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 한 단어로 언급하고 있는 ‘約’이라는 개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사씨(謝良佐)는, ‘約’을 ‘잘난 체하여 스스로 방자하지 않는 것’이라고 풀어 해석하였다.
그의 해석에 기초하여 ‘約’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면,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여 절제하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게 개념을 정리해놓고 보니, 이 장의 의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치고서 잃는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범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윤 씨(尹焞)는 이 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모든 일에 約하게 하면 실수가 적은 것이니, 다만 儉約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꽤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최근에 출간된 논어 관련 서적 중에서, 이 장의 내용을 ‘미니멀리즘’의 의미로 해석한 글을 보았다. 심지어, 윤 씨가 그것만이 아니라고 주석에 버젓이 달아놓았음에도 그 책의 저자는, 검약한 삶을 강조하며 이 장의 뜻이 그것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두었다.
그 책에서는,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약속도 많이 잡지 않고 적게 잡고 심플하고 간략하게 사는 삶이 실수할 여지도 적다고 적혀 있었다.
그 저자나 그 출판사가 무슨 의도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용기를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다.
아무리 그저 종이에 인쇄를 하면 책이라 부르고 그저 아무나 책을 내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폐지를 늘려서 종이 줍는 노인분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여 절제하는 것.
개념을 정리하여 놓고 적어보니, 너무 크고 어려워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부터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기약할 수 없다.
하여 이것은,'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어려운 문장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문장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늘 문제는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부간의 싸움이 그러하고,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그러하며, 전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살벌한 경쟁과 반목이 일어나는 이유가 그러하다.
내가 내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공격적인 언사와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임을 다른 누구보다 그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른 누구의 엄정한 판단이나 정리도 필요 없다. 그저 자신이 곰곰이 자신을 돌아보면 문제의 원인은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군자는 늘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늘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는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장은, <논어>에서 공자의 가르침이 전하려는 궁극적인 내용을 함축적으로 다양하게 담아낸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확대하면, 그 가르침의 외연은 더 크게 넓여지고 깊이를 더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양심을 바꾸고 고치려고 가르치고 설교할 필요가 없다. 나 자신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 어느 날 한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 엄마는 아이가 너무 사탕을 좋아해서 이가 다 썩을 정도로 심각하니, 아이가 존경에 마지않는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사탕을 이제 그만 먹으라고 하면 아이가 그 말은 들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간디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2주만 있다가 다시 오시겠습니까?”
아이 엄마는 간디의 엉뚱한 대답에 황당하긴 했지만, 그가 시킨 대로 2주가 지난 다음에 아이를 데리고 다시 간디를 찾았다. 그러자 간디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사탕은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도록 하려무나.”
이 평범하고도 뻔한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굳이 2주나 기다렸다가 오라고 하다니,아이 엄마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왜 2주나 있다가 오라고 했는지 간디에게 물었다. 그러자 간디는 겸연쩍은 얼굴로 아이 엄마에게 말했다.
“사실은 제가 사탕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려니 제가 그러면서 아이에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저부터 사탕을 끊고서 이야기하기 위해 2주간의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이들, 특히 남을 가르치는 직업이나 설교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너무도 쉽게 충고라는 명분을 가지고 멋들어진 말을 내뱉는 것을 자주 본다. 공자의 말을 빌자면, 그들이 혼자 있을 때, 즉, 그들이 실제로 생활할 때 그러한가를 보면, 오래 지켜보지도 않고, 밥 한 끼 먹으며 개인적인 모습을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가듯 보고 들어도 그들은, 그들이 하는 충고처럼 올바르게 살고 있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들이 못 배우고 몰라서 혹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온갖 어려운 말을 섞어가며 제자들이며 특강이랍시고 대중들 앞에서 심지어는 방송에까지 뻔찔나게 들락거리며 거드름을 피우고 심지어 그 표리 부동한 말을 엮어 책까지 출간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결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내가 지켜봤던, 소위 정치를 한답시고 여의도에 모여있는 이들, 정부 각 부처에서 고위직 공무원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정도가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결코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지적이, 이 장에서 공자가 지적하는 바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고, ‘그렇게 하고서도 잃는 자는 드물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 잃은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역으로 강조한 것이다.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을 위한 청문회를 열면 신상 털기 심하네어쩌네 한다. 교수였던 자가, 혹은 국회의원이었던 자가 청문회의 주인공이 되면, 같은 국회의원들이 봐줄거라 여겼다가도 너무 심하게 자신의 과거와 행적이 털려 망신살이 뻗칠 것을 우려하여 장관직을 쉽게 수락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이라는 직책에 눈이 멀어 추잡한 과거 행적이 모두 털리고 그나마 장관직조차 오르지 못하고 낙마하는 이들을 우리는 최근에 너무 많이 봐왔다.
만천하에 그 꼴을 당하고서도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내가 왕년에 이랬던 사람이네 하며 다닐 수 있는 그들의 후안무치에 경악을 표한다.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얼굴이 달아오르면 민망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을 갖춘 자라면, 그런 잃음을 하지 않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절제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천하의 쪽팔림은 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장의 가르침이다.
오늘 새벽 문득 독일어로 ‘해바라기’라는 이름을 단 이가, 일전 다른 매거진에 내가 올렸던 무개념 보건소에 관한 에피소드에 댓글을 달았다는 알림에 잠을 설쳤다. 그 댓글에는 ‘여자애,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부터 글쓴이의 편견이 읽혀지네요.’라고 쓰여 있었다. 잠시, 아주 잠시 생각했다. 물론 이전 같았으면 바로 불같이 일갈을 날렸을 법한 극히 버릇없기 그지없는, 시비였다. 내가 썼던 글에서 언급된 그릇된 행동을 보인 자들이, 여자였기 때문에 내가 그런 일침을 가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같잖은 페미니즘이 한 꺼풀 덮여, 마치 내가 여성에게 편견이 있는 꼰대정도로 보였던 모양이다.
‘편견’이 무슨 의미인지부터 제대로 교육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내 안의 초록 거인이 꿈틀거리는 것을 가만히 아주 가만히 눌러주었다.
내가 쓴 수많은 글에서 그릇된 사고와 잘못된 행동으로 사회를 좀먹는 것들을 지칭하거나 언급할 때, 나는 암수를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암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는 아마도 내가 고작 그 정도의 꼰대로만 보였던가보다.
거슬렸다, 그것도 상당히.
물론 브런치의 기능에는 자신이 쓴 글에 달린 댓글들을 직접 삭제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몇몇 그런 무개념 댓글들이 이제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나는 그 글들을 부러 지우지 않았다. 그것 또한 그들의 의견이고 그들이 내 글에 달고 싶어 단 글을 굳이 지울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다시, 오늘도 <논어>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부한 대로 행동한다고 하지만, 어디서고 삽질하고 지멋대로 읽어버리고서는 시비 거는 이들이 도처에서 게임 속 두더지처럼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때마다 뿅망치를 들고 그들의 머리를 후려칠 것인가? 아니, 그러는 게 의미가 있긴 할까?
그녀에게 뭐라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맘을 누르고 누르다가 이 말을 조심스레 건넨다.
말도 아닌 글을, 행간도 아닌 문면의 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제멋대로 다른 사람을 평하는 것, 그것을 ‘편견’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