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의 기술

충고를 하는 목적은, 내 곧음을 보이고자 함이 아니다.

by 발검무적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자유가 말했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간언을 자주 하면 곤욕을 당하게 되고 친구와 사귐에 있어서 충고를 자주 하면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數는 여기에서처럼 ‘자주’라는 의미로 새길 때는 ‘수’라고 읽지 않고, ‘삭’이라 발음한다.

이 문장은 기본적인 가르침이라 여겨, <명심보감> ‘성심편’에도 실려 있다.


잔소리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걸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특히나 그것을 이행하지 않아 자주 똑같은 지적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짜증 나고 기분이 나빠질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장은, 이 당연하지만 불편한 사실에 대해 일러주는 것에서 그치고, 그러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

그래서 호씨(胡寅)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한 문장 뒤에 숨겨진 행간을 이렇게 해설한다.

“임금을 섬김에 간했던 말이 행하지 않으면 마땅히 떠나야 하고, 벗을 이끄는데 선한 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땅히 그쳐야 한다. 번거로운데 이르면 말한 자가 가벼워지고, 듣는 자가 싫어한다. 이 때문에 영화를 구하다가 도리어 욕을 당하고, 친하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소원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말이다. 옳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먹히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떠드는 것은 현명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말이다. 임금을 바로잡게 되면 그 공을 인정받아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지속적인 바른말로 인해 욕을 당하게 되고, 친구와 더 오래가기 위해 그 친구를 위한 조언을 했지만, 결국 그 친구가 나를 멀리하게 되고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곱씹으면 궁극적인 해결책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임금에게서 떠나고 친구에게 그만하여 내 쪽에서 그 사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주석으로 범 씨(范祖禹)가 의미심장한 선문답 같은 해설을 남겨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신 간, 붕우 간은 모두 이로써 합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이 같은 것이다.”

군신 간이나 붕우 간이나 의로 맺어진 관계인 것이 같기 때문에 동일한 비교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말이 왜 실마리가 되는가 잘 읽히지 않는가? 앞서 부모님의 잘못된 판단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공부한 바 있다.

맞다.

임금과 친구는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달리해야 함을 구분하여 말한 것이다.

사실,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도 충고를 함에 있어 감정을 건드리고 충돌할 여지가 많은데 하물며 군신과 붕우 간에는 더 위험할 수 있음을 강조한 말에 다름 아니다.


해야 할 도리는 하되, 위험한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가이드라인의 설정인 셈이다.

나는 이 장에서 알려주고자 하는 궁극적인 가르침을, 문면에 드러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보다 그 문장을 곱씹어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그러니 어떻게 충고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으로 읽는다. 때문에 그 문면에서 준 실마리를 잡고 곰곰이 생각해본다.

실마리는, ‘무엇을 위해 충고를 하는가?’이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 호씨(胡寅)는 해설이 실마리라고 말한 것이다. 호씨는 영화를 위해서 임금에게 간하고, 더 친해지기 위해 친구에게 조언한다고 풀어 설명해주었다.

충고를 하는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충고를 하는 사람의 태도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 문제임을 이 문장은 지적한다.

그것은 이전 장에서 부모님에게 간하는 방법에 대해 논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똑똑하고, 옳고, 내가 아는 것을 당신은 왜 모르냐고 가르치려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다. 충고의 가장 큰 목적은 내가 상대를 아끼는 마음에서 상대의 행동화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내가 나 잘난 맛에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 충고일 수 있다는 경고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너무도 적확하게 들어맞는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힘을 가진 강대국이 ‘정의’라는 명분 하에, 분쟁지역의 약소국들에게 ‘힘’으로 평화를 강요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정의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굴욕적이고 해당 지역의 미묘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하다.

미국이 나섰던 베트남전이 그랬고, 걸프전이 그랬으며, 최근 아프간 철수 사태가 그러하였다.

해결된 것이 없고 도리어 문제만 더 악화시켰다.

거대한 국가 간의 외교문제가 어렵다면 당신의 친구에게 당신이 어떻게 충고했는지를 생각해보라. 처음은 당신이 보기에 친구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충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듣지 않을 때,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그 친구를 잃을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친구가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은, 당신의 생각처럼 그가 멍청하거나 너무 다른 쪽에 꽂혀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가 그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당신은 당신이 현명하고 상황에 대해 제대로 판단했기 때문에 당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신뢰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당신이 상대에게 얼마나 신뢰가 쌓여있는가 하는 부분이 당신의 충고가 상대에게 미치는 데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미 주식으로 집안 재산을 다 말아먹고 신용불량자로 있는데, 악화일로의 주식시장에 재산을 몰빵 하려는 친구에게 ‘내가 해봤는데 지금 네가 하려는 행동은 내 뒤를 걷겠다는 것뿐이야.’라고 하는 충고는 거의 영향력이 없다. 오히려 당신이 주식과 코인으로 큰돈을 벌어 강남의 빌딩을 하나 샀다면, 당신이 말하는 충고는 상당한 파급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로 돌아와 보자. 충고를 왜 하는가? 자칫 우리는 임금에게 간하는 충신의 충정이 그저 충정일까 하고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모두가 임금에게 달라붙어 사실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야기만을 할 때, 충정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마음에서 간하는 것은 충신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그런데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부화뇌동하고, 임금은 이미 눈꺼풀이 제대로 된 충언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만이 독야청청한 충신이 충언을 입에 담는 것은, 충정 이전에 머리가 안 좋은 것이다. 충언이 목적이 자신만은 청렴결백한 올바른 삶을 살았으니 그냥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는 커밍아웃이 아닌 다음에야 충고의 목적을 간과한 채 자신의 도덕적 결백에 목숨을 던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충고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천륜 관계인 부모님에게조차 부모님이 올바른 판단을 하실 수 있게 간하되, 한번 간하여도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의 평정을 찾고 다른 때를 찾아 간하라 하였는데, 하물며 남에게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이 논어 읽기 시리즈를 원고 청탁을 받은 연재 칼럼도 아닌데 이곳 브런치에 매일같이 연재하는 이유 또한 그에 다름 아니다. 뭐 요즘은 인터넷때문에라도 신문을 잘 읽지도 않지만, 진영 논쟁으로 갈려 기레기들의 편집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신문에 칼럼이랍시고 몇 번 연재해봐야, 빤한 진영의 빤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읽거나 내던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브런치에는 읽고 싶지 않은데 눈에 띄어 그냥 읽을 수밖에 없다는 구조가 없다. 내가 그것을 읽고자 하여, 그리고 매일같이 이어진 연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고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서 공부하고 스스로 수양하겠다고 하는 이들만이 찾아서 읽기 때문에 내 이 허접한 충고와 가르침이 행동화에 조금이나마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충고는 그래서 듣는 사람의 마음자세가 중요하네 뭐네 떠들어봐야, 충고를 하는 사람이 훨씬 더 지혜로워야 하고, 현명해야 하며 인내심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충고를 듣게 될 상대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있어야만 한다.

자유의 초상

이 말을 공자가 아닌, 그 제자 자유가 하였고, 그것을 이인편의 마지막 장에 넣은 것은 편집한 이들의 보이지 않는 안배와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드디어 '이인 편'이 끝났습니다. <논어> 총 20편 중 4편까지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학이편 1장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학이편의 중간부터는 일부러 한 장도 빼먹지 않고 한장한장 모두 새기기 시작하였으니 <논어>의 5분의 1에 대한 공부를 마친 셈이네요.


본래 이렇게까지 진중하게 완독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어느 사이엔가 조금씩 분량도 늘어가고 상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 <논어>를 다시 읽으며, 어떻게 풀어쓰면 더 잘 이해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이렇듯 오늘까지 차곡히 쌓여왔습니다.


‘논어 읽기 시리즈’와 ‘실패한 위인들 시리즈’를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쓰며 연재를 시작한 지 오늘로 4개월이 되는 날입니다. 본업을 따로 두고 있는 입장에서 매일같이 원고지 80매 이상을 써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조용히 구독과 라이킷으로 응원해주며 함께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매일 한 장씩 그 걸음이 더딘 듯 하지만, <논어> 읽기를 끝내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날이 될 때면 함께 읽고 공부한 모두의 마음의 키도 훌쩍 자라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공야장편’에서도 더욱 힘내어 정진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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