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불변 고정의 진리란 없을 수도 있다.

시비충이 되어 가는 몰지각한 대한민국 정치인들에게 고함

by 발검무적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천하의 일에 있어서 무조건 이래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없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것도 없어서 義를 따를 뿐이다."

適은 오로지 그것 한 가지만을 고집하고 주장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아, 조금 당혹스러울 수 있을까 싶어 부연하고 시작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양해서 이룬 완성된 인격체를 '君子'라 칭하고, 군자가 해서는 안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나친 양극단으로 흘러 그러한 형태를 취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이다.

조금 외연을 확장해서 말하자면, '세상에 불변 고정의 진리는 없다.'라는 뜻이 되시겠다.

그런데 조금 특이하게도, 마지막 4글자(義之與比)가 툭 올라온다.

이전 장에서는 불친절하게도 감춰두었던 지향점을, 이번 장에서는 살며시 제시하고 보여준다.

'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듣겠습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에 대한 대답.

義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


친절하게 대답해준 것까지는 좋은데, 또 다른 개념, '義'가 등장하며 그 의미를 또 공부해야 할 일이 생겼다.

양극단이 아닌 중도를 택해 중용을 행해야 하는데, 그 중용을 행함에 있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으로 義를 제시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사씨(謝良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適은 可한 것이요 莫은 不可한 것이다. 가함이 없고 불가함도 없어서 만일 道로써 주장함이 없다면, 거의 미쳐 날뛰거나 스스로 오만방자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는 부처와 노자의 학문이 스스로 마음에 머무르는(집착하는) 바가 없어 변화에 응할 수 있다고 말하나 마침내 성인에게 죄를 얻게 된 이유이다. 성인의 학문은 그렇지 않아서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는 사이에 義가 존재해 있으니, 그렇다면 군자의 마음이 과연 치우치는 바가 있겠는가?"

굳이 謝氏의 해석을 모두 원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해했을 것인데, 부처와 노자의 학문은 문제가 있지만 유가는 그렇지 않다는 후대 성리학자의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공자의 사후 한참 뒤에야 이루어진 일이다.

다시 말해, 공자는 단 한 번도 불교에 대한 이단 의견을 내놓은 적이 없다, 아니,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이 장의 중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주석은 이 장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군자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버젓이 하고 있다.

꾸준한 학습과 수양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군자도 세상에 나오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도 부대낀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데, 상대방이 헛소리를 하는데, 그걸 뿅망치 가지고 후려칠 수도 없고 후려친다한들 상대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빌려들지도 않는다.

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너무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공자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설령 자기의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고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군자가 아니다. 따라서 옳지 않더라도 남의 주장도 존중하고 때로는 자신의 주장도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남의 주장이나 의견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옳고 그름에 대한 선악 시비 분쟁 자체를 군자가 일으키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반대를 위한 반대는 분쟁이 되고 분열로 치닫는다.


중정(中正)은 선악 시비를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義로 돌아온다.

義를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한자의 의미 '정의'로만 해석하면 당신은 영원히 초급을 벗어나기 어렵다.

義가 '정의'라는 의미로 고착화되기 전의 의미는, '인간으로서 갖춰야만 할 바른 도리'이다.

그래서 위에서 謝氏가 주석을 달면서 '道로서 주장함이 없다면'이라고 말하며, 공자가 언급한 의가 아닌, 道로 환치하여 기술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갖춰야만 할 바른 도리'는 어느 진영에 가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정의'라고 해석하고 이해하면, 그것은 진영의 논리에 따라 바뀌는 것이 된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의 정의가, 대한민국의 정의와 일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義)를 영어로 해석하면, ‘justice’라고 번역한다.

그리스 신화의 정의의 여신은 이름이 '디케(DIKE)'이고, 로마 신화에서는 '유스티치아(JUSTITIA)'라고 하는데 유스티치아는 정의를 뜻하는 영어단어 '저스티스(JUSTICE)'의 어원이다.

그 앞머리에 해당하는 ‘just’의 의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맞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도 이 의미는 본래 '중용'이고 '중도'라는 의미를 태생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군자가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주장만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 틀릴 수 없다는 수양에서 오는 겸양이고 높은 공부에서 오는 삼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의 주장보다 상대방의 주장이 의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상대방의 주장 자체를 공격하지 말고 의리에 부합하지 않는 이유를 조용히 설득해야 한다.

아무리 상대방의 주장이 의리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공격 일변도로 '네가 틀렸다고 그것도 몰라!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라고 나가기 시작하면, 결국 그것은 논리를 따지는 논쟁이 아닌 감정을 상하게 하는 개싸움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결국 의리도 잃고 사람도 잃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선악 시비를 따지는 것은 그 논쟁을 위해서이거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고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란 뜻이다.

요즘 대한민국 케이블은 하루 종일 정치뉴스와 스캔들로 도배가 되어가고 있다.

언론사에서 그렇게 갖고 싶던 방송권을 갖게 되고 만든 케이블 tv는 망하기 직전에, 최순실이라는 특종 아닌 특종을 만나면서 호재 아닌 호재를 맞이하여 기사회생하였다.

그 획기적인 씹을 기사들을 대낮부터 저녁 늦게까지 떠들어대면서 TV 이외에는 큰 재미가 없는 노령층을 중심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정치 이슈가 시들해져 뉴스가 사그라들라치니 노령층이 좋아하는 다른 집안의 살림살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부터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철저하게 장사치의 논리로 그 기회를 놓칠까 안절부절못하며 공중파의 피디와 작가들을 사 가지고 들으며 치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면에서 하던 헛소리를, 공중파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지들 채널에서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줌마 아저씨를 넘어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얼굴을 팔아서 정치권에 손을 벌리려는 전직 판검사랍시며 나오는 장사치 변호사들과 전현직 일간지 기레기 경력을 쌓은 패널들까지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며 해외토픽까지 지들이 읽기 시작했다.


시장논리가 그러하니 먹고살겠다고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정부 여당이 하는 것은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반대하고 물어뜯겠다며 시뻘건 눈을 희번덕거리는 야당이나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당할까 조바심 내며 야당과 결탁하여 들러붙는 언론을 보면, 그들이 군자는 고사하고 선악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하나 싶다.

정부 여당이 본보기를 보이고 잘하면 그럴 여지도 없겠지만, 다 똑같은 놈들인데 뭐가 크게 다르겠는가?

조선시대 당쟁사에 대한 글을 집필하면서 그들이 싸웠던 편지와 문서들을 일일이 대조하고 읽었더랬다.

한문으로 적혀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의 개싸움과 허접한 논리 부재는 이게 현재의 이야기인지 수백 년 전의 조선 조정에서 있었던 일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이른바, 양반 대갓집의 대단한 조선 문호였다며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이들조차 추악하고 지저분한 그 개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그들의 실체를 모두 적나라하게 일반인들에게 까발리고 싶었다.

그들의 목적은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같았다.

자신과 이익을 함께 하는 이들의 사익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상대방을 무조건 힐난하고 개싸움을 하겠다고 그 날카롭고 추악한 어금니를 드러냈다.


정치인에 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논쟁을 하거나 말 그대로 생각이 달라 부대끼는 일은 매일 매시간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당신이 뚜껑을 열고 주먹을 날리고 혀에 날이 바짝 선 검을 장착하기 전에, 당신이 무엇 때문에 그 논쟁을 시작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라.

처음 당신이 의도했던 것은 상대방을 그 날이 바짝 선 당신의 혀로 상대방을 난도질하려 함이 아니었을 게다.

당신은 상대방의 행동화를 요구하거나 상대방의 동의를 원했을 것이다.


그럼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신이 제대로 살고자 하고,

비록 군자가 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군자의 삶을 동경하고 그 근처라도 가고 싶은 자라면,

당신은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바른 도리'에 의거하여 당신의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

왜?

당신이 바라는 군자라 하는 존재는,

굳이 따지고 공격하고 싸우지 않아도

궁극적으로 이 사회가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바른 도리'가 무엇인지 통용되는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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