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보다 그것을 말리지 않는 놈이 더 나쁘다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을 질책하는 성인의 자세

by 발검무적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계씨가 태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려 할 때 공자께서 염유에게 "네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겠느냐?" 하시자 염유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 어찌 태산의 신령이 (예의 근본을 물었던) 임방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공자가 언급한 신령이 산다는 그 태산(泰山)

제후의 신분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일들을 참람되게 대부인 신분이면서 그런 행위를 마구마구 해대는 계씨(季氏)에 대해 비판한 것은 '팔일편' 시작부터 했던 비판이니 굳이 설명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질구레한 짓들을 <논어>에

일일이 나열하며 하나하나 비판하였을까?

물론 아니다.


이 장의 방점은, 그것을 막으라고 가르쳐 보낸 염유가 스승 공자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불같이 화내는 것보다 더 세게

비비 꼬아서 뒤통수를 후려치는 대목이다.


위 초상화의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염유는 다혈질(?) 스승의 욕을 온몸으로 받은 셈이다.

후려치기의 백미는, 갑자기 등장한 태산의 산신령과 임방이다.

태산의 산신령을 언급하여 신은 예가 아닌 것은 흠향하지 않음을 말하여 나쁜 놈, 계씨를 까고 난 후에, 앞서 예의 근본을 물었던 임방을 추켜세워

제자인 염유에게 그 정도 수준도 안된다고 내리 돌려 까기 한 셈이다.

'차라리 대놓고 혼을 내지.'라고 생각하며

스승의 앞에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을 염유의 모습이 눈이 선하다.


범 씨(范氏)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염유는 계씨를 따르기만 하였으니, 공자께서 어찌 염유가 고할 수 없음을 모르셨겠는가? 그러나 성인은 가볍게 사람을 끊지 않아 자기의 마음을 다하시니, 염유가 바로잡을 수 없음과 계씨는 간할 수 없는 인물임을 어찌 아셨겠는가? 이미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하자, 임방을 찬미하여 태산의 신을 속일 수 없음을 밝히셨으니, 이 역시 가르치는 방법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은커녕 지가 잘못한 줄도 모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에 대해 일일이 뿅망치 들고 다니며 때릴 수 없었던 공자의 마음은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갑갑했겠는가 조금이나마 짐작해본다.


그런데 더 분통 터지는 일이 생겼다.

그렇게 멋모르고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의 곁에서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가르쳐 내보낸 제자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사정이야 왜 모르겠는가만은

일단 제자가 가르침을 실천궁행 하지 못함이

딱하고 답답하며 괘씸하고 화가 났을 법도 하다.


범씨의 해설처럼, 염유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을 공자가 모를 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잘못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처신역시 가르친 바 있음에도 염유는 계씨의 곁을 지키고 섰다.

잘못 인도하면서 그 곁을 서 있는 제자의 처세에

공자는 또 새로운 방식의 가르침으로 꿀밤을 준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할 때

정작 잘못을 한 당사자보다 곁에서 더 흥분하고

나대며 그들을 호위하며 변호하고 나서는 자들이 있다.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서는 자들은 지적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미 제대로 파악하고 찔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들이 먼저 그 잘못과 약점을 가리고 막아보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미리 파악하고 방어하고 나선다는 것은

사세를 파악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정도를

구분할 정도의 수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는 짓이 지인들을 혹은 가족들을 지키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그들의 그따위 안일함이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사회를 망치며 더 나아가 나라를 말아먹는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잘못보다 더 큰

자신이 보좌해야할 혹은 자신이 보호해야할

대상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한 차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논한 바 있다.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가르칠 때는 분명히

"잘못했을 때는 빨리 사과하고 잘못을 고치면 된다."라고 가르친다.

그런 그들이 사회에 나와, 자기 자식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이유로

그 당연한 가르침을 뒤집어엎고 말을 바꾸고

어쩔 수 없었다는 둥, 현실은 도덕과 다르다는 둥

멍멍 짖는다.


그렇지 않다.

당신이 당신의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위배되는 내용은 말 그대로

그냥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잘 모르는 척하는 이의 뻔뻔함을 가르쳐주고 바로잡을 수 있는 지식과 지위를 갖춘 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함은

잘못하고 뻔뻔하게 괜찮다고 사는 놈보다

몇십 배 몇 백배 나쁜 놈임을,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그 놈들은 매우 잘 알고 있다.


당신은 그 놈들에 속하는가?

그 놈들을 일깨워줄 이들에 속하는가?


늘 당신은 선택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