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ug 05. 2021

AIDS 검사를 받으러 가서 생긴 일

'요즘 애들'로 교체된 공무원 사회의 실상

비자를 받으러 예약을 하던 중에 대사관의 직원이 깜박했다며 연락이 왔다.

AIDS 검사서를 영문으로 지참을 하지 않아도 되는 비자인 줄 알았는데, 대사관에서 비자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꼼꼼히 보지 않고 일괄적으로 진행하니 귀찮은 일이 생기실 수 있다며 그냥 좀 준비해달라는 전화였다.


대사관 인터뷰 예약까지 이미 다 잡아뒀는데, 뜬금없이 정맥에서 피를 빼는 일을 하고 오라니.

이 무더운 날에 귀찮기 그지없었다.

병원을 가도 되지만, AIDS 검사비용으로만 8만 원 전후의 비용을 받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요즘 가장 위험한 곳은 병원이라는 것을 알기에 좀 꺼려지던 중, 보건소가 떠올랐다.


전국 보건소에서는 AIDS 검사를 무료로 진행하고, 최근 코로나 상황 때문에 일반 진료를 거의 하지 않아 얼른 피만 뽑고 신속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보건소에 연락을 취했다.

가장 가까운 강남구 보건소에 근무하는 의사 녀석에게 연락을 취했다.

"저희는 공식적으로 코로나 사태 이후로 모든 임상병리 업무를 올 스톱입니다. 죄송해요."

"자네가 죄송할 것이 뭐 있겠나."


전화를 얼른 끊고 거리순으로 보건소를 찾아본다.

지난번 교차접종 때문에 갔던 종로구 보건소까지 가는 것이 차도 밀리고 너무 싫다.

하여, 분당 쪽의 보건소에 연락을 취했다.

바로 검사실에 연락을 취하여 임상병리실에서 검사를 진행하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게 빠르겠다 싶었다.

분당의 보건소 3군데 중에서 한 군데가 임상병리실을 운영 중이라는 사실을 파악해냈다.

그래서 바로 가겠다고, 영문 검사확인서만 받으면 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검사실의 임상병리사가 자신은 검사만 진행할 뿐, 영문 검사확인서는 사무실 쪽에 문의하라면서 민원실 쪽으로 전화를 돌렸다.

그때부터가 무더운 날의 폭염 같은 짜증의 전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참 신호가 가서야 나이 든 아줌마가 전화를 받아서는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앞의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우왕좌왕하며 대답했다.

"우린 코로나 때문에 바빠서 검사 같은 거 안 합니다."

살짝 짜증이 났지만, 이를 꽈악 물고,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검사실과 모든 통화를 끝냈다고.

그랬더니 약간 고압적인 말투를 듣고 심리적으로 밀린 이 아줌마가 말했다.

"제가 민원실에 와서 이 일을 맡은 지 얼마 안돼서요."

"얼마 안돼서 잘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거기서 그녀가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검사를 진행했으면 더 짜증 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민원실 창구에서 일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따르는 것에 이미 맛을 들인 상태인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걸 그냥 제가 들어드릴 수는 없구요. 제가 사무실 쪽에 다시 확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확인 다 하고나서 말씀드릴게요."

"네?"


그렇게 나에게는 익숙한, 그들에게는 처음인 공무원 참 교육은 시작되었다.

그녀에게는 당연히(?) 전화가 오지 않았다.

다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야 그녀가 말한 사무실의 담당자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공무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나는 적당히 고압적이면서 자신이 우위에 선 듯한 설익은 말투로 말했다.

"제가 담당자이고요. 저희가 바빠서 AIDS 검사를 진행하고 있지 않거든요."

"보건복지부와 성남시청 통해서 확인하고 검사실 담당자와 지금 통화 끝냈어요."

"네? 그건 모르겠고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 업무를..."

"확인했다고요. 지금 바로 가서 보건소장이랑 얘기를 할까요?"

"그럼 좀 기다려보세요. 영문으로 서류를 발행하는 게 저희가 가능한지 보구요."

"지방 낙도 보건분소에서도 영문 발행은 가능해요."

"제가 다른 우리 시청 산하 보건소에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그녀는 한 시간이 넘도록 전화를 주지 않았다.

이제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그녀가 황당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영문 발행은 안되니까 저희가 국문으로 발행해드리면 번역 사무실에 가서 공증을 받으시면 어떨까요?돈이 꽤 드실 거에요."

"오늘 업무가 끝나면 안 되니까 그전에 검사를 받아 결과를 받아오려면 내가 일단 그쪽으로 출발할게요."

열 받아서 차키를 들고 나서는데 막 전화가 왔다.

"제가 감염병 관리 책임자인데요."

누가 들어도 이제 서른이 채 되었을까 싶은 여자애가 당당히 말했다.

"설명 대강 들었는데요. 지금 오셔서 헛걸음하실 수 있으니까요. 알려드리려구요. 저희가 코로나 때문에 검사업무를 하고 있지 않거든요."

"그 얘기는 지금 네 번째 듣는데, 내가 가서 보건소장 사무실에서 당신이 그렇게 다시 말할 수 있는지 한 번 지켜 봅시다. 당신, 지금 책임자라고 했죠? 녹취 중이니까 정확하게 직급과 성함을 다시 말씀해주시죠."

여자애가 움찔하고 입을 우물거리듯 뭐라고 말했다.

"뭐라구요?"

"9급 서기보입니다."

"당신네 보건소에서는 감염병 관리 책임자로 9급 서기보를 씁니까?"

"저는 책임자가 아니고 담당이고요."

"방금 당신이 책임자라고 했잖아요. 가서 보건소장실에서 녹취 함께 들읍시다."

전화를 끊고 액셀을 밟았다.


도착한 보건소에는 일반인들이 거의 통제되어 직원들뿐이었다.

검사실로 가려는 길에 민원실 창구의 아줌마를 만났다. 에어컨을 최고로 켜고 긴 팔을 입고 안경에 색까지 넣은 아줌마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검사부터 진행하죠."

말투로 알아차린 것인지 잘못한 것을 눈치챈 것인지, 어차피 보건소를 찾는 민원인도 없어서였는지 그녀는 금세 내가 누군지 알아봤다.

"아, 저는 잘 모르니까 그게 저 6층의 사무실로 가서 확인을 먼저 하시는 게...."


6층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이제 웜업이 끝나, 충분히 전투에 임하기 좋을 정도로 열 받아 있는 상태의 나를 눈치로 알아본 사람은 사무실 가장 안쪽에 서 있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팀장뿐이었다. 방금까지 통화했던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통화 중이었다. 사무실에서 성큼성큼 누구 한 명 조질 기세로 다가서는 느낌을 받았는지, 사무실을 온통 채운 30대 전후의 여자애들이 미어캣처럼, '누가 사무실 안쪽까지 이렇게 과감히 들어오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서로 경계심을 나눴다.

"이 전화번호 끝번호가 누구 전화죠?"

헤드셋을 머리에 걸고 아랑곳하지 않고 애써 고개를 반대로 돌린, 노란 머리 염색을 한 조그만 여자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팀장의 바로 앞자리였다. 팀장이라고 적힌 자리의 남자는 벌떡 일어나 다른 직원 한 명과 경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신경 쓰이는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봐요."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전화를 느기작거리며 하던 여자 직원을 불렀다. 그녀가 손가락질로 사무실 한편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좀 가서 기다리세요."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자리를 피해 기다렸다. 그녀는 바로 오지 않았다. 5분여를 참다가 다시 일어나 그녀의 자리로 갔다. 무슨 일이 터질 것인지 예상했는지 팀장이 움찔거리며 앞으로 나오려던 찰나였다.

"이봐요. 내가 계속 그냥 저 테이블에서 당신 노다거리는 거 다 끝마칠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겠습니까?"

그제야 그녀와 정면으로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잔뜩 쫄아붙은 표정으로 말했다.

"팀장님하고 함께 가서 설명드리려고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스크 주변으로 흰머리가 희끗 쌓인 팀장이 정작 다른 여직원을 옆에 데리고 테이블로 왔다.

"말씀 전해 들었는데요."

"팀장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저 아가씨의 일방적인 변명만 들었을 테니 제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말씀드리죠."

30초가량의 시간을 소요하여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을 마치고 내가 말했다.

"제 설명에 문제가 있다면 팀장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고. 제 설명에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면 일단 저기 버릇없는 아가씨를 불러다가 정중한 사과부터 받아야겠습니다."

"아! 꼭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네. 누군가 일러주지 않으면 절대 자기 잘못을 모를 친구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팀장에게 불려 온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마냥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시선을 계속 팀장 쪽으로 두고 나를 바로 보지 못했다.

"똑바로 날 봐요. 지금 아가씨가 뭘 잘못해서 불려 왔는지 압니까?"

"..."

"잘못된 거 모르겠어요? 네가 세 가지로 정리해서 지적해주죠. 첫째, 검사가 진행 중임에도 아무리 일하기가 싫어도 아가씨를 비롯해서 여기 처음 전화받은 직원들은 모두 검사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둘째,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PHIS시스템도 모르는지 영문 출력이 안된다면서 돈 내고 영문 공증받으라고 엄한 소리까지 했어요. 셋째, 알아보고 찾아보고 나에게 전화 준다고 해놓고 내가 이렇게 화가 나서 달려올 때까지 당신은 전화를 주지 않았어요. 이미 전화한 지 2시간 이상을 잡아먹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있었다고요."

"늦게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늦게 전화했어요? 전화를 안 했잖아요!"

"...."

"그 따위로 공직업무를 본답시고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소장실로 같이 올라가서 따져볼까요?"

"잘못했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입에서 마지못한 사과가 나왔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더 혼낼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눈빛과 얼굴이었다. 팀장이 가만히 그 과정을 다 지켜보다가 여직원들을 다 물리며 내게 말했다.

"잠시 나가시죠. 커피라도 한 잔 하시면서 이야기 나누죠."

끌려 나오듯 그에게 이끌려 나와 일단 임상병리실에서 피를 뽑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보건소 앞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 하나를 들었다.

"서류 보니까 교수님이시던데... 이런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제 아들도 의사입니다. 사실, 오늘 교수님 덕분에 제가 너무 시원하고 힐링했습니다. 제가 했어야 할 교육인데, 이렇게 민원인께서 해주시니 묵혔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네요."

"팀장님이 앞에 계셔서 뭐라고 더 하기도 뭐했습니다."

그렇게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한 시간여를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지금 데리고 일하는 그 여직원들이 대부분 1년 차도 되지 않은 신참들이라고 했다. 자신의 조카뻘 여자 직원들을 데리고 코로나 정국을 헤쳐나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이제 정년을 3년 앞둔 30년 이 일을 한 제가 쟤네들을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중간에 8급 7급들이 있어서 교육을 시키고 본보기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그 여자애들이 다 도망갔어요."

"도망이요?"

"육아휴직아니 휴직계를 내고 버젓이 쉬는 거죠."

내가 내뱉는 한숨이, 그의 큰 한숨에 덮여버렸다.


"코로나 핑계 대고 육아휴직을 써버리는 바람에 중간에 일할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이제 막 급조된 애들을 교육할 시간도 없는데, 이런 기본적인 교육도 갖춰지지 않은 애들이 현장에 투입되어서 지금 주먹구구식으로 이어나가는 겁니다. 쟤네들이요? 퇴근할 때 저한테 인사도 안 합니다. 출근해서요? 인사 같은 것도 없어요. 코로나로 회식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커피 이모티콘 보내주고 힘내자고 하는 게 고작인데, 집에서 배우고 왔을 기본적인 예절교육도 안되어 있어요. 민원인이 오면 자기네가 공무원이라고 명령을 하려고 드는 애들이라니까요. 오늘 교수님이 지적하시는 걸 중간에 어느 하나라도 커버 치려고 눈치를 보는데 이건 뭐 어느 하나 잘한 게 없으니 끼어들 틈도 없더라고요."

"공무원 사회나 병원이나 대학도 그렇고 '요즘 애들'이 하는 짓을 그저 세대가 달라져서 그렇다고 넘기기엔 너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나 같은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혼내기라도 하지. 정말 급한데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문의하고 도움을 청했을 때, 쟤네는 자기들 힘들다고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미뤄버리잖아요!"

"아이, 말해 뭐합니까? 쟤네 공무원으로 임용된 지 이제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자기네 업무분장을 들이대면서 팀장인 저에게 따집니다. 똑같은 지적 3번 하면 지적받은 사람이 혼나야 하는데, 자기한테 뭐라고 했다고 익명 투고를 해서 팀장급들을 바꿔달라고 항명합니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는데, 옆에서 과로한 업무로 상사들이 쓰러져 나가는데 법적으로 정해진 연차니 육아휴직 쓰겠다고 인사도 없이 그다음 날 출근을 안 해버립니다. 왜 개인 회사에서 여자를 안 쓰는지, 그리고 왜 점점 여자를 뽑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지 현장 관리직들은 모두 다 압니다. 개념 없는 또래 남자애들도 만만치 않긴 하지만요."

"힘내세요. 그래도 아직 우리 세대에서 알려주고 고칠 수 있는 건 노력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교수님이 해외에 나가시는 것만 아니면, 정기적으로 이렇게 만나는 것만 해도 제가 스트레스 수치 좀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것도 인연인데... 코로나만 아니면 오늘 소주 한잔 해야 하는 건데..."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입맛이 썼다.


여직원들 중에서 할 줄 아는 애들이 없다며 영문 서류를 작성하고 돌아온 그가 서류를 건네주며 확인하라고 했다.

"다행이네요. AIDS가 아니라서요."

그가 마스크 안쪽으로 씨익 웃어 보이며 내 등을 툭 쳤다.

미안하다며 챙겨 온 주차권에는 그의 싸인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업무시간이 종료되었다며 주차요원실에 앉아 있던 아줌마는 에어컨을 18도에 맞추고 선풍기를 켜고 잠바를 입고 있다가 뛰어나왔다.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는 것은 TV에 등장하는 썩을 정치인들이나 자기 이익을 더 챙겨 먹겠다고 그들과 결탁한 사업가들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더운 여름 저녁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증죄로 처벌받게 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