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디를 치장하고 어디에 가장 힘을 쏟는가?

누구와 더불어 道를 논할 수 있는가?

by 발검무적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가 道에 뜻을 두고도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道를) 의논할 수 없다."

여기서는 들어야 할 대상을 명확하게 주어로 삼고서 시작한다.

선비는 道를 수양하는 자이다.

道를 수양한다는 자의 기본적인 마음자세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을, 공자는 다시 가장 하등의, 그래서는 안될 모습을 지적하는 형태로 가이드라인을 긋는다.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지 싶긴 한데, 공자가 가르침을 주는 여러 가지 방식 중에서도 기본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금지' 혹은 가장 하등한 '그래서는 안 되는 금기'로 커트라인을 제시하고, 그 따위 행동을 해서는 시작조차 할 수 없음을 경계하는 방식이다. 말이 좋아 경계이지 날선 경고이고, 혼쭐내는 일갈이다.

그런 방식을 사용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그 따위 행위를 버젓이 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 공자가 한 이야기라고 한 것만 빼고 그대로 원용되어 있다. '성심(省心)'은 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라'는 의미이다.

이 장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마음에 道를 구하고자 하면서 口體의 봉양이 남만 못한 것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삼는다면, 그 지식과 취향의 비루함이 심하니, 어찌 더불어 道를 의론할 만하겠는가?"


정자(伊川)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대못을 박아 공자의 뜻을 확실하게 공표한다.

"道에 뜻을 두되 마음이 외물에 사역된다면 어찌 족히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다산 선생(정약용)이 이 장을 해설하면서, 선비라는 존재에 대해, '道를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자'라고 해석하지 않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적은 내용을 보면서 살짝 심기가 거슬렸던 기억이 난다.

조선의 성리학이 왜 원시 유학의 그것을 정치적인 의미로 돌려놓으면서 이상한 쪽으로 흘렀는지를 합리적으로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였다. 물론 다산 선생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벼슬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선비다.'라는 쪽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은, 조금 많이 아쉬웠다.


자아, 반면에, 이 장을 뼈와 가슴에 새기며 한 글자 한 글자 본래의 의미를 곱씹어 마음에 새겨 넣으신 분이 있다. 이제까지 <논어>공부를 하며 제대로 글을 읽은 이라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묵은 유실된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가 문화재청에 의해 1976년부터 청와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이게 청와대에 가 있었을까?

맞다. 바로 그분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 글을 쓰면서 다산 선생보다 그 공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 뜻을 자신의 뼈에, 가슴에, 마음에 새겨 넣었고, 현재의 우리 양심에 경종을 쎄게 울려주고 있다.


영화 <밀정>을 보면, 주인공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 역을 맡은 공유가 엄청난 스타일의 멋진 옷을 입고 나온다.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유로 인해, 하루를 살아도 멋지게 살자며 비싼 옷을 입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한다.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은 아니나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정장을 빼어 입은 사진을 단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다. 물론 시대와 활동영역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이 장의 글이 가진 본 뜻을 뼈에 새겨 넣었던 안중근 의사에게 단 하루를 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비싸고 멋진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같잖은 농담 그 이상도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 돈이 있으면 동지들이 먹을 밥을, 우리가 던질 폭탄 재료를 사는데 써야 하지 않겠나?'라며 분개하였을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당신은 이 장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략 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글의 반만 읽은 것이다.

이 글에는 방점이 담겨 있는 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모두(冒頭)에 설명한 바와 같이, 그래서는 안될 것을 말하는 방식의 가르침은, 동시에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통상은 그렇다.

그런데 공자는 이 불가능한 것을 해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도록 또렷하게 감춰두었다.


이 장은, <논어>의 첫 번째 편인 '학이편' 14장의 '食無求飽 居無求安(먹는 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 데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와도 통하는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 당연한 의문이 바로 뒤따라 나온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그런데 그 내용이 없다. 아니, 없지 않다. 적지 않았을 뿐이다.


이 장 역시 마찬가지 구조이다.

'지적한 언행을 하는 자에 대한 비판은 그렇다 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도를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게 어떤 사람인지 왜 설명을 안 해줍니까?'라고 물음이 바로 튀어나와야 정상이다.


힌트는, 당연히 위에서 지적한 반대급부를 생각하면 된다. 이 장에서 비판하는 겉치레에 대해 주자는 '口體'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이것에서 보이지 않는 뚜렷한 방점 부분을 읽어낸 다산 선생은 '心體'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후학들의 눈을 씻고 부벼준다.

이제 그대들의 눈에도 보이는가?

방금 전까지 몰랐었는데 막상 듣고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 그것이 道이다.

결국, 마음의 본체를 닦는 데에 힘써야지 눈에 보이는 것만, 당장 내 입에 달고 맛있는 것만 찾아서는 결코 안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조금 자세히 뜯어보자.

처음 말했던 것처럼 이 장에서는 일반론적으로 행위에 대해 금지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말해주고자 하는 대상이 있었다.

선비, 그것도 道를 구하겠다는 것에 뜻을 둔 선비.

그러한 자가 이따위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행위뿐 아니라 대상에게도 방점을 둔 것이다.

민民이라면,

그래선 안되지만 제대로 배움을 터득하지 못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유예해 줄 수 있다. 그러나, 道를 구하겠다며 수양을 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겠다는 자가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나는 늘 같은 침대를 쓰는 분에게 혼이 나곤 한다.

집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밖을 나설 때, 너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대강 걸치고 대강 눈에 먼저 보이는 편한 신발 신고, 편한 시계 차고, 편한 가방 들고 다녀서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게 하고 다니면 안 되냐며 늘 혼이 난다.

사실 잔소리를 들을 때만 조금 귀찮아서 그렇지 크게 괘념치 않는다.

명품을 입고 명품을 차고 걸치고 들고 다닌다고 하여 내가 더 훌륭해지지 않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잔소리에도 현실의 사회학이 녹아들어가 있다.


다들 그러니까,

뭘 입고 뭘 걸치고 뭘 들고 다니는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고 어떻게 대접할지를 판단하니까,

그런 현실적인 상황에 맞춰서 하고 다니라는 잔소리인 셈이다.


겉치장으로 먹고사는 연예인이야 직업상 그렇다 치자.

TV에 나온다고 다 연예인이 아니건만, 웃기는 짓을 하니 개그맨쯤 된다고 착각을 하는지, 정치인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이 명품 시계를 차고, 이태리 명장이 한땀한땀 만든 수제 수트를 입고 나온다.


호텔 사우나에 가면 겉멋 들린 듯, 자신의 이름 이니셜이 새겨진 수제 버튼다운 와이셔츠를 온갖 폼을 잡으며 거들먹거리고 입는다.

여기가 군대인가? 같은 옷이 많아 니 이름을 쓰지 않으면 잃어버릴까 봐 새겨야 했나?

묻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렇게 현실의 사회학적 분위기 때문이라던가 자신의 취향이 명품을 좋아하는 본성을 따르기 때문에 꾸미고 다니는 것은 개취존이라 그렇다 치자.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 자신의 수양을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자신보다 없는 이들을 위해 흔쾌히 여유 있는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기부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싶다.


아니, 그들이 청문회에 나오고 국회의원 되겠다고 유세장에서 서로 개싸움을 하다가 폭로전을 하며

기본적이자 필수라는 자녀의 학군을 위한 위장전입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치부를 위한 온갖 부정부패는 다 저지르고

그렇게 챙긴 돈으로 명품으로 처바른 것임을 서로 지적질해댄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보석이 잔뜩 꿰어진 마누라 손가락 위로 명품 클러치까지 쥐어준 그들의 행동이, 그들이 과연 '벼슬아치를 하기 위해 구도했던 선비'라는 다산선생의 설명에 부합한단 말인가?


부러, 비단옷을 입지 않고 무명옷을 찾아 입겠다는 선비의 행동이 오버라면, 반대로, 부러 비싼 맛집을 찾아다니며 지 배 불리고 인스타에 사진 올리고 명품 샀다며 인증샷을 올리면서 치장하고 다니는 것도 또다른 의미에서 쓰잘데기 없는 짓인 것이다.


무엇이 우선시 되는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겉을 꾸밀 것인가?

속을 착실히 다져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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