 타고 갔을 때
대접이 다르다고 '착각'하는 이들때문에
이런 문제는 발생하게 된다.
결국 눈을 현혹시키는 것에 다름 아님에도 불구하고사람들은 그 허상을 믿는다.
사기꾼, 그것도 대규모의 사기를 치는 이일수록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기 마련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학식이 높을수록
무엇보다 수양이 잘된 사람일수록
껍데기를 치장하는 것이 공을 들이지 않는다.
갈수록 너무 보기 힘들어졌지만
분명히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났고 봤다.
그들은 애써 껍데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자신의 본질에 대한 존경심을
다른 이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혹여 호텔의 벨보이나 멘션의 경비가 자신을 알아보지못하거나 홀대하더라도 그들은 기분나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정중히 인사를 건낸다.
그렇지 못하고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제대로 굽신거리지 않느냐고 하는허접 쓰레기들이 많다.
국회의원 등의 자기 나름대로 그것이 높은 지위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그러한데,
자신이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자들이 주로 그런 행태를 보인다.
뉴스에서 종종 접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 불같이 화를 내고 난리를 친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 일에 대한 가장 기본적으로 드는 감정인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 주석에 양씨(楊氏)의 해석은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는 음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웅덩이를 그릇으로 삼고 손으로 움켜 마시다가 보궤, 변두, 뇌작의 꾸밈을 만든 것은 문식을 하기 위한 것이었늬, 그렇다면 그 근본은 검소일 뿐이다. 상은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어 곧바로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최마와 곡하고 발구르기의 수를 제정하였으니 이것은 절제하기 위해서이니, 그렇다면 그 근본은 슬픔일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세속이 문으로 질을 없앴다'라는 촌철살인평을 던진다.
맞다.
세속이 그랬다.
당신들이 그런 행동을 동조하고 인정해준 순간,
그것이 마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상식인냥
오인된 것이다.
처음 그것이 생겨났을 때의 본연의 의미를 되찾는 것은,공자가 평생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