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 공작의 대가 - 2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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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놈의 그간 숨겨왔던 본색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지 않잖아?’
지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눈앞에서 애교 있는 웃음을 흘리며 공부 얘기 말고 여자얘기나 연예인 얘기에 열을 올리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렌코쿠가 안부편지에 반응이 없었던 것이 자신이 바빴기 때문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허망한 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언제나 10시까지 늦잠을 자느라 오전수업에 늦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신의 연구를 하지 않아 제대로 된 논문을 발표하지 않은지 이미 10여 년이 지난 터였고, 공부하는 것이나 수업하는 것이 너무도 싫은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너무도 바빠서 안부편지에 답장할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오히려 남편이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냐고 되묻고 싶었다. 오히려 이런 유치한 공격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니 사토 렌코쿠에게 더 이상 인간적인 양심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자신을 순진무구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로 보고 남편을 설득하여 그렇게 더럽고 치사한데 왜 일본에 있냐, 라며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면서 한술 더 떠서 남편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대목에서는 화가 나서 모니터 화면에 대고 욕이라도 할 뻔한 것을 참았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곧 며칠 안 있어 뱃속에서 나오게 될 아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봐서 두려웠다.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확실하게 자신이 렌코쿠에게 휘둘릴만한 노곤노곤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그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삼가 아뢰옵니다 친애하는 사토 선생님
친절한 답장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말한 의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느라 답장이 조금 늦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읽어 내린 나의 결론은, 남편이 박사학위를 취득해 돌아올 때까지 일본 생활을 충실하게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일전에는, 학생들의 질투와 자격지심에서 유발된 말도 되지 않는 비방과 소문에 너무나도 괴로워하는 남편의 입장만을 생각하여 단순히, 그냥 한국에 돌아와 버리면 그 모든 더러운 꼴 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입장에서 충고했던 것이었지만, 선생님이 말하는 의미를 들어보니 이대로 그냥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누명과 소문과 비방을 모두 인정하고 도망치는 꼴이 된다는 남편의 분석이 오히려 합리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주십시오.
남편의 무고함과 그들의 거짓을 분명히 밝혀 말도 되지 않는 소문과 비방을 퍼뜨리고 다닌 범인들을 처벌해 주세요. 저도 아기를 출산하는 대로 12월 초쯤 다시 일본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지난번에 누차 말씀드린 대로 치과대학원 박사과정에 내년 4월에 입학할 예정에 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이 오해하고 있는 점에 대한 의문과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냉철한 판단이 가능한 선생님께서 어째서 소문에 의한 것이 아닌, 대만 학회에 참가한 인솔책임자 교수나 남편의 룸메이트였던 토호쿠 대학의 대학원생 등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제삼자에게 사실확인을 하지 않고 사태를 대강 덮으려 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내는 교수 임용 건에 대해서도 저는 왜 그렇게 선생님께서 흥분하며 거부의사를 드러내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번 교원 채용에 응하게 된 계기는, 원래부터 준비하고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9월 초 지인인 카도와키 선생님과의 대화 중에 자신이 정년퇴직으로 인해 교수임용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제자 중에서 후계자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한국어 강의를 제대로 맡아줄 전공자가 없다고 하는 대화가 계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아무쪼록 오해를 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문학부의 교수로 채용된다면 선생님의 제자가 교수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선생님에게 있어서도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요? 혹시 채용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원래의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교수로 채용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원래의 계획대로 열심히 연구하겠다는 남편의 원래 마음가짐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남편은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일들을 보면서도, 결코 다른 학생들의 비방이나 욕을 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와 논문 집필에만 전념해 왔다는 사실은 선생님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바 아닙니까?
남편이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최대한 안정된 상태로 휴양한 후, 다시 일본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공포감을 느꼈다는 중국 여학생이 그토록 남편과 함께 수업을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남편에게 수업을 참가하지 않게 하고, 선생님과 함께 하는 논문 집필만 전념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남편의 일에 마음대로 참견을 하는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한번 더 부족한 남편을 넓은 선생님의 아량으로 돌봐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머지않아 다시 편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지 우
2007년 10월 15일
마지막 이메일을 보내면서도 지우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학생과 지도교수라는 관계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달려가 말도 안 되는 짓 꾸며대지 말라며 멱살이라도 쥐고 뒤흔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 동민이 다음 주 월요일에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 이긴 했지만, 자신이 이렇게 직접 남편의 지도교수에게 연락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도 조금은 있었다.
이 마지막 이메일에 담긴 지우의 강한 의지가 결국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토 렌코쿠에게 어떤 기가 막힌 결단을 내리게 했는지에 대해 지우는 예상 하지도 못했다.
사토 렌코쿠는 처음엔 적당한 협박과 압박으로 지우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신만만한 생각에 메일을 보냈었지만 결국 강한 동민의 성격을 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물처럼 들락거렸다. 무엇보다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던 중국 여자 유학생 호군혜의 앞에서 큰소리를 친 것도 그렇고 연구실의 모든 일본 학생들 앞에서 동민을 쫓아 내겠다고 공언한 것까지 생각한다면 자신이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지우 님께
안녕하세요.
지우상과 박군의 건강상태가 걱정됩니다만, 이번 사건에 대하여 알려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본교의 학생상담원회의는 본교총장의 직속의 독립된 조직으로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세크하라 대책을 실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번, 박군의 대만에서의 세크하라 의혹이 조사대상이 되었습니다. 조사는 본교가 실시합니다.
조사의 결과 사실무근이라면 문제야 없겠지만, 사실이라고 판단될 경우, 징계처분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연구자로서의 경력에도 오점이 남습니다. 또 장학금이나 수업료 면제, 학교 기숙사의 소개 등은 중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징계처분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자주적으로 퇴학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조사결과가 나오기 전에, 박군이 병을 이유로 자신의 몸상태가 유학을 중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하면, 조사는 중단될 것입니다. 경력에도 흠이 가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요? 남편에게 잘 이야기해서 설득해 주세요.
사토 렌코쿠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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