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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28. 2021

세 살 때 장난치다 송곳에 시력을 잃었음에도...

장애라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한 점자를 만들다.

1809년 프랑스 파리에서 동쪽으로 58km 떨어진 센에마른주 쿠브레이(Coupvray)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시몽-르네 브라이(Simon-René Braille)는 마구와 안장을 제작하는 사람이었고 누나가 한 명 있었다.


그가 3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송곳으로 가죽에 구멍을 내다가, 송곳이 미끄러지면서 왼쪽 눈을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로 그는 왼쪽 눈이 멀었고, 오른쪽 눈도 감염으로 인해 점차 시력을 잃었다. 흐릿해져 가던 눈은 4살이 되었을 때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다. 부모는 아들에게 직업교육과 학교 교육을 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그렇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의 사회권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은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좋은 직업을 결코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와 누나는 앞을 못 보게 된 그를 동정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똑같이 대했다. 아버지 시몽은 가죽을 무두질, 즉 왁스를 발라서 윤이 나도록 하고, 가죽으로 화려한 장식을 짜는 기술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하기, 설거지 하기, 물 긷기 등을 정상인 아이와 같이 가르쳤다. 덕분에 그는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성장할 수 있었고, 소리를 듣는 감각이 뛰어났던 덕분에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마을에 새로 부임한 ‘자끄 빠뤼’라는 로마 가톨릭 신부가 그를 알아봐 주었다. 자끄 신부가 교우들을 심방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영리하다는 것을 알고는 일주일에 3-4일 동안 역사, 과학, 성서를 가르쳐주었다. 빠뤼 신부는 루이에게 여러 지식을 가르친다고 했지만, 결국 전문 교사가 아닌 자신이 아이를 가르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서, 직접 지역의 학교 교사를 찾아가 아이를 입학시켜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처음에는 맹인에 대한 교육에 자신이 없었던 교사가 이를 거절했지만, 빠뤼 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교사를 설득했고, 아이는 결국 시각장애인이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봤을 때에도 월등하게 지적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아 교과서를 볼 수 없는 문제는, 수업 내용을 달달 외워버리는 방식으로 극복하곤 했다. 이런 아이의 뛰어난 능력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빠뤼 신부는 왕립 맹아학교에 루이를 입학시키기 위해 직접 후작에게 편지를 쓰고 방문해서 설득하는 노력을 하여 아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현대식 점자의 아버지. 앞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점자를 만들어 낸 프랑스의 위인인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의 이야기이다.

세상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인 ‘브라이유(Braille)’가 ‘점자’를 뜻하는 명사로 사용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게 루이가 10살 때, 드디어 그는 파리의 왕립 시각장애학교(Institution Royale des Jeunes Aveugles)의 장학금을 지원받게 된다. 이 장학금은 그에게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삶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빵과 물로 연명해야 했으며, 구타와 구금의 체벌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숙한 첼로와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오르간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1821년, 전직 군인인 샤를 바비에르(Charles Barbier)가 학교를 방문하여 그가 창안한 12개 점으로 된 ‘밤 문자’라는 것을 소개한다. 이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전장의 상황에서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비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병사들이 익히기에는 까다로웠지만 점자에 갈급해하던 루이는 금세 그 원리를 익힐 수 있었다.

밤 문자를 공부하고 그 원리를 익힌 루이는, 곧 아버지의 송곳을 이용하여 그의 점자 체제를 창안하기에 이른다. 3년간의 노력 끝에 브라유는 1824년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정렬된 여섯 개의 볼록한 점을 가지고, 알파벳 26글자를 완벽하게 표시하는 새로운 격자 체계를 개발해냈다. 또한 맹인들이 쉽게 읽는 것뿐만 아니라 쓸 수도 있는 점자를 스무 살도 되기 전인 10대에 완성한 것이다.

 

바비에르의 문자가 12개의 점으로 발음과 대응하는 것에 반해, 루이의 점자는 6개의 점으로 글자와 대응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여섯 점으로 된 체제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한 번에 모든 점의 위치를 읽어낼 수 있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다. 또한 기존 점자였던 아우이의 체제와 달리 읽고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졸업 후 루이는 교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낮은 임금이었지만, 왕립 맹아학교의 교사직을 수락하게 된다. 비록 임금은 낮았지만 맹아학교 교사직은 상당한 자유시간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루이는 점자의 개발 및 보급에 더욱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점자를 퍼뜨리려는 노력 도중 당시로서는 불치병에 가까웠던 결핵에 걸린 루이는 결국 잠시 교정을 떠나 고향에서 요양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직접 <맹인들이 만들어 맹인들이 사용하게 될, 점을 이용하여 글자, 음악, 단선율 노래 곡을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러나 수많은 출판사들로부터 출판이 거절되었고, 결국 루이는 한동안 실의에 빠지게 된다.

 

또 루이의 점자보급 활동을 지지하던 피녜박사가 교장직에서 은퇴하고, 새로운 교장으로 뒤포라는 인물이 부임하게 된다. 뒤포 교장은 피녜박사와는 달리 점자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점자사용을 금지하거나,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놨던 점자책들을 불태우는 등 루이의 점자보급 활동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점자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암암리에 점자사용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루이의 점자보급을 지원하던 유일한 동료 교사인 조셉 고데가 직접 나서서 교장과 담판을 지으면서 이 점자 탄압은 끝을 맺게 된다.


뒤포 교장이 점자사용을 다시 용인한 이후, 왕립 맹아학교는 새롭게 지은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루이는 뒤포 교장의 지원을 받아 개관식에서 점자를 발표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루이는 사람들에게 점자의 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서 점자를 만들고 읽을 학생 2명을 선정하는 준비를 하였다. 개관식 발표날 뒤포 교장은 직접 앞에서 책을 읽은 후 이를 한 명의 학생이 순식간에 점자로 만든 후 다른 한 학생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이를 읽어내는 시연회를 연다. 처음 관중들은 이것이 사전에 준비한 사기극에 불과하다며 비난했지만, 곧 뒤포 교장은 재치 있게 무작위로 뽑은 관중이 책을 무작위로 뽑은 후 읽게 하여 똑같은 결과를 도출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관중들의 비난을 잠재우게 된다. 이 성공적인 발표는 점자가 세간에 널리 퍼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를 기점으로 점자는 서서히 수많은 맹아 교육기관들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발표 이후 이미 결핵에 걸려있던 루이의 건강은 시시각각 악화되었고, 결국 점자의 더 나아간 개량과 보급 활동에는 더 나서기 어려워지게 된다. 루이는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며 편지를 통해서만 전 세계의 맹아 교육자와 맹인들에게 점자 사용법을 전달하였고, 다른 점자 보급 활동은 루이의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만든 점자가 완전히 세상에 빛을 밝히는 것을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채 1852년 파리에서 폐결핵으로 43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루이 사후, 점자 알파벳은 1868년에 맹인들을 위한 공식 문자로 인정되어, 유럽 전역의 맹인학교에 널리 보급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점자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맹인 교육기관도 등장하였다. 이후 루이는 사망 100주년인 1952년에 시신이 위인들만 모셔진다는 프랑스의 국립묘지 팡테옹에 재안장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영화 같은 루이의 삶은 당신에게 어떻게 들렸는가?

당신이 말도 제대로 배우기 전인 3살 때 눈이 멀어 장님이 되었다면, 당신은 과연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직접 당시의 점자가 가진 불편함을 개선하며 스스로 점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는 금수저는 고사하고 그저 말안장을 고치는 사람의 앞 못 보는 자식이었을 뿐이다.

 

그의 실패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고자시고도 없을 것이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보았던 것처럼 다른 육신의 불편함이나 어떤 실패나 장애보다 더 클 수 있다. 무엇보다 제대로 책을 읽고 공부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불편함을 누구보다 몸으로 부대끼며 갈급했기에 그는 직접 점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무엇보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행운을 타고났다.

못 배우고 돈이 풍족하지도 않았던 그의 부모가 만일 그가 장님이 된 것을 동정하며 그저 함함하고 키웠더라면 그는 결코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라고 들어갔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 맞고 감금되는 생활 속에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온전한 아이로 키워줬던 부모님과 누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교육에 눈을 뜰 수 있도록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던 빠뤼 신부 역시 그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에게 그런 부모가 없어, 그리고 지원해주는 신부가 없어 루이처럼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포장하고 싶은가?

그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15살에 점자 연구에 돌입했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동안은 물론 만들어내고서도 자신이 쓴 책을 수차례 출판 거절당하는 좌절을 맛봐야만 했고, 자신의 점자를 알리고자 할 시기에도 교장의 시기와 질투 속에서 견제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가 포기했던가? 그가 거기서 좌절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갔던가?

16살에 자신이 직접 점자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그 연구를 계속해가며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는 폐결핵으로 43살의 짧은 인생을 접는 그 시점까지도 침대에 누워 콜록거리면서도 편지를 읽고 썼다.

 

사지 멀쩡한 당신이, 눈도 보이지 않고 폐결핵으로 침대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43살에 생을 마감했던 그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어른들이 말씀하시곤 한다.

사지 멀쩡하고 어디 아픈데 없으면 뭘 해서 살든 어떻게든 산다고.

살아낸다고.


사지 멀쩡하고 어디 가서 돈을 벌어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라는 데도 학원을 가기 싫다고 지방대 나와서 써주는 곳이 없다고 학비가 비싸서 그거 버느라고 아르바이트해야 한다고 그렇게 변명하면 당신의 인생이 조금은 덜 비참해지나?

공부만 잘해도 장학금을 대주고, 생활비를 대주는 시스템은 수천 년간 달라지지 않았다.

공부만 잘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당신의 눈으로 들어오는 그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했던 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내려고 했던 인생인지 그 인생이 지금 그저 낭비하는 당신의 인생과 무엇이 다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못난 자식을 위해, 정작 묵묵히 어디에서라도 부족하지 않게 키우려고 돈을 마련해오시는 부모님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일어서라.

당신이 평생을 두고 사랑으로 갚아도 부족할 분들을 위해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 헬렌 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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