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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23. 2021

14살에 낳은 아이가 죽고 마약에 쩔어 타락했었음에도

흑인 여성이라는 타이틀로 세계 최고 여자 부자에 올라서다.

1954년 미시시피 강 근처에 있던 가난한 흑인 마을인 코지어스코에서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 버논 윈프리와 어머니 버니타 리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육에 일체의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겨우 18세에 불과했던 어머니는 가정부로 생계를 해결하기 바빠서 딸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6살 때까지 농사일을 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집에는 TV도 없는 데다가 인적이 매우 드문 시골 마을이라 집 주변엔 말을 건넬 이웃도 없어 심심했던 그녀는 항상 농장에 있는 가축들에게 말을 건네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3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뛰어난 말재간과 암기력을 보여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외할머니의 애정 어린 교육으로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높은 어휘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6살 때 외할머니가 병으로 그녀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밀워키에서 파출부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의 집으로 이사 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하여 그녀에게는 관심과 애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품은 그녀는 공부와 독서를 부지런하게 하여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14살 때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서 자신이 유일한 흑인이라는 사실과 부모님의 관심 속에서 부유하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백인 친구들을 보며 극심한 열등감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9살 때부터 계속되는 친척의 성폭행으로 인해 그녀는 견디다 못해 반항아로 변해 집 밖으로 나돌게 된다. 돈을 훔쳐 가출한 14세의 소녀는 불량아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원치 않는 임신까지 하게 된다.


반항아로 변해버린 그녀를 감당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녀를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이발소를 하는 아버지 집으로 보내버린다. 새어머니와 재혼한 상태였던 아버지는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도와주긴 했으나 1968년,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아기가 2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자신의 기구했던 운명과 태어나 2주도 살지 못한 아기에 대한 죄책감을 견뎌내기 어려워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마약이나 대마초에 의지하며 현실을 잊고자 했다.

미국의 방송인이자 배우로, 미국 쇼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 그야말로 가난과 절망을 딛고 전 세계 흑인 여성들 중, 아니 여성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로 2021년 3월 포브스 기준 재산이 무려 27억 달러 (한화 약 3조 460억 원)에 달하는 오프라 게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15살도 되기 전에 2주간 아기의 엄마였던 그 흑인 소녀는 마약과 대마초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선택한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격려와 지지, 그리고 제대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자신의 강한 의지였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렇게 그녀는 동네 인근 고등학교에 다시 진학하였고, 전교회장에 당선되는 등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꿈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개최된 여러 스피치 경연 대회나 콘테스트에 출연하며 나름 지역에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19살이 되는 해에 라디오 프로 진행자로 취직하는 행운을 잡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방송인으로 일하기 시작하게 된 오프라는 한 지역의 저녁 뉴스 공동 뉴스캐스터로 방송을 시작한다. 하지만 뉴스에 너무 자기감정을 실어 전달했다는 사유로 8개월 만에 낙마한다. 당시 그녀의 뉴스캐스터 낙마 사유에 대해서 방송국 내부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폭로되면서, 방송국 간부들은 오프라의 면전에 대고 모욕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녀는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별까지 하게 되자, 오프라는 견디다 못해 스트레스성 폭식을 하기 시작해, 110kg에 육박할 정도로 급속히 살이 쪄서 주변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그녀의 즉흥적인 감정 전달 방식의 방송 진행 스타일 덕분에 활동무대를 낮 시간대의 토크쇼 <People Are Talking>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지역 방송 토크쇼에 나와 진행된 인터뷰에서 "당신이 만약에 100만 달러를 상금으로 받게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여타의 토크쇼 참가자들이 저축한다라던가 부모님에게 뭘 사다 드리겠다느니 하는 보통 일반적인 대답을 한 것에 반해, 오프라는 갑자기 "나 혼자 다 써버릴 거예요. 저를 위해서 말이죠."라고 답한다. 진행자가 "하지만 그다음은요? 돈은 쓰면 다시 벌기가 어렵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그녀는 똑 부러지게 "그만큼 계속 벌 자신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후 오프라가 어마어마한 재벌이 되고 나서 당시 진행자를 인터뷰한 내용이 있는데, 당시 그는 속으론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20년도 안가 그녀가 엄청난 부자가 된 걸 보고 감탄했다며 회고하였다.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 방송 당시

1983년 오프라 윈프리는 시카고에서 낮은 시청률을 가진 30분짜리 아침 토크쇼인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 방송 진행자가 되었다. 당시 AM Chicago는 가장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프로로, 당연히 아무도 오래갈 것이라 예상치도 못했던 이 방송은 한 달 만에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1986년에 드디어 프로그램 이름까지 그녀의 이름을 내건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며, 미국 전역에 동시 방송되기 시작했다.

이후 당대 미국의 최고의 토크쇼라고 손꼽히던 '필 도나후 쇼'의 시청률을 가뿐히 역전시켜버리는 전설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1988년에는 영화 제작 스튜디오, 잡지 발행사 및 촬영장을 두루 갖춘 3헥타르(30,000㎡) 규모의 하포 스튜디오(Harpo Studio)를 설립하며 미디어 사업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오프라의 토크쇼에는 2011년 종영되기 전까지 3만 명이 넘는 출연자들이 나왔으며, 스포츠 선수·연예인에서부터 대통령 및 정치인·종교인·예술가 등 모든 분야의 인물들을 가리지 않고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하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전 세계적인 대박을 거둬들였다. 25년간 총 5,000회 방송, 미국 내 시청자 수 2,200만 명, 전 세계 140개국 방영, 일일 시청자 수 700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녀가 자신의 토크쇼를 위해 마이클 잭슨을 이용만 하고, 심지어 그가 죽어서까지 그의 무고를 공격했다는 둥, 자신의 쇼 시청률을 위해서는 ‘직설적’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사람들의 치부를 마구 공격해대는 화법을 썼다든지 하는 등의 인성과 관련된 부분은 이 연재 시리즈에서 굳이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방송일로, 그것도 하루하루 시청률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현역 성직자도 개차반인 인성 논쟁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 연재 시리즈에 입각해서 보자면, 남편이 부자라서 얻은 주식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닌, 철저하게 자신의 노력만으로 번 돈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성, 그것도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서 그녀의 인생 역정을 듣고 나서도 그녀가 어떤 실패와 좌절을 겪었는지 되물을 바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이 아무리 자유를 대표하는 나라라고 착각할는지 몰라도 그녀가 태어날 즈음의 미시시피주는 인종차별이 심각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고, 지금까지도 그녀 이후 흑인이 방송계에서 진행자로서 그녀만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라는 곳이 유색인종에게 얼마나 차별을 대놓고 가하고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이들 빼고는 다 안다.

 

위에서는 간략하게 서술하였으나, 그녀가 15살에 미혼모를 감수하고 낳은 아이가 2주도 살지 못해 죽고 그녀가 마약에 빠져 지냈을 때 그녀를 수렁에서 건진 것은 그녀의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이었다. 아무리 곁에서 애정 어린 훈육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약중독자에 10대에 막살았던 흑인 문제아들이 바로 고등학교로 복귀해서 제대로 졸업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별로 대단한 학벌은 아니지만, 테네시 주립대학을 16년 만에, 방송을 뜨고 나서 졸업한 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힘겹게 생을 버텨왔는지 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라서’, ‘유리천장이 있어’ 힘들어 죽겠네 어쩌네 어쭙잖은 페미니즘을 불러젖히며 그 노래의 한가락으로 먹고사는 가면 쓴 것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토악질이 나온 기억이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 여성이 승승장구하는 상황보다 지금 한국이 여성차별을 뚫고 성공하는 것이 더 어려운 상황이냐고 그것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평등으로 인한 문제의 핵심은, 페미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들쑤서거려 지 밥 거리를 삼고 사는 쓰레기들이 페미니스트랍시고 나대다가 정작 제대로 깨어있는 같은 여성 전문가들에게 매장당하는 시대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어쭙잖은 가부장적 사고로 그것이 남자의 전권인 양 구는 것들 때문에 사회가 일그러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지 돈줄로 연결하려는 쓰레기들이 별반 그들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양극단은 결국 사회를 좀 먹어 들어오는 벌레일 뿐이다.

이젠 70을 바라보는 최근의 그녀 모습

당신이라면, 특히 당신이 여성이라면 더더욱 14살에 임신한 아이가 죽는 모습을 보고 마약에 쩔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모범 고등학생으로 다시 거듭날 수 있겠는가? 겨우 방송 뉴스 캐스터로 들어갔는데,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을 불어넣는 게 심하다며 8개월 만에 강판당해 방송국 간부들에게 볼 때마다 깨지고 욕먹어 폭식을 거듭하여 100킬로가 넘는 돼지가 되었다가 다시 칼을 갈고 번듯한 자신의 이름을 단 토크쇼의 진행자로 거듭날 수 있겠는냔 말이다.

이제 곧 70을 맞이하는 그녀의 인생 어느 한 구비구비 편하고 노곤노곤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자신의 불우했던 10대와 암울하기 그지없던 방송 초년 시절조차 방송의 소재로, 자서전의 가장 극적인 재료로 승화시켰다. 그녀의 굴곡진 삶은 그녀만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주었고 그녀는 방송으로 화려해진 이들이 가장 하기 싫어한다는 자신의 감추고 싶던 치부를 드러내어 전설의 자리까지 올랐다.


당신에게 있어 감추고 싶은 치부가 왜 없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면서까지 그걸 팔아 돈을 벌겠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드러냈는지 당신에게 들려주며 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제 쇼의 출연자들도 그렇지만, 저도 제 이야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일단 말로 풀어 꺼내 놓으면, 다시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브런치에 당신의 이야기와 당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치유받는 과정을 경험했다면, 이 말의 의미를 분명하고도 아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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