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사람을 평가할 것인가?

자기 기준에 갇혀 평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한 가르침

by 발검무적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공자께서 공야장을 두고 평하시기를, “사위로 삼을 만하다. 비록 포승줄에 묶여 옥중에 있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하시고,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공자께서 남용을 두고 평하시기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버려지지 않을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형벌을 면할 것이다.” 하시고,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公冶長’ 편은 인물들에 대한 평론이 주를 이룬 편으로 그 시작을 공자의 제자인 공야장으로 시작하였기에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온 ‘謂(위)’라는 글자는 단순히 ‘이르다’라는 의미가 아닌 ‘(사람에 대해) 평가하다’ 혹은 ‘평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니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공야장의 초상

公冶長(공야장)은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노나라(일설에 제나라) 사람으로 성은 公冶(공야), 이름은 장(萇), 자는 자장(子長)이라고 한다.


南容(남용) 역시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성은 남궁(南宮), 이름은 괄(括), 자는 자용(子容)이라고 하는데, 맹의자(孟懿子)의 형이다. 흔히 남궁경숙(南宮敬叔)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신분상으로 대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공자보다 신분이 높기는 하나, 아버지의 유언으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이다.

남용의 초상

제자에 대한 평을 하되, 역시나 평가의 방식이 독특하다. 그저 공야장은 공자가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고, 남용은 자신의 질녀, 그러니까 형의 딸을 시집보내어 질부(조카사위)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이게 무슨 사람에 대한 평가냐고 의아해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특히,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짝을 당신이 점지해줄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을 사위로 삼을 것인가?


당연히 인물도 출중하고, 돈도 많고, 집안도 좋으며, 사람 됨됨이도 훌륭하고 기타 등등 당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가와 상관없이 최고의 짝을 찾아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 마음이기에, 이 사람은 괜찮다라던가 이 사람은 쓸만하다라던가 따위의 애매모호한 평가보다 피부에 확 와닿는 평가를 내린 것이 바로 이 장의 평가방식이다.

공자의 형제관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부연하자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노나라의 시 씨(施氏)에게서 딸 아홉을 얻었고, 다른 부인에게서 아들 맹피(孟皮)를 얻었으며, 노나라의 안징재(顔徵在)에게서 공자를 얻었다. 이 장에서 말하는 형은 그의 이복형인 맹피(孟皮)를 가리키는 것인데, 형의 딸, 즉, 질녀가 시집갈 당시에는 그가 이때 이미 죽었었기 때문에 공자가 질녀의 혼사를 주관한 것이다.

늘 그렇듯이,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뭐라 해설을 달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妻는 딸을 시집보내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다. 縲는 검은색의 포승이고, 絏은 결박이다. 옛날에 옥중에서는 검은색 포승으로 죄인을 결박하였다. 공야장의 사람됨은 상고할 곳이 없으나, 夫子께서 ‘사위 삼을 만하다’고 칭찬하셨으니, 그에게 반드시 취할만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사람이 비록 일찍이 옥중에 갇혀 있었으나 그 사람의 죄가 아니었으니, 진실로 사위 삼는 데에 나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릇 죄가 있고 없음은 자신에게 있을 따름이니 어찌 밖으로부터 이른 것을 가지고 영욕을 삼겠는가.

주자의 해석을 보면, 유의해서 봐야 할 부분들이 도드라져 나온다. 유의해서 봐야 할 점 두 가지.

한 가지는, 죄를 지어 옥에 갇혔음에도 그의 죄가 아니었다고 공자가 단정지은 것.

또 한 가지는,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 즉, 마지막 문구에 언급된, ‘죄가 있고 없음은 자신에게 있을 따름이니 어찌 밖으로부터 이른 것을 가지고 영욕을 삼겠는가.’하는 선문답 같은 설명이다.

규율과 규범, 법규에 대해 엄격했으며 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공자가, 죄를 지어 갇혔던, 다시 말해, 전과가 있는 이에게 ‘그에게 잘못이 없다’라고 한 것은 예의 주시할만한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도대체 그는 무슨 죄로 옥살이를 했단 말인가?


공야장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면, 그는 특이하게도 새와 의사소통이 가능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새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고 자신이 소리 내여 새들과 의사를 소통하는 것 때문에 무고(誣告)를 당해 투옥까지 당했다고 전한다.

새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고발당하여 투옥까지 되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옥살이를 했다. 중요한 것은 당시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음에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단언하는 공자의 사고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법규와 잘못된 법 적용에 대해 공자는 단호하게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판단을 내린다. 주자의 해설중 마지막 문구에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닌, 엄한 사람들의 누명에 의한 것은 영욕에 의한 것이기에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다음, 조카사위로 삼은 남용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不廢는 반드시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가 언행에 삼갔으므로, 잘 다스려지는 조정에서는 쓰임을 받을 수 있고, 난세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일은 11편(선진 편)에 보인다.”

남용에 대한 부분은 구체적인 자료가 보이지는 않으나 뒤의 11편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대맥은 공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주자의 해설처럼 그의 사람됨이 훌륭하여 정치가 안정되었을 때는 크게 쓰일 것이고, 그렇지 못했을 때에도 화를 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만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마친다. 이게, 말이 쉽지 그리 평범한 평가가 아니다.

남용이 공자의 조카사위가 된 이유, 네 글자

두 가지 상황, 좋을 때고 나쁠 때고 모두 쓰인다는 것은 남용이 이후, 사람들에게 들었던 ‘경숙(敬叔)’이라는 용어에 후대의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경숙(敬叔)’이란 극존칭은 아무에게나 사용하는 호칭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혹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부르는가는 역사적 사실자료를 검토하기에 앞서 객관적 평가의 근거가 되곤 한다.


<주자 집주>에서 이 장에 대한 마무리로 재미있는 뒷말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개해보자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야장의 어짊이 남용에 미치지 못하므로, 성인께서 그 자식을 공야장에게 시집보내고 형의 자식을 남용에게 시집보냈으니 이는 형에게 후하고 자기에게 박한 것이다” 하였다.

두 제자 중에서 더 훌륭한 남용을 장유유서(?)의 유교적 전통에 따라 형의 사위로 양보하고 그 보다 아래였던 공야장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는 말이 나왔던가보다.


공자의 열혈팬이자 직계제자임을 자인하던 정자(伊川)가 이 가당치 않은 말에 발끈한다. 그런데 그도 배운 자인지라 그것을 꼬집는 방법이 공자의 가르침을 닮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성인을 엿본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혐의를 피하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본래 지극히 공정하시니, 어찌 혐의를 피할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딸을 시집보내는 일은 반드시 딸의 자질을 헤아려서 배필을 구하는 것이니, 더욱이 피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공자의 이 일로 말한다면, 그 나이의 많고 적음과 시기의 앞과 뒤를 모두 알 수 없거니와, 다만 혐의를 피했다고 하는 것은 크게 옳지 않다. 혐의를 피하는 일은 현자도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성인에게 있어서이겠는가?

​여기에서 수수께끼 하듯 언급하는, ‘혐의를 피하는 일’이란, 내 사위는 똑똑한 사람으로, 형의 사위는 모자란 사람으로 한다면, 남들이 욕하는 일이니 그것을 피하기 위한 일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즉, 반대로 더 좋은 제자를 내 사위로 삼고 그다음에 해당하는 제자를 조카사위로 삼으면 그 역시 오해를 사고 이상한 말이 나올 것임을 ‘혐의’라는 말로 꼬집은 것이다.

결론인즉은, 딸과 질녀의 나이와 상황에 맞게 짝을 지어주었을 뿐, 어떤 여타의 의도 따위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는 설명이다.

행여, 잘못된 유교적 전통으로 여식의 배필을 부모가 점지해주는 것이 어쩌고 하는 트집을 잡으려는 꼴페미가 없길 바란다. 이 장의 핵심은, 그런 피상적이고 같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장의 핵심은, 어떤 이들이 지금은 곤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삶의 궤적이 인(仁)에 처해 있다면, 현실의 권세와 재력이 없음을 따지지 않고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공자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기준과 모습을 일깨우는데 그 중점(重点)이 있다.


최근에 통화를 했던 서초동 법조계에 눌러앉은 친구 녀석에게 로펌은 굴릴만하냐고 안부를 물었더니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다.

“요즘은 자문료로 한 번에 50억 정도는 받아야 아 일 좀 하는 변호사구나 하는 게, 한국 정설이야.”

내가 한국을 떠나 있어 모를 줄 알고 툭 던진 농담에 이렇게 답해주었다.

“정확히는 세금 떼고 28억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가 금세 알아듣고는 박장대소하였다.

법비들의 세계를 리얼하게 꼬집은 드라마 <귓속말>

법비들, 내가 이 논어읽기 시리즈를 연재하며 매번 언급하고 후려치는 그 법비들이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게이트 아닌 게이트가 터졌다. 하필이면 그 법비들이 머리 나쁘고 멍청한 자식들로 인해 그간의 비리가 드러나 신세를 망칠 것이라는 말도, 용한 점쟁이의 예언처럼 적중하여 여러 건이 줄줄이 걸려 나오고 있다.


변호사라는 자가, 자신이 더 큰 이익을 보기 위해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여 구속까지 되었다.

거기서 갑자기 전관이자 특검까지 지냈다는 자가 변호를 맡는다.


그리고 그는 뜬금없이 무죄로 빠져나온다.

검찰도 썩어빠졌기는 매한가지이니 그런 결과가 가능하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검찰에서 구속수사까지 벌여 그를 단죄하겠다고 했을 때, 무죄로 빠져나오는 일은 결코 흔치 않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 불가능에 가깝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구속해서 수사하기 시작하면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내서라도 죄인을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의 경찰이고 검찰 아니었던가?

멀쩡히 눈 뜬 법비의 여신

그런데 참 웃픈 말이 법조계, 특히 검찰에는 있다.

오늘의 범죄인이 내일의 고객

검사 짓을 하면서 취조하고 구속시킨 양아치, 조폭, 기업 총수들이 계속 그 건과 연루되면 그 사건을 맡았던 검사가 옷을 벗고 버젓이 그의 변호인으로 자리만 바꿔앉아 사건을 담당하게 되는 상황을 이르는 것이다.

매우 심한 경우는, 해당 피고인을 구속해서 수사해야 한다고 했던 검사가 그 사건이 3심으로 채 종료가 되기도 전에 옷을 벗고 나와 그 피고인의 변호인 명단에 이름을 넣거나 차마 서류상에는 이름을 넣지 못하고 원격 지원을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검사들은 조사를 받는 '억울한' 피고인들을 신경 써주는 척 이렇게 말한다.


기소해서 일이 심각해지기 전에 빨리 변호인의 도움을 받으시라고.


그 말의 행간을 정확하게 해독하면 이러하다.

나와 학벌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든 전직 내 상관이든 그들을 찾아가 거액의 수임료를 내놓으시고 나에게 연락을 취하게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으니 얼른 그리 하시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검찰의 전관예우는 완벽하게 윈윈 전략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컴퓨터도 없던 시대에 사셨던 공자가 죄는 그 스스로가 알 뿐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영욕에 따른 것들이라 믿을 수 없다고 단칼에 내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뭐가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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