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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1. 2021

여름 휴가와 브런치 그리고, 무소유

법정스님이 브런치 작가였다면...

법정스님이 쓰신 <무소유>를 읽으면 난초 때문에 외출을 주저하는 스님의 마음이, 결국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집착했음을 깨닫는 과정으로 차분히 묘사된다.


지난 주말에 3일 일정으로 가족 여름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토요일에 용인 별장에 들러 하루는 보내고, 일요일 오전에 여수로 떠나 화요일 오후에 돌아왔으니, 사실은 4일을 여행하고 돌아온 셈이었다.

이제 곧 가족과 떨어져 있을 해외 생활에 앞서 마지막 여행인 셈이기도 했고, 주 5일 내내 환자를 보느라, 그렇지 않아도 늘 나가던 여름 외국 휴가도 나가지 못한다고 투덜대던 룸메이트께서 모처럼 말복이 낀 휴가 피크에 예약을 한 것이니 마지못해 운전대를 잡았다.

노을 지는 여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호텔 유리창에 붙어 찍은 샷

그런데 참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선 매일같이 연재하는 내 매거진의 글이 토요일 별장으로 떠나기 전부터 마음에 걸려 고민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쉽게 호로록 쓸 수 있는 일상적인 글도 아니거니와, 굳이 가족여행까지 가서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는 것은 조금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구독자는 고사하고, 읽는 이들도 하루 400명도 안 되는 글을 그냥 월, 화 이틀 연재를 쉬면 그만인 것을, 연재료 받아가면서 글을 쓸 때도 하지 않았던 저축분을 써둬지에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하여, 결국 나는 토요일 별장에서 '굳이'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분의 원고 4개를 완성시키고서야 마음 편히 이튿날 여행길을 떠날 수 있었다.

여수 가는 길에 들렀던 순천만 습지

브런치를 5월 말일에 시작하고서 아직 석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브런치는 내게 아주 특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독자들중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이들이 단 한 명도 없었고(물론 몇몇 이들은 이전에 내가 써두었던 글이나 그림을 보고 대번에 알아차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원고 청탁을 받지 않고 두 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장르가 다른 두 편의 글을 연재한다는 숨겨놓은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법정스님의 입장이 되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명은 고사하고 스무 명이 겨우 넘는 구독자들과 매일 라이킷을 누르며 읽어주는 독자들이 500명도 채 되지 않는 글에 이렇게까지 미리 저축분 원고를 써가면서 연재 약속을 지킬 필요가 있나?

토요일 별장에 도착해서 간만에 찾은 정원을 다듬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서재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글을 쓰는 나를 보며, 같은 침대를 쓰시는 분이 아들에게 똑같은 대사를 던졌더랬다.

그런데 방문 너머 흘려 들려온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건 그러기로 했던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니까..."

장범준의 연금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여수 밤바다'

맞다.

연재 계약을 맺고 돈 때문에 마감에 쫓겨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나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시작한 이었다. 엄청나게 인기를 끄는 작가는 아니지만, 몇 안되는 내 글을 읽는 이들 그리고 부러 라이킷을 눌러주는 이들을 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구독자는 채 서른 명도 안되는데, 매일 연재되는 매거진 글을 라이킷 하는 이들이 그 수를 훨씬 상회한다는 점이다. 즉, 일부러 내 글의 독자들은 알림이 없이도, 매일 이 공간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브런치에 매일같이 연재 글을 쓰는 작가들은 그리 많지 않더라. 무엇보다 돈을 받고 연재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 나처럼 그것도 하루에 두 편이나 연재 글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긴 하더라.

그래서 구독자가 적은 지도 모르겠다며 한 독자가 이런 글을 보내왔다.

"작가님의 글은 매일 꾸준히 연재되고 있어, 구독을 하지 않아도 매일같이 들어오면 날 위한 선물처럼,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어서 좋아요."


독자의 그런 메일을 받고 나니, 수천 구독자를 얻은 것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20여 년이 훨씬 지난 어느 여름방학에,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에서 팬레터라며 편집장이 키득키득 손편지를 한 움큼 가지고 온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대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방학이라 자신이 읽은 책의 저자에게 편지 쓰기가 숙제라며 독후감과 내 생각을 묻는 손편지였다.

지금은 손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거나, 우체부가 편지를 가져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 거의 없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있었더랬다.


일일이 모두에게 답장을 각기 다른 내용으로 적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 브런치에서 내 글을 읽는 이들은 대개 그때의 그 친구들을 기억나게 한다.

바다와 붙어있는 착시를 불러일으켰던 워터파크

마감을 2주 앞둔, 안데르센 리메이크작도 굳이 5편 모두 쓸 필요가 없었는데도 괜스레 '스스로에게' 약속한 탓에 월요일마다 올린다는 약속을 지켜오고 있었는데, 2편을 앞두고 월요일에 4번째 작품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 주에 남은 2편을 모두 올릴 준비를 하면서도 이런 내 모습이 낯설어 웃음이 나온다.)


지금 연재하고 있는 두 매거진의 글은 조만간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다.

어느 출판사에 어떤 판형과 어떤 콘셉트로 할지에 대해 고민 중이긴 하지만, 종이책이 갖는 매력이 있기에 그 나름대로 종이책으로 독자들과 또 새롭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시간으로 글을 쓰고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먼저 선을 보인다는 것은 여전히 재미있는 일이다.


브런치에서 글쓰기를 코치한다고 하는 이들의 글 중에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글은 쓸수록 는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제대로 된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고, 계속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프로세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숨쉬기처럼, 다양한 사유를 자연스러운 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글쓰기를 꾸준히 하는 것이 필수이다.

워터파크 물놀이를 마치고 호텔 바베큐장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바라본 여수 바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에 당분간은 꾸준히 글을 써나갈 생각이다.

논어를 풀어 읽는 것과 인생에 실패했던 위인들의 이야기를 연재하는 것에 체력이 어느 정도 붙었으니, 연재 매거진의 종류를 한 달에 한 편 정도씩 늘려나갈 계획도 가지고 있다.


역병의 창궐로 서울을 피해 생전 처음 가본 전라남도 여수는, 나쁘지 않았다.

20여 년 전 흔쾌히 책 표지를 그려준 허영만 화백이 추천해준 식당들도 나쁘지 않았다.

부러 찾았던,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유일한 여수 워터파크도 젊은 아이들에게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20여 년 전부터 써둔 초고와 아이디어 노트를 CD에 구워두었었다.

그걸 구울 당시엔 USB도 없던 터라, 디스켓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여 잘 챙겨두고 필요할 때마다 곶감빼어먹듯 잘 꺼내 더랬다.

같은 침대를 쓰시는 분이 내가 한국에 없는 틈을 타서 별장 서재의 책과 원고, 모아둔 학생들의 레포트까지 싹 다 버리면서, 그 CD가 묻혀 사라져 버렸다.

무려 탈고된 원고만 책으로 100여 권이었고, 틀을 잡아둔 초고만도 200여 권이 넘는 분량이었다.


같은 침대를 쓰시는 분은, 사과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또 쓰면 되잖아요. 여태 출간 안 한 거면 그건 안 쓴다는 거예요."

2019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했다.


이 조그만 비밀공간에 내 원고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어디로 날아갈 일이 없을 거라는 점도

나에게는 참 다행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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