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 피해자라고, 희생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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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상담을 하다 보면, 늘 그렇지만 어느 한쪽의 하소연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사람 서로 간에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뻔한 사안도 그들 둘만 모르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들이 늘 저지르고, 지금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는 당신에게도 예외가 아닌 그 뻔한 실수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때가 드디어 왔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어느 누군가는 리더역할을 분명히 해야만 하고 누군가는 양보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어느 한 사람의 실수를 챙겨주고 안아주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부부가 원만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협력이자 그것이 없으면 결혼생활이 위태로워지는 기본 중의 기본 요소이다.
이혼하는 커플들이 결혼을 유지하는 커플보다 많아지는 추세로 달리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기본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정신과 의사나 상담 전문가들은 모두 안다. 하지만 그 정신과 의사들과 상담 전문가들, 심지어 그것으로 먹고사는 이혼 전문 변호사들도 그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밸런스가 깨져서 이혼을 ‘선택’하곤 쿨한 척 커밍아웃을 광고하듯 떠들곤 한다.
대학에서 토론발표수업을 할 때, 정말로 공평한 일의 배분이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일을 더 하는 학생이 있기 마련이고, 뺀질거리며 숟가락만 얹어놓고 날름 챙기는 학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대학생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닌 이상(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혼자인 경우조차도 매우 드물지만),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그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양보, 희생, 협력, 이해, 배려 등등이 어떤 식으로든 필수불가결하다는 의미다.
집안일은 모두 나 혼자서 도맡아 하는 것 같고, 아이들 육아는 독박육아로 나만 하는 것 같고, 경제적인 책임도 내가 훨씬 더 많이 부담하는 것 같다는 의식은 어떤 식으로든 불만이라는 트리거가 작동되는 순간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폭탄처럼 부부생활을 아슬아슬한 위기상황으로 돌변시킬 여지는 늘 충분하다.
앞서 수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혼자서 살면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나 감정의 소모를 감안하면서까지 결혼을 선택했을 때는, 혼자보다 둘이 훨씬 더 나을 거라는 이기적인 생각만으로 결혼을 결정했다면, 그리고 연애할 때의 감정과 달콤함만이 평생 함께 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만으로 결혼을 결정했다면 그 어리석은 어리광에 대한 대가는 당신이 직접 치러야 할 대가라는 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최근에 돌싱이 된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들이 재혼이나 새로 사람을 만나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다시 삼혼을 생각하는 악순환은 그들이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는 이상 사혼이나 오혼을 하더라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어떤 안 좋은 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종이 한 장에 항목화해서 적어보라. 아주 사소한 것이라면 코를 고는 것, 입냄새가 심한 것, 발에 무좀이 있는 것, 변비가 심한 것 등등에서부터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 것, 상대방은 당신이 불만을 토로할 때 당신의 편이 되어 맞장구를 쳐주는 것에 비해 정작 당신은 상대방의 사회생활에서 생긴 불만토로에 대해 마치 정의의 여신이 현신한 것인 양 그것에 대해 잘못되었다며 잘못을 지적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당신에 대해서 판단해 보라.
당신이 아플 때는 그래도 함께 사는 사람이니까 당신을 간호해야 하고 당신이 괜찮은지 끊임없이 물어봐줘야 하고 당신의 운전기사가 되어 회사에 픽업해 주고 병원도 데려가야 마땅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상대방이 아팠을 때는 당신은 당신의 일상이 깨지면 안 된다면 당신의 운동레슨 시간에 맞춰 나갔다가 오고 일하러 간다고 당신의 옷만 챙겨 움직여놓고서는 다들 그렇게 지내지 않느냐는 식의 후안무치한 행동으로 일관한다면 누가 당신을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거기에 더해 뻔뻔하게 ‘나는 원래 그런 거 잘 못하잖아.’라던가 ‘내가 당신한테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당신이 좋아서 그런 거였잖아, 안 그래?’ 따위의 인간 이하의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 놓고서는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 앞에 와서 ‘도대체 제가 얼마나 더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 거죠? 저는 정말로 참을 만큼 참았거든요.’라고 떠들어댄다. 그런 스타일의 피상담자는 굳이 그의 배우자를 상담하면서 크로스체크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캐릭터에 대한 분석이 가능한 경우가 다반사다.
최근 유행하는 이혼의 위기를 방송의 관찰예능을 통해서 상담하는 어른이들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울정도로 과장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작가와 피디에 의해 적당히 MSG가 첨가된 것 또한 사실이겠으나 실제로 그런 캐릭터를 가진 얼토당토 하지 않은 적반하장식의 인물이 분명히 존재함을 반증하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정신 상담의 일환으로 거울치료를 연극치료의 방식으로 입장을 바꿔놓고 하는 경우는 그들에게 그 사실을 느끼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이기적이고 함부로 구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들이 만나고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서 확증편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이들은 누군가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들이 그들의 말을 지지하고 그들이 당연히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끊임없이 속삭여준다. 대개는 그들의 부모가 그러하고, 잘못 사귄 친구라는 지인들이 그런 역할을 전담(?)한다.
어느 부모인들 자기 새끼가 소중하지 않겠는가마는, 내 새끼가 소중한 만큼 남의 새끼도 그만큼 소중하다는 사회성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부모는 다시 그 잘못된 사고방식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기 일쑤다.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은 가정의 자식이 지속적으로 제대로 된 집안의 문화를 형성하고 개차반인 가정교육으로 점철된 콩가루 집안이 계속해서 그 집안의 캐릭터를 지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그중에서 아주 드물게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깨닫고 그 잘못된 근성을 끊어버리고 각성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상담을 통해서인 경우도 있고, 아쉽지만 결국 이혼을 하고 나서야 상대방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까운 사람이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자신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음을 깨닫고서 각성을 하기라도 하면 그 후회는 늦었지만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그나마 한쪽이 희생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모든 것을 케어하는 경우는 기형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로 기형적이기 그지없는, 밸런스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결혼생활이긴 하지만, 정작 계속 배려만 받는 철딱서니 없는 캐릭터만 모르는 그 결혼생활은 끝을 알고 달리는 아슬아슬한 열차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쪽만 희생적인 결혼생활은 언제고 그 끝이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도 사람인 관계로 지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고, 상대를 일깨워주고 바꾸는 노력보다 그저 다 받아주고 고치지 않으며 지속해 온 어리석음의 대가를 스스로도 치를 수밖에 없다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당신도 당신의 일은 아닌 것처럼 객관화되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왜곡된 사실을 모를 수가 있는 거죠?”
좋은 질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기묘하게도 위에 언급한 완전히 기울어진 천칭의 형태가, 매우 희귀한 형태이자 실제로는 움직이는 시소처럼 어느 순간에는 한쪽이, 또 어느 순간에는 다른 한쪽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실수를 하는 경우를 서로 반복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는 한다. 문제는 그 실수에 대해서 깨닫는 대로 가장 빨리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그것을 바로잡는가 하는 부분이다. 저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 ‘사랑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거야’는 지극히 반어적인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반어적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관계는 기본적인 사회관계와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기에, 사회생활에서는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사과를 해야지만, 그 관계가 지속된다고 여기는 반면, 사랑하는 사이에는 더 많이 해주고 늘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일일이 말할 필요 없이 후회 없이 모든 사랑을 쏟아주라는 표현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조금 디테일한 부분까지 들어가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주자면, <러브 스토리>의 대사는 기억하지만, 그 대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 부분이 왜 반어적인 의미로 해석되는지를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부유한 명문가 출신의 하버드 대학생 올리버가 남자이고 가난한 빵장수의 외동딸이자 래드클리프의 음대생이 여자 주인공이다. 천한(?) 집 여자와 결혼했다고 의절당한 남편에게 시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찾아뵙고 화해하라고 눈물로 간절히 애원했지만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마음에 그렇게 굽히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다툼 끝에 아내인 제니퍼가 집을 나가버렸다. 뒤늦게 자신이 오버했다고 후회하던 남편 올리버가 아내를 찾아 사방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었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돌아온 남편 올리버는 계단에 울며 앉아 있던 제니퍼를 발견한다. 제니퍼는 울먹이며 남편에게 말한다.
“열쇠를 잃어버렸어.”
그러자 남편 올리버는 안도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한다.
“제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때 아내 제니퍼가 말한 대사가 바로 위의 명대사이다.
“여보, 됐어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이제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쓰는 것인지 이해했는가?
아직도 당신만 일방적인 피해자이고, 상대가 당신의 인생을 좀 먹은 것이라고 착각하나?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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