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다는 <논어> 의 글귀 중에서 가장 유명한 몇 구절에 속하는 장, 되시겠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작 이 문장을 배우면서도 가르치면서도 나는 이 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한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문장의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도 당연한 말인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이웃(隣)'이라 쓴 말은,'가깝다(親)'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특이할 것은 없다.
먼저,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문장을 해석하는지는, 주자가 이 장에 대해 붙인 해석을 보게되면 조금 쉽게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덕은 고립되지 않아 반드시 같은 類끼리 응한다. 그러므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동류의 따름이 있을 것이니, 마치 거주하는 곳에 이웃이 있는 것과 같다.”
많은 이들이 문장 그대로 이해한 것처럼, 덕을 갖추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모이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덕을 갖추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뭇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굳이 틀렸다고 트집 잡을만한 해석도 아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제대로’ 이 장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라고 보기엔 2% 부족함이 느껴진다. 왜일까?
자아, 생각해보자. 당신에게 누군가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라는 말을 해주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맞다. 이 말은, 위로와 격려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 장의 방점은 ‘반드시(必)’에 있다. '반드시' 그렇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런 경우가 좀처럼 없기 때문에 강조를 하기 위해 쓰는 것이 화법의 기본이다. 그래서 앞문장인 덕불고(德不孤)는 반어적 의미를 가진다. 외롭지 않다고 쓴 것은 실제로는 많이 외롭기 때문이고, 그 외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반드시(必)’ 당신을 따르는 동류가 있을 것이니 너무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실제 상황을 돌이켜 한번 회상해보자.
당신이 알고 있는 덕을 갖췄던 사람에게(물론 ‘덕’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그를 좋아하고 따르고 하던가?
덕의 개념이, 마냥 가진 것을 퍼주고, 모두에게 오냐오냐 친절하게 대해주고, 호구 노릇을 해준다는 의미가 결코 아님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위한 힌트는 '고독하다(孤)'라는 한 글자이다.
올바른 것을 옳다고 하면, 고독해진다.
그것이 옳은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자기 이익을 챙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치자고 하면 고독해진다.
그 잘못을 한 사람이 밑의 사람이기보다는 위에서 일을 집행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고, 설사 그 일을 집행한 이가 밑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국 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집행하라고 한 사람, 혹은 무리가 있어 잘못을 지적한 자가 린치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즉, 사실은 어떤 것이 옳은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뭇사람들이, 자신의 손톱만큼 남은 양심의 울림에 불편함을 느껴 정작 덕을 갖춘 자를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이 비양심적인 사람이 아님을 억지로 우기려는 갖가지 공작을 감행하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이 글을 쓴 공자의 삶이 그러하였다.
공자는 위정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덕을 갖추려고 노력하였고 실행하려고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삶이 이웃들이 넘치는 추앙받는 삶이었던가?
'상갓집 개'라고 놀림을 받으며 평생을 어느 한 나라에서도 그를 중용하여 쓰지 않았다.
공자에게서 배운 제자라고 인정받은 이들이 하나둘 제법 큰 자리에 등용되어 스승의 가르침과는 조금 다르게 적당히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했을 때도 공자는 제대로 된 공부를 통해 제대로 된 정치를 일깨우라고 일갈했다. 그래서 그는 더없이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었다.
맞다.
그런 삶을 살아봤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혹은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고난의 길에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는 말이 바로 이 장의 요지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덕은 고독의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공자는 누구나 인정할 만큼 고독한 인생을 살았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손에 자랐으니 삶의 시작부터가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 수양을 하여 그 고독의 강을 건너면서 공자는 덕을 갖춘 스승으로 성장해 갔다.
덕을 베푸는 삶은 혼자서 독야청청하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덕을 베풀 수 없다. 덕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재부(財富)를 기부를 통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도 덕이다. 하지만 더 궁극적인 것은 공자가 했던 것처럼 사람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배우고 익힌 지식과 지혜를 베푸는 것이 더 큰 덕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배고픈 이들에게 당장 빵과 우유를 주는 것은 배고픔을 가시게 할 수 있지만,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학교를 제공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하여 그들 스스로가 재부를 생산해낼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해주면 그 사회가, 그리고 그 국가가 변화하여 더 이상 배고픔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너무도 간단한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그것은 쉽지 않다.
나는 20여 년간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다. 그만큼 세월이 변했고, 세태가 변했으며, 무엇보다 학생들이 변했다. 글에서 이미 읽혔겠지만, 나는 말랑말랑 대강대강 강의를 하는 스타일이 못된다. 학생들이 아무리 많아도 두 번째 시간 이후부터는 출석부를 보며 출석을 부르지 않으며, 그것이 외국 대학의 외국 학생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선생이 무슨 강의를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정작 나보다 그 학과에서 더 오래 있었던 교수들이, 심지어 나는 외국인이고, 그들은 그 나라 교수들이었음에도 그들이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물론 그것 하나만 가지고 그들의 인성을 비판하는 것이 조금 과도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육에 애정을 가진 자가 상대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강의도 그렇지만, 나는 학점에 있어서도 그리 너그러운 편이 되지 못한다. 부러 엄격하고 살벌한 기준으로 가지고 F를 빵빵 때리는 이상한 교수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출결이 부족하면 성적을 줄 수 없다든지 제출해야 할 리포트를 내지 않거나 거짓말로 핑계 대며 시험에 나오지 않은 것을 인정해달라든지 하는 학생들의 거짓말이 발각될 경우, 그에 응당한 조치는 반드시 취하여 다른 학생과의 형평성을 맞춘다. 그 뿐이다.
대학에서 학점이 평가의 기준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개나 소나 모두 A+투성이이니 졸업 후 그 학점을 가지고 기업에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이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지경이니, F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기준에 맞춰 성적을 주는 내 강의평가에 학생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리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내 강의를 거쳐간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묵묵히 제대로 공부했던 제자들은, 결국 판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흔히 사회에서 말하는 잘 나가는 자리에 올라, 수년이 지나도 연락을 꼬박꼬박 해오고 있다. 졸업후 수년이 지난 그들이 한결같이 내게 전해오는 말은, 제대로 가르쳐주셔서 그렇게 배웠던 것들을 밑천으로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지금도 그 영향력을 느끼며 산다는 감사의 인사이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간증 수준의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어느 학생은 예뻐서, 어느 학생은 리포트에 예쁜 그림을 붙여서, 또 자신의 강의평가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A+를 숱하게 날려대던 교수라는 이름이 아까운 자가 그런다.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중까지 책임질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렇게 공들여서 가르치고 뭐하러 진 빠져가며 그렇게까지 가르칩니까? 그냥 서로 편하게 편하게 하세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예요.”
그런 쓰레기들에게는 주먹을 날리는 것조차 아깝다. 그런 자들이 정년퇴임을 할 때 혹은,그들이 부모상을 당해 장례를 치를 때, 학생들이 지발적으로 달려가 그의 퇴임을 축하하거나 그의 부모 장례를 도왔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학생들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결코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의미를 이해한 자들은 뒷구절을 마저 적지 않는다.
공자는 자신이, 덕이라는 것이 외롭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느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버려서는 안될 것을 잘 알기에, 자신의 길을 따라오는 몇 안 되는 이들에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해주고자 하는 맘으로 이 말을 했던 것이다.
당신이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힘들고 외롭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겠지만, 당신이 가는 그 길은 제대로 가는 것이 맞다고,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다른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인이라 불리는 내가 인정할 테니 조금 더 기운내고 포기하지 말라고 끝내 ‘반드시’ 알아봐 주는 이가 있을 거라고 목이 터져라 수천 년 앞서 간 길에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사는 것이, 덕을 갖추는 것이 어찌 마냥 쉽기만 하겠는가?
아니, 그리 좋은 것이 쉽기만 한 것이라면 어느 누가 달겨들어 서로 행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당신 역시 사람인지라 편하고 쉽게 가는 것이 좋다한다면 내 어찌 만류하겠는가마는, 그래도 당신이 이 논어 읽기 시리즈를 읽으며 한 자라도 더 공부하고 스스로를 일깨워 제대로 된 삶을 가고자 하고, 당신의 자녀가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본을 보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그 길이 험난하여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길일지라도, 결코 고개를 돌려 외면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