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만 앞세우는 자들에 대한 충고

by 발검무적
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에는 민첩하고자 해야 한다.”

이 문장은, 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에 민첩해야 한다는 뒷 문장에 방점이 찍힌다. 여기서 어눌하다는 의미는 실제로 말을 더듬거나 한다는 의미보다는 말을 삼가기 때문에 마치 더듬는 듯 말수가 적다는 정도의 의미가 더 정확하겠다. 그런데, 말을 더디게 하고 행동을 민첩하게 하는 것이 군자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사 씨(謝良佐)가 이 장에 대해 해설한 부분을 통해 그 연결고리를 살펴보자.

“함부로 말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어눌하고자 해야 한다. 행하기를 힘쓰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민첩하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사 씨는 가장 쉬운 것과 가장 어려운 것으로 놓고 설명하였다. 말하는 것만큼 쉬운 것이 없다. ‘내가 다 해드릴게.’ 입에서 내뱉기는 너무도 쉽다.

그런데 그 말대로,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아 힘들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것을 해보지도 않고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결국 그것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동이 민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혹은 어눌하게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 수는 있으나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실천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바지런해야만 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바쁘게 실천을 위해 뛰어다니면 입을 놀릴 겨를이 없어진다.

공자는 일찍이 말만 익숙한 달변을 지극히 경계하고 심지어 싫어하는 것처럼 말했다. 공자가 웅변에 능하지 않아서 질투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말더듬이에게 진실이 더 느껴졌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그 전에도 심지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을 잘하는 이들은 너무 많아 발에 채인다. 국회의사당에 가면 그런 이들은 박스에 꽉꽉 세트로 채워져 있다.


요즘엔 온갖 삼류 언론 케이블사에 시사프로에 태극기 부대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겠다고 달변으로 무장한 전 국회의원, 전 판사, 전 검사, 교수, 코로나를 빙자하여 방송 스타가 된 감염내과 의사에 이르기까지 아주 가관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준비되고 훈련된 달변을 무기로 여의도에 입성한 번호표라도 하나 받아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고자 한다.

공자가 추하다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 말만 익숙한 이들이 행동에 힘쓰고 민첩하고자 한다면 방송 따위에 그렇게 빈번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자신의 분야도 아닌 해외토픽까지 원고를 읽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시간이라면 자신의 분야에서 아니면, 차라리 집에서 아이들을 올바로 키우는데 묵묵히 힘을 쏟아야 할 텐데 그들은 아침부터 미용실을 찾아 머리를 만지고 띵띵 부은 얼굴에 메이크업을 하고서는 카메라 앞에 앉아 민생에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 당파싸움을 중계하거나 양측을 서로 변호하고 앉아 있다.

언젠가 우연한 기회에 영농후계자 교육이라는 것을 참관한 적이 있었다.

앞부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에 잔뜩 왁스를 발라 고정시킨 남자가 알록달록한 파워포인트까지 돌려가며 화려한 입담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강연을 듣고 있어야 할 실제 농사를 짓는 아저씨들이 졸거나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이사이 객쩍은 우스갯소리에 적당히 반응하는 것 같은가 싶었는데 그들은 정작 그의 강연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용이 아마도 새로운 농사 방식의 적용을 소개하는 것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청중의 반응은 무료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순서가 끝나고, 투박하고 오래된 양복을 입은 남자가 재킷 대신 점퍼를 단정하게 올리고 단상에 올라왔다. 그는 파워포인트도 아닌, 오래된 달력 종이 같은 전지에 매직으로 글을 쓰고 직접 찍은 사진인지 사진을 붙여 왔었다. 새로운 영농법의 실패와 극복사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청중은 물론이고 다른 장소를 두리번거리던 사람들까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강연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사투리를 섞어가며 ‘아니 그기 아니라’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그의 말투는 세련은 고사하고, 맥락이 툭툭 잘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보이지 않는 작은 사진을 보겠다고 그의 설명을 들으며 앞으로 나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설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으니 그는 소개된 새로운 영농법을 최초로 1년간 적용하여 거기서 문제가 되는 실질 사례를 발표하기로 하고 어렵게 강연을 허락한 30년 차 농부라고 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그가 지난 1년간 그곳에서 소개한 이론을 땅에 직접 적용했던 그의 피와 땀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곳을 찾은 이들은 대개 새로운 영농법에 의문을 품고 과연 그것이 제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섞여 있었던 터라 누군가 직접 그것을 1년 넘게 해서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뭐가 좋은지를 실제로 보여주는 그 강연이 그날 그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 농사일을 하루 작파하고 온 이유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국회의원들이, 고위 공직자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문제가 발생한 지역에 인부로 뛰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장마나 홍수, 혹은 천재가 벌어진 현장에 그들이 한두 시간 양복 입은 보좌진을 이끌고 가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차라리 그들의 월급으로 제대로 된 일꾼들을 사서 보내주면 참으로 고맙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일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인부들 틈에 있는 사진 한 장이 필요해서 갔으니 그 드라마틱한 사진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주연배우가 직접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인들의 행태를 지적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놈들이 그렇지.’라며 공감하는 당신은 어떠한가?


아이에게 뭘 해주겠다고 툭툭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하지는 않았는가?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발 동동 구르며 노력하고 뛰어다니고 했던가?


지금은 아내인 연인에게 손 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준다는 그 뻔한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정말로 뭔가 실천하려 하긴 했는가?


술을 끊겠다고 담배를 끊겠다고 가족들 앞에서 공언하고서는 그렇게 했던가?


아이를 낳고 몸이 늘어지고 배가 풍선처럼 나와서는 열심히 운동하겠다고 살을 빼겠다고 말하며 그 입에 또 군것질을 넣진 않았던가?


그런 사소한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며 웃고 있나?

그 사소한 조각들이 하나하나 쌓여 당신의 삶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렇게 허술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기에 당신이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저 그런 서민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 그리고 계속해서 성과를 내서 당신이 부러워하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쌓았다고 하는 이들은 뭔가 특별하고 신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하나하나의 조각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맞춰가고 쌓아갔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실없이 내뱉는 그 말은, 당신의 삶을 구성하는 조각을 구멍 나게 하거나 썩게 만든다. 그런 자들의 삶이 사회를 구성하는 조각을 구멍 나게 하고 좀 먹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고 그 사회는 어느 한순간 폭탄이 터지듯 붕괴되는 것이 아니다.

표제의 제목으로 쓰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글은 노자의 <도덕경> 56장에 나오는 ‘知者弗言, 言者弗知’라는 문장의 해석이다. 어설프게 유교 어쩌고 하는 서당훈장들이 어떻게 <논어>를 강독하면서 도가를 원용할 수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리석고 우매한 자가 없길 바라지만, 있다면 얼른, 멀쩡한 공자의 유학을 정치적 이념으로 활용하려고 이상한 성리학이라는 이름의 유교로 만든 조선시대로 꺼져주길 요청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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