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부모님은 올해 춘추가 어찌 되십니까?

부모님이 장수하심에도 서글픈 자식의 마음

by 발검무적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연세는 알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知는 ‘안다’라고 해석하였지만, 실제 속뜻은 ‘기억한다’라는 의미이다. 부모님의 나이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정확한 숫자를 잊지 말라는 의미로 쓴 말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왜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다고 했을까? 부모님의 연세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와 뒷절의 퀴즈 같은 반대되는 상황은 당연히 하나로 연결된 하나의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을 해놓았는지 먼저 살펴보자.


“항상 부모님의 나이를 기억하여 알고 있으면 이미 그 장수하신 것이 기쁘고, 또 그 노쇠하신 것이 두려워서 날짜를 아끼는 정성에 있어 저절로 능히 그만둘 수 없게 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날짜를 아끼는 정성’이라고 주자가 설명한 것에 방점을 꽝하고 찍는다. ‘사랑할​ 애(愛)’라는 글자는 ‘사랑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끼다’의 의미로, ‘아까워하다’. ‘안타까워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밥을 대접으로 몇 공기는 먹어야만 배가 차는 돼지 같은 이가 밥을 먹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자신의 밥공기에 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워서이다. 여기서 그가 안타까워한다는 표현을 쓸 때 ‘愛’라는 글을 쓴다. 그는 밥을 사랑하는 거다.

날짜가 가는 것을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세월에는 한정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부모를 섬길 수 있는 날짜가 적음을 안타까워하여 하루라도 더 정성껏 봉양하려고 노력하는 효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계사년 6월 12일 을미.
잠깐 비가 오다 개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흰 머리카락인들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아! 자신에게 난 흰머리를 보고, 늙음을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 흰머리를 재빨리 뽑아 자신이 늙었음을 감추려 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확인하며, 어머니가 그만큼 더 연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고, 또, 늙으신 어머니가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자신이 늙고 세월이 갔음을 아이들이 부쩍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실감한다. 이순신은 늙으신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것조차 불효라고 여겨 자신의 남은 흰머리를 다 뽑아 없앴다.

계사년은 1593년, 이순신의 나이 불과 49세였다.

어머니 변 씨가 그를 서른에 낳았으니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서울 토박이였던 변 씨는 팔순을 바라보는 일흔아홉의 노구를 이끌고 아들이 있는 여수 군영까지 직접 가서 아들과 나라를 위해 매일같이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올렸다.

이순신은 이 일기를 쓰고 5년 뒤, 선조 31년(1598년)에 더 이상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지 못하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전사한다.

늘 강조하지만, 제대로 된 집안 교육에서 제대로 된 자식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순신의 어머니 변덕현 여사는 아들을 엄하게 제대로 교육시켜 바른 인재로 키워냈다. 그 아들은 자신의 흰머리를 보며, 하루하루 어머니가 늙어가시는 것을 애석해하며 자신의 흰머리를 뽑아 감췄다.

부모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자식에게 짐이 되려 하지 않으시려고 하신다.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당신이 아프다는 사실까지도 끝까지 부러 감추신다.

자식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걱정할까 싶어, 쓸데없는 돈을 당신에게 쓸까 싶어 감추시고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저 속으로 끙끙 앓으신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늘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살피는 자식이 그걸 모른다는 것 자체가 가능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나중에 아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효자는, 하루가 더 늘어나는 것에서 모순을 감각하게 된다. 하루를 더 건강히 지내셨으니 감사한데,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으니 언제고 떠나실 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 서글프다. 돼지가 자기 밥공기에 밥이 줄어드는 것을 슬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제대로 보고 배우며 자란 집안의 자식이 그러는 것이지, 본능적으로 아무나 다 그러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최근 사회면 기사와 뉴스를 통해 여실히 목도하곤 한다. 부모도 없이 자라 할머니에게 키워진 10대 호로자식이 할머니를 죽였다는 기사는 이제 대단한 뉴스도 아닌 단신으로 다뤄지고 넘어갈 정도로 임펄스 수치가 둔감해져 버렸다.

부모님의 거칠고 메마른 손을 제대로 본 적이 있던가?

돈이 넉넉하냐 넉넉지 않으냐는 효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돈이면 다 된다며, 돈으로 처발라 자식에게 외제차를 사주고, 한도 없는 카드를 쥐어주는 것은 결국 그 자식이 돈 때문에 칼을 움켜쥐고 더 내놓으라며 부모에게 달겨들도록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돈으로 키운 자식은 돈이 없어지면 달리 가르칠 방도가 없다.

돈이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자식은 그럼 효도하느냐고? 물크러진 호박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소리 하지도 마라. 절대 그렇지 않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돈이 넉넉한 부모는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헛소리를 하고, 돈이 부족한 부모는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거냐고 푸념을 한다.

자신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은 돌이켜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왜 그리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며 사느냐고 물으면, 그 부모라는 자들이 대답한다.


먹고사느라고, 내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다고.


다시 묻자. 정말 그런가?

먹고 살만 하고, 남한테 손 벌리고 살지 않을 형편이 되었음에도 주말에도 일한답시고 골프장에 나가고, 자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신의 부모님이 어디가 아프신지 뭐가 필요하신지 조차 돌보지 못하는 자가 뭘 할 수 있단 말이가?

그저 돈 몇 푼 더 벌겠며 강남에 아파트 하나 마련하지도 못하고서는 무슨 엄청난 재벌씩이나 되겠다고 돈돈해가면서 당신과 당신의 자식, 그리고 당신의 부모님의 삶을 돌보지 못하는가 말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부모’가 당신의 부모님을 지칭하는 것 같은가?

아니다.

바로 당신, 그래 당신이 문제라고 말하는 거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바로 당신에게 있는 거라고 일러주고 있지 않는가?

추석 연휴 지나고 바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 미안하다 할 줄 알았나?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가?

당신이, 그저 봉투에 5만 원짜리 몇 장 넣어 부모님 드리고 나서. 돌아오며 자식 할 도리 다 했다는 냥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가 미안해야 할 일이지,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가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당신이 왜 그리 숨가쁘게 살며 인간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쁜 것인지.

무엇을 위해 그리 사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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