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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24. 2021

동성애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는 한이 있어도

내가 만든 음악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1840년, 러시아의 우랄 지방 봇킨스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계 어머니의 배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교육을 받았다. 이상할 정도로 음에 대해 민감했다고 한다. 1848년에 그의 집안이 페테르부르크에 이사하자, 그곳에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다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맨 왼쪽이 그가 8살 때의 모습

특히,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다. 185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법률학교 내에서도 합창단에 들어가 음악 공부를 이어 나갔다.


1859년에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1860년에 루빈시테인(Рубинштейн)형제가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한다. 그 음악교실이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어 1기 학생이 되었고, 이듬해 음악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법무성을 사직한다.


졸업하자마자 1864년 안톤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문을 연 모스크바 음악원에 초대되어 교편을 잡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에 들어갔다. 1868년에는 처음으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의 사람들과 만났으나, 이들 국민악파의 작곡가로부터 영향은 받으면서도, 유럽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여, 러시아 민족적인 것과 서유럽적인 것의 절충적 작풍을 고수했다. 그 때문에 그는 흔히 ‘서유럽파’라고 불린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 러시아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알렸으며 ‘발레곡의 대가’라고 불리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의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의 음악은 서유럽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좀 더 전문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러시아적인 센티멘털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낭만적인 표현을 큰 매력으로 하고 있는 19세기 러시아 최대의 작곡가이라 평가됨이 정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오늘날 연주회에서 다뤄지는 그의 작품을 보면 너무 제한된 곡들만이 반복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가 작곡했던 6곡의 교향곡 중에서는 후반에 작곡된 3곡만이 연주되고,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이탈리아 기상곡〉, 그리고 오페라 중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 여왕〉, 그리고 3편의 무용조곡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외에 나머지 작품은 거의 무시되다시피 홀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수많은 가곡은 질적 가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로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음악인들에게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때문에 오늘날 작품 전반에 걸친 재평가 작업이 시급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차이콥스키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잭슨이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늘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런 점을 여실히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신혼여행 1주일만에 별거한 차이콥스키 부부

1877년에 그의 여제자였던 안토니나와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한 뒤, 극도의 신경 쇠약 때문에 학교 생활과 작곡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결국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1878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사실 그는 1876년부터 그의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해주던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데즈다 폰 메크(Надежда Фон Мекк) 부인으로부터 매년 상당한 연구비와 생활비를 받고 있었는데, 경제적,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원조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약 15년 동안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플라토닉 한 우정을 나누며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는데,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것은 오직 2~3번뿐이었다고 한다.

 

또 러시아 황제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자, 교직을 사임하여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 무렵부터 작품상으로도 제1 피아노 협주곡, 발레 <백조의 호수>, 가극 <에프게니 오네긴>, 바이올린 협주곡 등의 걸작이 연달아 만들어지고, 스위스나 이탈리아 등 국외로 여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1888년에는 자작의 지휘, 소개를 겸해서 널리 유럽 각지에 연주 여행했고, 1892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지휘자로, 이듬해에는 런던에서 음악 활동을 최후로 귀국하여, 페테르부르크에서 제6교향곡 <비창>을 초연했으나, 한 달후인 11월 6일 콜레라에 걸려서 53세를 일기로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차이콥스키의 무덤

자아, 여기까지가 여러분들이 위인전이나 책에서 읽어 대강 알고 있던 차이콥스키의 일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알고 있던 그의 생애와 다른 무슨 흑막이라도 있었느냐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사인이 콜레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부터 보면, 이미 그의 장례식 때부터 친지와 가족들 사이에서는 만연하게 터져 나왔던 루머이고 조작된 사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인이 콜레라가 아닌 비소를 먹고 죽은, 자살을 강요한 타살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그가 콜레라로 죽었다고 알려진 지 한참이나 지나서의 일이다.

왜 그런 상황이 발생했었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자연스레 알게 된다.

볼쇼이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공연 모습

먼저, 그가 어떤 실패와 좌절과 역경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는지 명확하게 되짚어보도록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과의 연애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음악원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던 즈음, 9살이나 어린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열성적인 구애에 시달리게 된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끝에 결국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도록 그를 강요한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인 탓에 결혼 생활은 행복할 리가 없었고, 차이콥스키가 석 달도 채 못 버티고 도망쳐 버리면서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끝났다.

 

말이 좋아서 파탄이지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이혼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아내의 성관계 요구에는 부들부들 떨며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류코바는 결혼을 지속할 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아내가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차이콥스키가 이혼을 아예 포기했다는 일설도 있다. 앞서 그가 결혼에 실패한 여파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짧게 적었던 내용의 골은 그리 짧지 않았다.


이 짧았던 석 달간의 결혼 해프닝은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는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몸과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 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 작곡한 곡이 현악 6중주 op.70 <피렌체의 추억>인데, 들어보면 매우 격정적이고 우울한 곡이다. 제목만 보고서, 피렌체에 여행 가서 본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고 작곡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우나, 반대로 복잡한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이탈리아에 도피성 여행을 간 차이콥스키의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된 곡이다.

볼쇼이 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모습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고 1878년에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이때에 이르러 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좋은 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5년간 꾸준히 자신을 지지하고 후원해오던 폰 메크 부인이 1890년,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그를 후원할 수 없다는 일방적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폰 메크 부인의 재정적 불안은 작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며, 실제로는 차이콥스키와의 관계를 중단하라는 폰 메크 부인의 가족들의 압박과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후원을 중단한 결정적 이유였다고 한다.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폰 메크 부인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니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폰 메크 부인에 대해 강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임종 직전에도 폰 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여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볼쇼이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공연 모습

그렇게 다시 방황하던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 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하고 그것이 초연되자마자,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차이콥스키가 당대의 실권자인 스텐 본크 - 페르머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공작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이것은 소문이라기보다 거의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알고 있던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또 다른 일설로는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했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서훈 취소와 경력 삭제를 포함한 공민권 박탈과 시베리아 유형(4 ~ 5년)에 처해질 중죄였기 때문에 이 고소장을 넘겨받은 검찰 부총장이자 차이콥스키와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동창들과 소규모 비밀 명예 재판을 연 다음 독극물에 의한 음독자살을 종용했다는 설이다.


동성애가 무슨 큰 죄냐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동성애는 차이콥스키의 업적과 인지도 등을 감안한다 해도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범죄에 해당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우려와 더불어 동성애자로서 죽는다면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두 가지 일설 모두 디테일의 차이만 있을 뿐, 그에게 사약처럼 비소를 먹으라고 강요하여 결국 그가 비소를 먹고 죽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세상 어느 누구 하나 그저 편안하기만 삶을 살아간 자, 누가 있겠는가?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사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알려지게 되긴 했지만, 그로 인해 그가 자살을 강요받아 비소를 탄 물을 사약처럼 들이켰어야만 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괴롭고 끔찍스럽다. 이제 막 왕성한 작곡을 통해 최소한 10여 년은 무르익은 걸작들을 뽑아내었을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몰렸을 심정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할 뿐 도저히 가늠할 길이 없다.


동성애자이면서도 자살하겠다며 대시하는 여자 제자를 뿌리치지 못해 결혼까지 했던 이나 그 짧은 결혼생활을 실패로 인정하고 나서도 내내 심신쇠약으로 힘들어했던 것을 보면, 그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리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실을 감추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이를 비난하고 헐뜯으면서까지 혐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15년간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

15년간 직접 만나지도 않는 사이이면서 자신을 지지하고 후원했던 부인을 죽는 그 순간까지 애증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심리적으로 얼마나 심약하였으며 역으로 금전적인 것 이외의 부분에서도 얼마나 그녀에게 의지했었기에 그랬는가 짐작할 만하다.

유명해져서 금전적으로 후원이 끊기더라도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버림받는 그 기분을 그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들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결혼생활에서도, 믿고 의지했던 후원자에게서 버림받았어도 다시 자신을 추스르고 지금 우리가 듣는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사실 볼쇼이 측의 의뢰를 받고 춤곡으로 작곡을 했지만, 그는 당시에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도 한참 뒤에서야 그가 '발레'라는 춤동작에 맞게 그 정서적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는 인정을 뒤늦게서야 받게 된다. 우리는 그저 현재 러시아 3대 발레 작품이 모두 그의 작품인 것만 알고 감탄하며 그 감미로운 선율에 공감한다.

 

당신이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받고 사람에 시달리고 지쳐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느낄 때,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로 위로받고 힐링할 수는 있어도, 그런 음악을 만드는 창작의 고통을 느끼라고 하면 흔쾌히 그럴 수 있을까?

글, 음악, 그림, 조각 그 모든 창작과정은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만든 예술작품을 통해 힐링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감탄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예술가로서 참으로 힘겹기 그지없는 일이다.


연애하다가 깨질 수도 있고, 결혼했다가 이혼할 수도 있고, 15년이 넘도록 플라토닉 하게 우정을 나누다가 그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힘들고 세상 다 무너져버린 것 같고,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만 쉬어도 눈물이 나오고 이까짓 힘겨운 인생 약 한통 입에 털어 넣고 잠들면 편안하게 영원한 수면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원래 그런 거다.

당신이 무언가 이루기 위해 늘 즐겁고 늘 편하고 누군가 인정받지도 않는 나를 믿고 지지해주고 후원해주고, 그런 녹록한 삶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를 갖는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바쳐 무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이 있다면, 그 과정이 고되고 힘겹고, 심지어 그 노력의 과정과 상관없어 보이는 사랑과 사람의 문제들이 당신을 힘겹고 버티기 힘들게 뒤흔들더라도, 당신은 당신이 이루고자 했던, 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야 하고 이뤄내야만 한다.

그 과정을 온전히 마쳐야만 그것이 오롯이 당신이 이루고자 했던 당신만의 삶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당신의 삶에 대해 뭐라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진정 후회 없는 삶을 살았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완성했다고 여길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된다.

 

당신이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사람 하나가 아니고,

당신을 사랑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 사람 하나만이 아니며,

당신이 꿈꾸었던 삶이

반드시 그 형태 하나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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