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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7. 2021

FBI가 여자 문제 캐내 인권운동을 그만두라며 협박해도

내 사생활 문제 때문에 대의를 접을 순 없다.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흑인 가정에 비해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이어서 교육을 제대로 받는 등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본래 이름은 마이클 킹 주니어였으나, 1934년 유럽 여행에서 독일을 방문하면서 독일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이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마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과감히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들 부자(父子)는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되었다.


어릴 때 한 백인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흑인이랑 같이 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따라 목사직을 택하는 것보다 법을 공부해서 흑인들을 대변하겠다고 결심하고,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여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심하게 빚었다. 결국 목사가 되기로 아버지와 화해하고 모어하우스 칼리지와 크로저 신학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보스턴 대학교(BU)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이자 인권운동을 함께 한 코레타 스콧(Coretta Scott)과 결혼하게 된다.

 

대학을 다니면서 받은 갖가지 인종차별로 인해 목사가 된 이후 흑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앨라배마에서 버스 안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을 위해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 5만 명이 넘는 앨라배마의 흑인들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두 다리를 이용했으며, 차가 있는 흑인들은 카풀로 버스 회사를 압박했다.

1년간에 걸친 운동 끝에 결국, 로자 파크스는 풀려나고, 흑인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체포되는 법령은 그 자체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낸다.

이를 계기로 하여 그는 흑인 인권운동에 있어 전국적인 지도자로서 부각된다.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개신교 침례회 목사로 통칭, ‘킹 목사’라고 불리는 이니셜인 MLK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이야기이다.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을 비롯한 수많은 운동을 이끌어 공민권법 · 투표권법의 성립을 촉진시켰으나 1968년 멤피스에서 암살당하였다. 1964년에는 그의 비폭력 인권운동이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최연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 정부는 마틴 루터 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그의 날로 정해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특히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설교와 연설로 유명했는데, 그가 한 수많은 연설 가운데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했던 교과서에도 실려, 이 연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대단한 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식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명 연설은 본래 이날을 위해 따로 준비한 원고가 있었지만, 수많은 인파를 보자 마음이 바뀌어 평소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하겠다며 즉흥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이 연설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킹의 핵심 주장이자 그의 사상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은 '흑인과 백인, 둘은 어느 하나 우월한 인종이 아니라 평등하며 따라서 평등하게 대우받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였다. 같은 흑인 인권운동을 했지만, 급진적 성향을 띤 것으로 유명한 말콤 엑스는 킹이 백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그의 인권운동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비판했다. 다소 방식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킹은 1965년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궁극적인 대통합을 계획했다.

1968년 2월 4일, 킹은 고향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설교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이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그는 암살당했다. 1968년 4월 9일 역시 같은 교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킹의 아내 코레타는, 2월 4일의 설교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하였다.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弔辭)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1964년. 35세. 역대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것과 그 밖에 많은 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날, 마틴 루서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몸 바쳤다는 것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설교는 ‘드럼 메이저(Drum Major) 설교’ 또는 ‘나는 정의를 위한 드럼 메이저입니다(I Am a Drum Major for Justice)’라는 제목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드럼 메이저는 본래 행진 악대나 고적대의 맨 앞에 나서 이끄는 사람을 뜻한다. 킹은 ‘드럼 메이저 직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직분, 소명을 뜻한다. 그는 이 설교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드럼 메이저였다고 말하고 싶다면, 정의에 헌신한 드럼 메이저였다고 말하십시오. 평화에 헌신한 드럼 메이저였다고 말하십시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헌신했던 삶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1968년 3월 29일 마틴 루서 킹은 흑인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를 방문했다. 궂은 날씨 탓에 일을 하지 못하고 귀가한 흑인 근로자들은 2시간치 임금을 받은 반면, 함께 귀가한 백인 근로자들은 하루치 임금을 받았던 것. 마틴 루서 킹이 멤피스로 타고 가는 항공편에 대한 폭파 위협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기도 했다. 4월 3일 마틴 루서 킹은 메이슨 교회에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이 연설 말미에는 폭파 위협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2월 4일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예견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에 투숙한 마틴 루터 킹은 4월 4일 오후 6시 1분, 2층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당했다. 당시 나이 39세.

범인으로 체포된 인물은 제임스 얼 레이.

그러나 그가 범행 자백을 번복하면서 마틴 루터 킹 암살에 관한 갖가지 음모론이 제기됐고 논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검시(檢屍) 결과 마틴 루터 킹의 심장 상태가 60대의 그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의 불꽃같은 삶은 그의 심장을 에너지원으로 하여 너무도 빨리 소진시켜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해가 있을까 싶어 말하자면,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게다가 본캐가 학자라는 입장에서, 1990년에 밝혀진 그가 자신의 박사논문을 자기 학생의 논문을 그대로 60% 이상 베껴 썼다는 사실 등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연재 시리즈는 완벽한 인간에 대한 위인전이 아니다. 이 연재 시리즈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인간이기에 실패하고 좌절했던 들에 대한 기록과 참회다름 아니다.

 

일반인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도덕성을 요구받는 직업인 목사들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인 면에서 추악하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며칠 전 한국의 뉴스를 보다가 동양 최대의 교회를 여의도에 만들어 기네스북에 오른 목사였던 자가 별세했다는 것을 보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뭐라고 9시 뉴스에 따로 1분 30초나 되는 귀한 메인 뉴스 시간에 세계 소식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라도 한 꼭지를 차지해야 했는가 어이가 없었다. 더 우스운 것은 그의 별세 소식을 다루면서 앵커의 마지막 멘트였다.


“그는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하여 교회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고발사건에 휘말렸고, 횡령 관련 사실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 검찰에 기소되어 처벌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런 걸 뉴스에 내보내는 그 이중적인 데스크의 판단이 정상적인지 싶어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렸다.

 

킹 목사가 논문 표절을 했고 여성편력이 있어 여자 문제가 복잡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파헤친 사람은 에드거 후버(John Edgar Hoover) 당시 FBI 국장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48년 동안 미 FBI를 지배하며 8명의 대통령을 거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보수주의자로 악명 놓았던 후버 국장에게, 흑인의 투표권을 주장하는 킹 목사의 존재는,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 후버가 처음 킹 목사를 감시하기 시작한 것은, 흑인 공산당원들과 가까이 지내는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국가전복 활동이 미국 최대의 위협이라고 여겼던 당시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후원한다는 증거가 나오면 킹 목사를 단숨에 몰락시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20여 차례의 도청이 실시되고 킹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지만, 후버가 바라는 공산주의 활동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대신, 후버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도청 내용이 발견됐으니, 바로 킹 목사의 문란한 성생활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맞다.

겨우 서른이 넘으면서 스타덤에 오른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목사인 그는 교만할 때도 있었고, 특히 자신의 유려한 연설과 설교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더욱 만에 빠져 자신을 종교지도자에 비유하는 등 어설프기 그지없는 행동들을 보였고, 여성편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의 영웅, 특히 흑인들의 영웅인 그에 대한 감추고 싶은 비밀에 대해서는 미국 법령을 통해 2027년까지 비공개하도록 규정하였으니 그때가 되어 잘못된 부분에 대해 공개하고 그에 맞는 비판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 목사가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다녔다는 사실또한 바꿀 수 없는 진실이고, 그가 인권운동과 설교로 돈을 챙겨 뒷주머니를 차고 지 마누라 지 새끼에게 챙겨줬다는 ‘한국스러운’ 지저분한 뒷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다. 때문에 혼외정사 관련사실이 공개되었을 때도 정작 국민들의 욕을 먹은 것은 킹 목사 측이 아닌 FBI였다.

후버 부국장은, 이러한 사실을 이용해 루스벨트를 압박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킹에게 인권운동을 멈추라는 익명의 협박 편지까지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충격 때문에, 킹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살로 사라져버리해결방식을 택하지 않겠다는 용단을 내린다.

모든 여자 문제에 대해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 다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FBI는 신문기자들에게 킹의 여자관계에 대해 폭로하는 기사를 내라고 압박했지만 어떤 신문기자도 그에 응하지 않고 거부했고, 오히려 후버야말로 치졸하게 남의 약점이나 캔다는 전국적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유명을 달리한 서울시장의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인권변호사 일을 할 때부터 나는 개인적으로 그와 친분이 좀 있었다. 이후 ‘아름다운 가게’를 여는 일을 할 때도 음으로 양으로 돕는다고 하긴 했지만, 정작 정계에 본격적으로 출사하고 나서는 소원해졌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뭔가 이전처럼 가깝게 지내는 것이 오해의 여지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과 워낙 바빠진 그의 일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고 응원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계속 그 곁에서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내가 사건에 대해 언급할 것은 아니다.

굳이 킹 목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생각난 것은 최소한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기 때문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을 어찌 알겠느냐고 하면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그가 해온 일과 그가 이룬 일에 대한 평가가 폄하되거나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매도되는 것은, 뭔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흔도 되기 전의 삼십 대의 철없는 킹 목사가 전국구에서 세계적인 인권운동가로 인정받고 35살에 노벨평화상까지 타면서 오히려 더 큰 스타병에 걸려 더 심각한 ‘한국적인’ 범죄를 벌였다면 나는 이 연재 시리즈에 그의 이름을 결코 올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의 부와 명예를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한국적인 방식’으로 살았던 자가 아니라, 약자였던 흑인들을 위해, 불공정했던 이 세계의 균형을 바로 잡으려고 목숨 걸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그의 생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구분하여 이해하고 싶다.


인간은 미약하다.

모든 유혹에 약하고, 감정에 휩쓸리고, 미약하기 그지없어 어떤 것에라도 의지하고 싶어 한다.

모든 이는 살면서 여러 가지 유혹을 받고 때론 실수하고 실패하고 그 때문에 좌절한다.

당신이 실수했을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해 당신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서 당신의 인생이 모두 망쳐버렸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는 당신이 그래도 된다고 허락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해주려고 한다.

아울러, 당신이 인간이기에 모든 실수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입에 발린 위로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미 저지른 실수에 대해 만회하며 살라는 말이다.

당신의 실수를, 그리고 실패를, 좌절하며 죽음으로 갚을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삶으로 갚아라.

치열하고 불꽃같은 삶으로,

당신의 심장을 불살라가며 실수를 만회하고 실패를 보완해서 그 실수로 인해, 그 실패로 인해 아파했을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했던 이들에게 평생 갚으며 살란 말이다.

 

지가 싸질러놓은 빚을 갚지도 않고 먹튀 하는 자,

죽어서도 한 줌의 안식조차 갖지 못할지니...

뼈에 새겨두고 명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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