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仁한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기준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과실은 각각 그 부류대로 하는 것이니, 그 사람의 과실을 보면 仁을 알 수 있다."
仁에 대한 개념이 언급되고 그것이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설명하자 질문들이 쏟아지고 의문들이 쌓여만 갔다.
"도대체 仁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仁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 질문 중에서도 사특하고 건방지며 시비를 거는 자들이 물었을 법한 질문이 있다.
"도대체 仁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답은 하나가 아니다. 정답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답이 많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가 아닌, 수많은 답 중에서도 공자는 묻는 자의 수준과 그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식을 택해 답해준다.
이번 답변은 그 수많은 방식 중에서도, 묻는 자가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대답을 듣고 이의 가슴을 뜨끔해지게 만드는 공자 스타일의 답변이다.
'무리黨'라는 것은 '부류類'라는 의미로, 당신이 지금 어울리는 무리의 부류를 통칭한다.
정자(程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과실은 각기 그 유대로 하는 것이니, 군자는 항상 후한 데에 잘못되고, 소인은 항상 박한 데에 잘못되며, 군자는 사랑에 지나치고, 소인은 잔인함에 지나치는 것이다."
특이할 점은, 우리가 완전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군자역시 잘못이 발생하는 경우를 설명하며, 반대점에 있는 소인과 비유하여 지나침의 원인을 비유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정자의 논리는 지나침이 늘 잘못을 불러오는데 그 중간을 택하지 못하고 군자와 소인이 양 극점의 단점을 보이곤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자칫, 그 무리나 부류라고 하는 것을 친구 정도로만 이해하고, 유유상종이니 그들이 생각이 비슷해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일반론적인 이해가 될까 싶었는지 오 씨(吳氏;吳棫)가 특정 예를 들어 죽비를 든다.
"後漢의 吳祐가 말하기를, '관리가 부모 때문에 오욕의 이름을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과실을 관찰하면 仁을 안다는 것이다."
대략 이야기의 핵심을 짐작한 이도 있겠으나, 자기 부모 때문에 사욕을 부렸던 자를 통해, 그가 잘못한 바를 살펴보면 그가 仁을 행했던 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본래 자세한 이야기는 <後漢書>, '吳祐傳'에 전하는데 독자들을 위해 간략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자하고 청렴하기로 이름 높았던 吳祐가 膠東侯의 相의 자리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밑에 색부嗇夫라는 하급관리로 있던 孫性이 몰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옷 한 벌을 장만해서는 그의 아버지에게 바쳤다. 그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孫性을 꾸짖고 옷을 돌려주며 상관을 찾아가 사실대로 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들은 吳祐는 “孫性이 부친에게 옷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부정한 일을 했으니 이는 바로 ‘觀過知仁’이다”라 하고 그 옷을 다시 그의 부친에게 갖다 드리게 했다.
‘斯知仁矣’의 仁을 人으로 해석한 이도 있는데, 그것은 仁을 '사람됨'으로 보다 넓게 해석한 것이다.
비록 아버지의 옷을 해드리겠다는 의도가 나쁘진 않았지만, 백성들을 속이고 세금을 더 거둬 부정을 저지른 孫性은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한 것이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그의 아버지를 위해서였다는 것은 결국 그가 평상시 부정한 행위를 감행할 때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였을 때 아버지가 꾸짖고 그 즉시 그 잘못을 바로잡도록 교육하였으니 그 부분 또한 인정하고 옷을 다시 주도록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굳이 논어집주에서 편집하여 넣은 의도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부류'에 대한 의미를 그 생각이나 태도를 유사하게 갖는 친구나 붕당으로 보는 것을 넘어, 핵심적으로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하는가?'의 대상을 찾은 것이다.
부모님께 효도하겠다고 뇌물을 받아 부모님을 드린다고 그의 부정부패가 깨끗하게 포장될 리 없다.
자기 자식 예쁘고 귀하다며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활용하여 부정하게 입학시키고 취직시키는 것이 仁일리가 없다.
가난하고 병든 아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아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칼을 들고 남의 집 담을 넘었다고 하여 그의 죄가 정상참작이 될 수 없다.
군자의 후함과 소인의 박함에서 과실이 발생한다는 비교는, 이번 장에서 더 확장해서 이야기를 하면 분량이 넘칠 위험이 있고, 앞으로 군자와 소인에 대한 비교가 수두룩하게 나올 것이기에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자.
"그렇다면, 과실을 범하고 난 이후에야 그 사람이 仁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인가요?"라고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질 사람이 나올 것을 우려한 주자는 다음과 같이 미연에 우문을 막는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또한 다만 사람이 비록 과실이 있으나 오히려 이것을 가지고 그의 후박함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였을 뿐이요, 반드시 그 과실이 있기를 기다린 뒤에 어짊과 어질지 못함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시금석 중에서 마침 과실을 저지른 자를 볼 경우, 그의 仁함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의 과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仁함을 확인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위의 그림에서 설명한 사자성어는,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다.
당신이 어떤 이들과 어울리는지를 보면,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혼밥족, 혼술족이 넘쳐나고 코로나 때문에 무리를 짓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소꿉친구, 국민학교 동창들이 나와 똑같은 성향 일리가 없다.
맞다.
이 말은 과거 정치를 한답시고 붕당을 이루는 무리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하지 않는 당신과 같은 일반인들에 대해서는 부류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엇을 추구하는 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예컨대, 교사들은 교총이라는 단체에 속해있고, 의사들은 의사 협회에 속해있고, 변호사들은 변호사협회에 속해 있으며 교수들은 교수협의회를 이루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짓고 있다. 그 무리를 왜 짓는가?
이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아무리 어떤 식으로 포장하더라도 이익단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 직업군의 집단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뭉쳤다는 것이다.
때문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같은 부류임을 확인하는 것은, 곧 결국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에 대한 지향점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하여, 그 어마어마한 집값에 대해 중계수수료가 발생하게 되면서 서울 강남의 아파트 매매를 한 달에 두어 건만 하는 부동산 중개사는 웬만한 대기업 간부급의 수익을 벌 수 있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수수료라며 손을 보려고 하자, 공인중개사협회는 크게 반말하고 나선다, 자기네도 먹고살기 힘들단다.
누구나 집을 사고팔며, 한국은 특히 전세라는 고유의 제도로 인해 매매와 전세 월세 거래는 계속된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몰렸던 것은, 그나마 괜찮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이라고 해서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지원자가 몰리고, 그들이 공인중개사협회에 적지 않은 회비까지 내가며 그 일을 한다.
당연히 개인 사업이니, 수익이 큰 것이 좋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부모나 그들의 자식도 집을 매매하고 전세 월세를 살려면 중계수수료를 내야 한다.
당신들 주변에 정치인이나 고위직 공무원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동네 부동산 아줌마 아저씨는 대부분 알고 지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은 곧 당신들과 크게 유리된 족속들이 아니라는 말이고, 곧 당신들이라는 말이 된다.
수수료를 고치게 되면 내가 내는 수수료는 줄어들지만 내 가족 지인 중개사의 수입도 줄어든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허구한 날 잘 먹고 돈 많이 버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딜레마에서 사고가 마비된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인문학을 공부하고, 매일 <논어>를 통해 당신의 사고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발생하게 된다.
대단하답시고 부와 명예를 좇는 국회의원들이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경찰, 검찰.
일반인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부정을 사고파는 기업인들과 법비들.
뉴스에 나오는 그들만의 한정된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의 부류는 물론이고 도대체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하는지 살펴보면, 그가 仁했는지 아닌지는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거 알아서 뭐할 것이냐? 당신이 왕이라서 그 사람을 쓸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이 당신에게, 당신의 그 티미하고 멍한 삶에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공부를 하던 삶을 살던 당신은 당신의 정신줄을 꽉 붙잡고 도대체 당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해 늘 생각하고 고민하고 반성하며 성찰해야 한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삶은 단 한번뿐이고,
당신의 삶을 어찌해 볼 수 있는 자는,
유일무이하게 당신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는지조차 모르면서
그저 살아가지 않기 위해
사는 삶은 정말 허망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기 위해서
그래도 텅 빈 머리와 공허한 마음을 채우겠다고
지금 당신이 인문학을 공부하겠다며
이 글을 읽고 공부하고자 하는 것 아니었나 말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겠다고 맘먹어도 맘대로 되지 않는데,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고 멍하니 있으면
어? 하는 사이에
훅 가버리는 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